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조선) (r20180326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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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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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숙종 이순

20대 경종 이윤

21대 영조 이금

우승우 화백의 상상 어진.
묘호
경종(景宗)
시호


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
(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

각공(恪恭)
본관
전주(全州)
능묘
의릉(懿陵)
성씨
이(李)

윤 또는 균(昀)[1]

휘서(輝瑞)
출생지
한성 창경궁 취선당
사망지
한성 창경궁 환취정
왕비
단의왕후(端懿王后), 선의왕후(宣懿王后)
부왕
조선 숙종
모후
옥산부대빈 장씨(玉山府大嬪 張氏)
생몰
기간
음력
1688년 10월 28일 ~ 1724년 8월 25일
양력
1688년 11월 20일 ~ 1724년 10월 11일
(35년 10개월 21일, 1만 3108일.)
재위
기간
음력
1720년 6월 13일 ~ 1724년 8월 25일
양력
1720년 7월 17일 ~ 1724년 10월 11일
(4년 2개월 25일, 1547일.)

경종 어필.
1. 개요
2. 출생과 성장
3. 대리청정기
4. 재위
5. 경종은 불임이었나?
6. 연잉군과의 관계
7. 비만 경종과 경종 독살설
8. 왕비
9. 능
10. 경종이 등장한 작품
10.1. 드라마
10.2. 소설
11. 관련 항목
12. 둘러보기(계보)


1. 개요


조선의 제20대 국왕. 묘호는 경종(景宗), 시호는 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 휘는 윤(昀), 자는 휘서(輝瑞). 숙종희빈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숙종영조 사이에 낀 임금인데다 재위 기간이 짧다보니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지도가 바닥을 기는 왕이다. 하지만 동시에 기나긴 영조 시대를 설명하는데 좋든 나쁘든 빼놓을 수 없는 왕이기도 하다. 숙종이 조선의 헨리 8세라면, 경종은 조선의 메리 1세 격.[2]

2. 출생과 성장


숙종의 첫 아들이었던 까닭에 태어난지 100일도 안되어 원자 책봉을 받았다. 무엇보다 당시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희빈 장씨의 소생이었고, 연잉군과 연령군 같은 다른 왕자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왕자가 경종과 숙빈 최씨 소생의 요절한 아들 밖에 없었기에 그는 숙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장희빈과 이를 배경으로 하는 남인들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던 까닭에 유년기에는 비교적 평탄한 세자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숙종은 알다시피 무수한 환국을 일으키며 신하들을 찍어눌렀고, 어머니가 후궁으로 낮추어지고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그도 인현왕후의 아들이 된다. 어찌보면 어머니의 원수지만 그래도 인현왕후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14세가 되던 해에는 결국 생모 희빈 장씨까지 사약을 받는 사태가 터졌다. 이 때 세자였던 경종은 대신들에게 찾아가 어머니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했지만 "이게 다 세자 저하를 위한 것"이라 둘러대면서 세자의 요청을 쌩깠다. 야사에서는 이 사건(장희빈이 전주이씨의 씨를 말리기 위해 경종의 성기 즉 고환을 잡아땡겨 성불구자가 되어 시름시름 앓게 됨.) 이후로 경종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고 한다.[3]
거기다 생모가 사약을 받는 와중에도 법률상 어머니인 인현왕후의 빈소를 상주로서 지켜야 했으니, 마음 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후 1716년의 병신처분으로 2년전 죽은 윤증이 추탈되면서 상황은 그로기로 몰렸다.

