갑골 문자 (r20180326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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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용례
3. 발견사
4. 해석
5. 기타


1. 개요


甲骨文/Oracle bone script
기원전 1,200년경에 처음 등장한, 중국 대륙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문자이자, 한자의 직계조상문자. 거북이의 등껍질(甲)이나 동물의 뼈(骨)에 새겼다고 하여 갑골문(甲骨文)이라고 부른다. 갑골문이 새겨진 뼈는 군사적인 정벌이나 자연재해, 제례를 지내는 방식과 날짜를 신에게 아뢰고 기록한 상나라의 유일무이한 문헌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용례


갑골문은 점복(占卜)을 친 결과를 기록하려는 목적으로 사용한 문자이다. 물론 일반적인 사건을 기록한 갑골문도 존재하지만 흔하지 않다. 사기(史記) 귀책열전에는 "거북이 껍질을 태워 그 징조를 살폈는데 그 변화가 무궁무진했다."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실제 고고학적 결과와 일치했다. 고고학적으로는 거북이 배딱지(복갑)나 등껍데기(배갑)[1]에 의도적으로 구멍을 뚫은 모습과 균열이 보이는 것이 특징.
갑골에 씌여진 글들은 보통 왕이 직접 그 결과를 판단하는 형태의 제사가 많이 보인다. 예를 들자면 "갑자일에 점을 쳤다. 왕이 그 결과를 보고 말했다. 삼일 뒤에 비가 내릴 것이다. 삼일 뒤에 비가 내렸다." 이런 형태로 왕의 점복 관여 흔적이 발견된다. 주로 무정(武丁)시기의 기사가 많은데 갑골문 해독 결과에 따르면 무정이 거느린 무당이 무려 70여 명이나 되었다.[2]
당시 상나라는 제(帝)라는 상나라의 수호신이자 주신신에게 하늘과 자연의 뜻을 물었는데 군사적 문제로는 강(羌)족과, 인방(人方), 주방(周方) 정벌 문제를 많이 제에게 뜻을 묻는다. 특히 갑골문 기록상 주방과 갈등이 심각한데 주방은 훗날 무력 혁명으로 상나라를 전복시킨 주나라로 갑골문에서는 나라를 뜻하는 방(方)과 무리를 뜻하는 족(族)이 혼용되거나 의도적으로 바뀌어 사용된다. 상나라 사람이 주나라에게 품은 악감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상나라 이후 건국된 주나라 또한 갑골 문자를 사용했는데, 역시 점을 칠때 상(商)자를 두고 옷 의(衣)자로 기록하여 비하 목적으로 추정된다. 옷 의의 발음은 '은'으로 추정된다. 또는 상나라의 수도 은(殷)[3]을 비하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나라와 은나라는 대나무 가지나 거북이 껍질을 사용해 점을 쳤다. 점을 치고 나면 이를 모두 버렸다. 한번 점을 친 것은 보관해봐야 영험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주나라에서는 점치는 직책인 복관(卜官)이 이를 소중히 여겨 보관했다.'

사기 귀책열전

참고로 사기에 따르면 점을 치고 버렸다고 언급했으나, 고고학적으로 갑골문은 층층이 아래서부터 겹친 상태로 발견이 되는데, 이는 상나라 사람들이 특정한 장소에 보관을 했다는 말이 된다. 갑골문을 소홀히 여겼다면 따로 발견되어야 하므로 따라서 귀책열전의 내용이 잘못되었는 것이 현재 학계의 반응이다.[4]