3. 대리청정기


숙종 말년에는 부왕이 지병으로 누워 대리청정을 맡게 된다. 이는 노론의 이이명이 숙종과 독대한 후에 청한 것으로서(정유독대)[4], 주도자에서 보듯 경종의 실수를 통해 세자를 교체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경종의 대리청정은 내리는 비답이 "아뢴대로 하라", "따르지 않겠다", "유의 하겠다"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극도로 조심스러웠다. 기록에 보면 김창집을 비롯한 노론계 신하들이 유의하겠다고만 하지 말고 가끔은 모르면 물어보고 의견도 내어보시라고 간했는데 경종의 답변은 "유의하겠다"였다.
다만 딱 한번 큰소리를 내며 노발대발한 적은 있다. 승지 유숭이 늦게 입시하자 '당장 여기서 물러나라. 사관들도 물러가라! 신하가 되어서 너희들이 이렇게 날 기다리게 할 수 있느냐? 여섯 승지들을 모조리 나문해라!' 하며 폭발적으로 화를 낸 것. 돌발 상황에 대신들도 당황해서 어쩔줄을 몰라 했고, 공포에 질린 승지 및 사관들은 데꿀멍하여 세자 앞에서 물러나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를 푼 세자는 행동이 지나쳤음을 인정하며 승지들에게 다시 입시를 하라고 했다. 아마도 억누른 감정이 작은 일에 터져나온 것으로 보인다. 물론 며칠 뒤에 신하들이 이 일을 지적할 때의 대답은 "유의하겠다"가 전부였다. 이에 대해 숙종은 비망기를 통해 지나친 행동이었다고 질책하였는데, 세자를 두둔하는 소론 신하들이 오히려 '주상께서 지나친 행동임. 비망기로 질책할 정도는 아닙니다'라고 말해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었다. [5] 당시 숙종은 중병을 앓고 있는데다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세자의 권위를 깎아서는 안된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것 같다. 숙종은 "내가 세자 아빤데 부자간의 정리로 그런 말도 못하냐?"라고 투덜거렸으나 본인도 이런 짓 많이 해봤고 병세가 위중하여 화도 못내고 드러누워 버렸다.
어머니가 사약을 받아서 자신도 아버지에게 미운털이 박힌 상태이고 연령군, 연잉군이 숙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는데다가 자신도 정궁의 소생이 아니었기 때문에[6] 언제든지 갈릴수 있었기 때문에 신중하게 행동한 듯하다. 정궁인 인현왕후의 폐서인과 복위, 어머니의 사사를 보면서 부왕(숙종)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숙종은 세자 교체를 내심 고려했는데 당시 청나라 강희제의 태자가 교체되었고[7], 연약하고 강하지 못한 경종을 못 미더워하는 점이 실록에도 간간히 보인다.
노론에서는 이런 왕의 의도를 알고 연잉군을 밀어주려 안간힘을 썼고, 숙종의 의중을 어떻게든 활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세자를 지지하던 소론 측 인사들이 격렬하게 반발했고, 숙종이 앓아서 누워있는데다 대리청정을 그럭저럭 잘하고 있는 세자를 함부로 바꾸자고 나오기 어려웠다. 위에 나오듯 극도로 조심스럽게 행동하다 보니 특별히 공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드러진 실책을 한 적도 없었다.
당시의 정황을 보면 숙종이 "내가 아파서 왕노릇을 못해먹겠는데 세자에게 대리청정 좀 시키는게 어떠냐?"라고 하자 영의정 김창집을 비롯한 노론 대신들이 즉각 찬동하면서 세자의 능력을 칭찬했는데 그동안 반(反) 세자임이 분명했던 노론이 이러는 것이 너무 냄새가 나서 소론 대신 영부사 윤지완 등이 도끼를 가지고 지부상소를 하는 등 한동안 분위기가 험악했다.
어쨌거나 찔리는 것이 있었는지 숙종은 윤지완의 상소에 대해 "말 좀 가려서 하지..."라면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예 노론에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 큰 실책을 저지르길 기다렸다가 이를 빌미로 공격하려 했는데 세자가 큰 사고없이 무난히 정국을 이끌어나가다 보니 "어? 어? 이게 아닌데?!" 하고 있다가 실패했던 셈이다.
어쨌든 아슬아슬하게 세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경종은 1720년 숙종이 승하하면서 간신히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숙종이 조금만 더 건강했거나 오래 살았으면 왕에 못 올랐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조선 시대 시스템 상 왕이 마음대로 세자를 팽개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무기력하긴 해도 실수도 하지 않는 경종을 내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조선의 역대 왕세자 중 최장 기간을 세자로 지낸 기록을 가지고 있다.[8] 이래놓고 재위 기간은 최단 쪽에서 따지는게 더 빠르긴 하다.

4. 재위


즉위 후 노론의 우려와는 달리 피의 복수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즉위했다고 해도 다수파인 노론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경종 본인도 하루가 멀다하고 자리보전하고 눕기 일쑤였으니 치적을 세울만한 환경은 못됐다. 사실 노론은 이 당시 왕만 자기 편이 아니지 비변사, 육조, 삼사 등이 노론 차지며 성균관, 사학의 유생들 대다수가 노론이며 심지어 궁내의 내관, 궁녀도 노론과 줄이 이어져 있어서 궐 안 상황도 체크할 수 있었다. 이런 야당 같지도 않은 초거대 집권 야당(?)이 버티고 있는데 어쩌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노론은 연잉군세제 책봉을 관철시켰고, 심지어 대리까지 주장했다. 이 대리는 이뤄지지 않았으나 김일경이 이를 근거로 노론의 숙청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면서 피바람이 분다. 또 다음해인 1722년, 목호룡이 노론이 경종을 살해하고 이이명[9]을 옹립하려 한다고 고변하는 사태(삼수의 옥)가 발생했다. 이렇게 신축년, 임인년 2번에 걸쳐 대숙청인 신임옥사가 일어난다. 이 과정이 경종의 태도 변화와 맞물려 매우 드라마틱 하므로 항목 참조. 일부[10]에서는 경종이 처음부터 노리고 있었다는 해석을 택하고 있고, 알려진 해석들은 병약한 경종이 소론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다는 것인데 실록의 기록을 보면 전자의 가능성이 상당하다. 경종이 노론의 변명에 태도를 돌변하여 "결탁이니 교통이니 따위의 말은 심히 무엄하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라고 일갈을 날려버렸다든지...
대리청정 논란으로 유배되어있던 노론 4대신(이이명, 김창집, 조태채, 이건명)이 유배지에서 사약으로 사사되고, 노론측 인사들이 대거 숙청된 뒤 경종 말년까지 소론 강경파들이 집권하며 노론의 씨를 말리는 피의 나날들이 이어졌다.

이때 이후로도 경종은 한 번 제대로 분노를 폭발시킨 적이 있다. 노론이 초토화되자 소론 측에서는 얼씨구나 하고 노론 씨말리기에 더불어 영조의 세제 추탈에도 앞장섰는데 그 와중에 너무 경종이 소극적이라는 식의 주장이 나왔다. 그 말에 경종은 전에 없이 크게 분노하여 일갈을 토해냈다.[11]
당황한 소론은 싹싹 빈 끝에 겨우 경종의 화를 가라앉혔고, "우리도 너무 나대다가 노론처럼 싹 갈리는 거 아냐?"하는 불안감에 노론에 대한 공격 수위를 낮추기 시작했다. 바로 그 상황에서 소론 강경파(준론 - 김일경 등)와 온건파(완론)의 분당이 일어났다.
과소평가 받는 면이 없지 않지만 보는 바와 같이 얌전해 보이면서도 신하들을 쥐어잡을 때에는 확실히 쥐어잡았다. 주변에서 끊임없이 이간질하고 실제로 개인적으로 앙심을 품을 수 있음에도 왕실의 리더로서 똘똘하고 자신 다음의 정통성을 갖춘 이복 동생 연잉군을 지켜줘서 아들이 없었음에도 왕위 계승이 차질 없이 이루어질 수 있게 했다. 어머니 문제, 자신의 좋지 못한 건강, 경쟁자라고 볼 수도 있었던 동생, 갈라져 있던 조정의 분위기 등 여러 난제가 산적해 있었지만 숙종과 영조 사이에서 자신의 역할은 충실히 다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노론과 소론의 격렬한 정쟁 속에서 치이다가 결국 즉위 4년, 37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세자 시절 대리청정을 할 때 노론 대신들을 찍어누르고 양전 사업을 강행해서 완성시켰던 기록 등이 있는 걸 보면 뒷 배경만 안정적이었으면 국정을 잘 이끌어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설도 있다.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밝혀 놓은 남구만의 《약천집》이 발간되었고, 서양의 것을 모방한 소화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12] 와문진종(시계)을 들여온 것도 이때.

5. 경종은 불임이었나?