3. 발견사


거북이의 배딱지나 짐승의 갑골에 새겨진 상형문자로, 주로 중국의 은허(殷墟) 지역에서 파편 형태로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명나라 말기에 은허 지역은 농촌이었다. 종종 밭을 개간하던 농민들의 의해 상나라의 유물인 청동 기물이나 갑골문으로 추정되는 거북이 껍질이 발견되었는데, 청동기는 시장에 매물로 팔렸으나 갑골문은 뼈라서 귀해 보이지 않아 매물 신세를 면한 것으로 추정된다. 갑골문들은 한데 모아서 한군데에 묻었다고 전한다.
청나라 광서(光緖) 말년에 안양현 소둔촌(小屯村)의 농민들이 밭을 갈다가 갑골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식이 부족한 농민들은 갑골문을 고대 문자라고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문양이 새겨진 뼈라고 인식하였다. 뼈는 농사에 전혀 쓸모없는 물건이었기에 농민들은 갑골문을 한약방에 팔아버렸다. 이렇게 갑골문은 용골이라는 약재로 취급받았다.[5] 의도적인 건 아니었지만 일종의 문화재 수난사였다. 의도적인 파괴는 아니지만 3천년 전의 고대 기록들이 단지 약재로 쓰이느라 파괴된 것이다. 그러다가 1890년대 금석학자 왕의영(王懿榮)이 용골에 새겨진 문양이 고대문자임을 알아내어 본격적인 고고학 발굴이 시작되었다.
청나라 당시에는 청나라의 혹독한 문화 탄압인 문자의 옥이나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고증학이 발달했는데 고증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분야 중의 하나가 문자 자체를 연구하는 소학[6]이었다. 왕의영 자신도 금석학자로 상당한 소양을 가진 인물이라 중국의 고문자에 대해 축적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왕의영이 학질에 걸려 달인당(達仁堂)이라는 한약방에서 약재로 구입했던 용골에 적혀 있는 문자가 자신이 연구하던 금문 이전의 문자임을 직감하고 용골을 구입했던 약방에 문의하여 앞으로 같은 용골이 있으면 자신이 고가로 매입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1899년 한 약재상 혹은 골동상이 대량의 갑골문이 적힌 갑골편을 가지고 와서 바로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7] 왕의영 사후 그가 남긴 갑골 조각들은 같은 금석학자이자 그의 식객이자 친우였던 유악(劉鶚)이 물려받아 연구하여 철운장귀(鐵雲藏龜:철운은 유악의 자(字)다.)라는 책으로 출판하여 갑골문에 대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
이후 하남성 안양 소둔촌이 갑골의 발굴지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발굴 결과 은나라의 옛터인 은허(殷墟)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은허 발굴 당시 거북이 껍질에 새겨진 갑골문이 층층이 겹쳐 있었는데, 왕국유를 비롯한 고고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상나라 궁실에서 점복 결과 기록물을 보관하던 건물 터라는 결론을 내렸다. 갑골문이 어느 정도 해독이 되자 학자들은 사마천사기의 내용에 주목하였다. 청나라 시대 고증학에서는 오제본기-은본기의 상당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학설이 있었는데, 갑골문을 연구할수록 갑골문에서 등장하는 상나라 왕의 묘호와 사기의 왕의 묘호의 순서가 일치한다는게 알려지며 오히려 사기의 내용이 사실임이 입증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상나라는 학계에서 고대 국가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청나라 말기에 한 프랑스 학자가 갑골문으로 은나라 역사를 재구성하기도 했는데, 갑골문이 발굴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생소한 학문은 해외는 몰론 중국 본토에서조차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후 청나라가 민국으로 교체된 뒤 각지에서 군벌들간의 전쟁으로 치안이 혼란했을 시기에도 은허에서는 갑골문 발굴과 해독은 계속되었다. 민국 말기에는 둥쭤빈(董作賓)이 갑골문 연구를 주도했고, 중화인민공화국 초반에는 궈모뤄(郭沫若)가 주도했다.[8]