경종은 자식을 두지 못했고, 이미 연잉군을 왕세제로 지명해뒀기 때문에 연잉군이 그 뒤를 이었다. 이에 잘 알려진 경종의 불임설이 있다.
경종은 젊어서부터 병약했다. 어머니가 당쟁에 휘말려 죄인으로 죽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상황에서, 제2의 연산군이 되어 피바람이 몰아칠까봐 두려워한 노론 신하들이 틈만 나면 갈궈대고, 아버지 숙종도 희빈 장씨의 아들이란 이유로 허구한 날 갈궈 대니 거기서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했을 것이다. 미치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하다는 평이 있긴 한데, 노론 측에서 남긴 기록을 보면 살짝 정신이 돌아버린 부분도 있었던 모양.
노론 강경파의 영수 민진원의 단암만록을 인용하자면 "세자는 때때로 벽을 향하고 앉아서 조그마한 소리로 중얼거려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했다. 또 한밤중에 계단과 뜰 사이를 방황하기도 했고 정신도 안정되지 못했으며 지각도 불분명했다. 숙종의 상에도 한 번도 곡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까닭없이 웃기까지 했다." 노론의 기록이란 특성상 악의적인 표현일 가능성이 있으나 경종이 느낀 스트레스가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불임설도 여기에 나왔다.
경종이 불임인 것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가장 유명한 일화가 사약을 받기 전 희빈 장씨가 죽기 전에 세자를 보고 싶다고 애원했고, 이에 마음이 약해진 숙종이 세자를 데려오도록 했다. 하지만 희빈 장씨는 돌연 세자의 영 좋지 않은 곳을 꽉 붙잡고 당기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 때문에 경종이 기절했는데 이로 인해 자식을 둘 수 없는 성불구자가 됐고 병약해졌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야사에서 나오는 이야기이고 조선 왕조 실록에 쓰여진 정사가 아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 설민석이 이를 방송에서 애기했다가 역사 전공자들에게 줄기차게 까이기도 했다.
만약에 장희빈이 정말로 이런 짓을 했다면 단지 사사로 그칠 일이 아닐뿐 세자에게 했다는 말을 토대로 장희빈은 명백한 대역죄인이 된다. 그렇게 되면 능지, 효수, 연좌 3 콤보 중 하나라도 당했음이 틀림없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건 앞에서 언급한 말들은 그저 창작에 불과하다는 소리가 된다.
또한 경종이 불임이 되어 자식을 못 낳으면 당연히 세자 자리에서도 밀려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 당시에는 후사를 이을 수 없는 사람이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후사를 이을수 없음은 세자에서 밀려나가고 세자에서 밀려나가지 못함은 왕이 될 수 없는 것이며 더 나아가 죽음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남인 복귀, 명예 회복은 꿈조차도 꿀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장희빈이 당연히 모를 리가 없다.
애초에 경종을 세자 자리에 앉히려고 노력한게 장희빈임을 감안하고 더군다나 사약 먹을 때는 금부도사를 비롯해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 앞에서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금부도사가 보고하지 않을 리가 없고 보고하면 즉시 기록으로 남겨지는데 정사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즉 야사는 야사일 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경종이 완전한 성불구였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학자들은 대체로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생식 능력 저하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굳이 장희빈과 연관을 짓자면, 위에서 언급했듯이 경조가 생모의 죽음 자체에 충격을 받고 쇠약해진 정도가 적당하다. 결혼을 2번이나 했음에도 끝내 자손을 두지 못했고, 계비인 선의왕후와 함께 양자를 들이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단순한 생식능력 저하였다면, 왕비의 불임을 의심하고 후궁을 한명이라도 들이려는 노력이 있었을것이나,경종은 단 하나의 후궁도 들이지 않았고, 양자를 고려하는 등의 아예 자식을 낳을 기대 자체를 하지 않았음을 볼때 성불구도 전혀 아니라고 부인할수만은 없다.
하지만 왕실의 대전제, 대원칙인 효-현-숙 '삼종의 혈맥'을 고려하면 해당자는 연잉군의 아들(후에 진종소황제로까지 추숭되는 효장세자)뿐이었다. 그러나 즉위 당시 효장 세자의 나이는 겨우 생후 16개월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의외로 간단한 해법이 있는데 소현의 증손자 밀풍군이었다. 이인좌의 난에서 그들이 괜히 밀풍군을 옹립한 것이 아니다.[13]
세자/세제 책봉은 청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되는 일이었는데 청나라에서 "아니 왕이 아직 젊은데 왜 동생을 세제로 책봉하나?"라 의문을 제기하자 당시 책봉 요청을 위해 갔던 노론의 이건명, 윤양래 등이 "왕이 발기불능[14]이라 자손을 둘 수 없다"고 보고했다.[15] 결국 청나라의 기록에도 남게 됐는데 그 때문에 경종이 성불구였다는 설이 퍼진 모양이다. 이래저래 안습.