4. 해석


현재까지 대략 1만 편 이상 갑골문을 발굴했다. 그러나 학계에서 대다수가 동의하는 해독된 갑골문은 겨우 1천여 자에 불과하고 해독하지 못한 글자가 거의 5천 자에 달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갑골문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의문이 가겠지만 해독된 글자는 흔히 사용하는 상용자이고 해독되지 않은 글자는 거의 대부분이 고유명사이거나 딱 한 번만 나오는 글자들이라서 해독에 큰 어려움은 없다. 갑골문은 한자의 원형으로 보고 있지만, 현재 한자의 자형은 남북조 시대에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갑골문과의 자형이나 모양적으로 괴리감이 심하다. 새벽 조(朝)나 아침 단(旦), 비 우(雨), 어조사 우(于)와 같이 무척 단순한 형태의 자형은 현대 한자의 자형과 거의 일치하여 학계에 이견이 없지만, 그외에 갑골문의 자형은 사람이나 동물, 어떤 손짓, 어떤 형상을 그대로 그려낸 영락없는 상형문자로 해독에 있어 큰 이견을 낳게 만든다.
갑골문은 한자의 원형이지만, 당대에만 그친 자형이 존재한다. 또 현대 한자와 자형이 얼추 일치한다고 한들 갑골문의 배경은 기록이 아닌 제례적인 목적 강하기 때문에 또다른 고고학적 해석문제를 낳게된다. 문장 해석에 있어 갑골문은 즉흥적으로 제 순서가 없이 그것도 문법은 엉망으로, 배열이 흐트러진 채로 기록되어있다. 또 기록자가 이전까지 통용되던 자형을 조합하여 단 1회용 문자를 창조하는 경우도 있어 학계를 당황하게 한다.
몰론 갑골문 학계에는 해독에 있어 단비와 같은 문자가 존재한다. 금문(金文)이다. 금문은 주나라의 상형문자다. 고고학적으로 주나라의 유적지에서 갑골문 파편이 출토되었고, 금문의 형태가 갑골문과 거의 일치하여 한자적 연관성과 뜻을 유추하는데 있어서 상호관계의 역할이다. 그러나 금문 자체에서 현재 한자로 이어지는 독창적인 한자, 예를 들면 사랑 애(愛), 알 지(知), 땅 지(地)와 같이 갑골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주나라만의 독창적인 문자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금문은 갑골문과 한자와의 연관성을 연구하는데 중간 다리의 역할을 하지만, 또다른 난관이 존재하는 것이다.
갑골문의 자형은 주로 오른손 우(又), 나무 목(木), 눈 목(目), 발 지(之), 계집 녀(女), 집 면(宀) 등으로 일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형태를 그렸다. 제례와 관련되는 문자는 무당으로 추정되는 계집 녀(女)가 많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어려울 간(艱)에는 갑골문 자형으로는 여성이 북을 두드리는 모습이었으나 나중에는 여성의 모습이 사라졌다.

5. 기타


왕의 이름을 단 한 글자로 겹쳐서 기록하기가 유행했었다. 둥쭤빈은 갑골문의 서체를 다섯 가지로 분류했었다.

[1] 등껍데기는 단단해서 쓰기 어려워 배딱지가 많이 쓰였다.[2] 무정 사후 조갑(祖甲)이 즉위할 때부터 제는 그저 왕의 묘호로 전략해버렸고 당연히 제에게 뜻을 묻는 횟수도 줄어들었다.[3] 상나라의 마지막 국호는 사실 은(殷)이 아닌, 천읍상(天邑商)으로 은(殷)은 도시 이름이다. 상나라는 수도를 중심으로 같은 성의 제후를 봉하였다. 같은 성의 제후에게 읍(邑)을 하사하여 군사적으로는 수도를 보호하고, 주변 이민족을 감시하였는데, 당시 받을 수(受)와 받들 봉(奉)자의 갑골문 자형으로 추정해보면 제후에게 기념수나 정교한 배를 하사했다고 볼수 있다.[4] 사실 귀책열전은 사마천의 원본이 사라져 저소손이 보충했으나, 내용이 난잡하고 가독성이 떨어지기로 유명하다.[5] 다만 문자가 적힌 은나라 시대 갑골만 용골로 취급받은 것이 아니고 땅에서 나오는 오래된 동물의 뼈를 모두 용골로 불렀다. 칼에 베어난 상처에 가루를 만들어 뿌리거나 학질에 달여먹으면 효험이 있다고 여겨졌지만 귀한 약재는 아니었고 원산지에서는 한 근당 동전 몇 개 정도로 거래되었다고 한다. [6] 小學: 소학이라고 해도 조선 시대 아동 윤리 교습서였던 소학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고 한자 자체를 연구하는 한자학을 말한다.[7] 다만 이 에피소드는 1931년 한 신문에 석옹(汐翁)이라는 필명으로 쓴 갑골문이라는 글에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계속 인용되면서 사실로 굳혀진 것으로 지금은 이 일화에 상당한 의문이 재기되고 있다. 왕의영은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서태후와 광서제가 몽진하고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마땅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몸을 던져 사망했기에 정확한 사실은 알 수가 없다. [8] 참고로 둥쭤빈은 갑골문으로 재구성한 상나라의 달력인 은역보(殷歷譜)를 집필하였는데 이 책은 학계에서 문제점과 난해함이 지적되고 있는 책이나, 여전히 갑골문 학계에서 위상이 있는 책이다. 상나라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에 거의 절대적인 기준이 된 책. 그렇기에 은역보를 통해 갑골문을 접했던 한국의 김경일 교수는 은역보의 단점을 거론하면서도 이 책이 학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은 부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