6. 연잉군과의 관계


노론과 소론의 정쟁 속에서 이복 동생 연잉군이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이었으나 형제 간에 우애는 각별했다고 한다. 소론의 공격으로부터 연잉군을 필사적으로 보호했고, 동생이 찾아오면 환대하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등 평소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경종이 병색이 완연해져 자리보전을 하고 있을 때 연잉군이 병문안을 들었다. 그러자 아픈 와중에도 경종이 "창문을 열어라, 세제가 덥겠구나"라고 말했다고 할 정도.
박시백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박상검이 일으킨 역모 사건 이후 경종이 속으로는 연잉군을 매우 불신했으나, 세제에 대한 의혹들을 차단하고 보호함으로서 좋든 싫든 연잉군이 자신의 하나뿐인 후계자임을 인정했다고 주장한다. 법적으로 문제 없는 계승자는 연잉군 뿐이었다. 소현세자의 후계인 밀풍군은 너무 멀고 자칫 잘못하면 효종의 정통성을 건드릴 수도 있었다. 그의 시각에 따르면 연잉군은 이후 "황형"이라며 경종의 우애를 강조했으나 이것은 정치적인 쇼맨십이었을 뿐이며, 진정한 대계를 생각한 경종이 더욱 우애를 표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애증.[16]
경종과 연잉군의 정치적 대립이 극에 달했을 때는 경종이 연잉군에게 직접 폭언을 한 적이 있다. 신축환국 직후 정치적 위협을 느낀 연잉군이 '환관과 궁녀 중 나를 해치려 하는 자가 있다'며 조사해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하자 경종은 이를 거부했다. 연잉군이 거듭 요구하자 경종은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린 것. (경종실록 1년 12월 22일 기사)임금이 직접 욕을 했을 경우 실록에서는 이런 식으로 적절히 필터링을 하는 편이다. 연잉군의 의도는 내관 및 궁녀 집단에 있는 자신의 반대 세력을 탄압함으로서 세제로서의 위치를 강화하고자 한 것인데, 이를 간파한 경종은 지나친 부탁에 분노한 나머지 연잉군에게 폭언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연잉군이 '주상께서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시니 차라리 세제 자리를 내놓겠다!'는 폭탄 선언을 거듭해서 했고, 당황한 조정 대신들이 수사를 속개했다. 이 때 노론은 물론이고 소론조차 세제를 편들었다. 반대 세력이긴 해도 어쨋든 확고한 왕위 후계자인 세제 대신 일개 환관 및 궁녀들을 편들 수는 없었기 때문. 조사 결과 실제로 연잉군을 해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내시 박상검과 문유도, 궁녀 석렬과 필정을 잡아들여서 자백을 받아낸 후 사형을 집행했다.[17] 이로 인해서 연잉군의 위치는 제법 견고해졌다. 그러다가 목호룡의 고변으로 신임옥사가 터지자 연잉군은 졸지에 역적 수괴로 몰릴 판국이 되었고 거적을 펼치고 그위에 엎드려 '나같은 죄인이 어찌 세제가 됩니까?' 라고 울며불며 고할 정도였다. 하지만 경종은 노론이 세운 세제임에도 불구하고 연잉군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왕에게 독을 먹인 김씨 성의 궁인을 찾아야 한다는 상소에도 김씨가 한둘이 아니라 못 찾겠다고 거부하여 옥사의 확대를 막았다.
서로의 속마음이야 어쨌든 경종은 연잉군을 소론 준론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었고, 연잉군 역시 죽을 때까지 이복 형 경종에 대해 자주 회상하고 그리워하는 말을 자주 했다. 특히 영조 재위 초반기 영조가 내세운 탕평책의 중심 인물들은 바로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 온건파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대표적 인물이 바로 박문수.(소론 강경파들은 끝내 영조를 거부했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노론의 지지를 받은 세제 영조가 소론 정권 아래서 무사히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고 나아가 영조의 탕평책에 힘을 실어준 셈이니 영조 입장에서 경종은 분명한 생명의 은인이자 자신의 정책에 힘이 된 신하들까지 내려 준 '어진 황형'이다. 영조가 경종에 대한 우애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면도 있지만, 자기 권력이 막강해져서 꼭 이런 정치적 제스처를 취할 필요가 없는 말년까지도 형을 그리워한 행적을 보면 영조가 경종을 그리워한 것은 완전히 정치적 제스처였다거나 가식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심지어는 죽기 6년 전인(경종이 죽은지 약 46년 후) 77세 때 손자 정조와 함께 존현각에 올라서는 "이 건물이 우리 황형께서 세자 시절 공부하시던 곳이다. 오늘 할아비와 손주가 함께 앉으니 황형에 대한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는구나"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이런 행동을 상당히 자주 하는 임금이기도 했다. 걸핏하면 부왕 숙종을 그리면서 울고, 생모인 숙빈 최씨를 그리면서 또 울고(...) 가뜩이나 눈물을 필살기로 장전한 임금이었는데 잔정도 참으로 많았던 듯 하다. ...뭐라구요? 오죽하면 영조가 죽고 16년이 지난 정조 16년에는 윤구종이 혜릉(경종의 왕비인 단의왕후 심씨의 무덤) 앞에서 "이 무덤에서도 말에서 내려야 하나?"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는 혐의로 붙잡아 국문하니 '의릉(懿陵: 경종의 능호)에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려 했다(='경종에게는 신하로서 충성하고 싶지 않았다'는 뜻)'하였다. 그러자 정조가 "아니 선왕의 효성과 우애는 모두가 알아주는데 어찌 이럴수 있냐?"라고 한 적이 있다. '이게 무슨 흉악한 발언이며. 천지간의 사람으로서 어찌 이처럼 극악한 말을 할 수 있는가'라며 경악하였고 조정 대신들도 이에 동조했다. 즉 윤구종의 행동이 오히려 영조를 모욕한 행위라고 지적할 정도로 후대 사람들은 영조의 우애를 인정했다는 뜻이 된다. 당연히 윤구종은 역적 수준으로 국문을 받았고, 이를 이기지 못했는지 처벌받기도 전에 사망했다.
이후 영조는 경종을 모셨던 친소론 상궁과 내관들로 하여금 사도세자를 모시게 하여 사도세자의 권위를 높여주려 했는데 이게 나중에 사도세자가 소론이 아니냐는 다 썩은 떡밥을 남긴다. 유의해두자. 사도세자가 친소론이란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노론 음모론 추종자들이나 받아들일 이야기.

7. 비만 경종과 경종 독살설


대중이 여기는 경종의 모습은 이런 '병약하다'는 이미지가 강해서 마른 체형에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비만 체형이었다. 뚱뚱하고 후덕한 외모가 대중적인 병약한 이미지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일어나는 오해.
승정원 일기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는데(숙종 39년 일기), 25세 때인 1713년 기사에는 경종의 모습을 "비만태조(肥滿太早·아주 일찍부터 살이 찌다)"라고 했고 재위 2년 기사에는 "성체비만(成體肥滿·다 커서도 살이 쪘다)"으로 묘사돼 있다. 비만한 만큼 더위를 많이 느끼고 땀이 많이 나는 질환을 자주 앓았다. [18]
몸이 안 좋은 것 자체는 사실이었던 듯하다. 자식도 없었던 점이며 마흔도 못되서 죽은 점이며... 심지어 경종 2년 6월 24일에는 삼수의 옥 문제를 논의하다가 신하들 앞에서 오줌을 싸기도 했다. 민망해진 대신들이 물러나길 청했으나 경종은 괘념치 말고 남으라고 했다.[19] 그런데 사헌부 지평인 이거원이 "군신 간에도 예의가 있는데 말도 안 하고 소피를 누다니 예의에 어긋납니다"라고 왕을 비판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경종 독살설 문서 참조.

8. 왕비


그의 두 아내들은 꽤 팔자가 사나운 편이었다. 첫 아내 단의왕후 심씨는 세자빈 시절에 요절했는데, 실록에 보면 정신 질환이 있었다고 한다. 경종의 자식이 없는 이유는 단의왕후의 탓도 있다. 그녀의 집안은 후에 이인좌의 난에 참가하는 바람에 몰락했다.
2번째 아내 선의왕후 어씨는 일찍부터 영조를 경계했다. 선의왕후는 14세에 경종과 혼인했는데 불과 2년 뒤 숙종이 사망했고, 뒤이어 경종이 사망했으므로 여러 모로 아이를 가지기 힘든 상황이기는 했다. 어씨와 그의 친족들은 다른 왕족을 양자로 들여 경종의 뒤를 잇게 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이 탓에 영조와 사이가 나빠서 영조가 즉위한 뒤에 둘이 서로를 무시하는 일이 잦아 난감한 일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이인좌의 난을 뒤에서 부추겼다는 말조차 있을 정도니. 그래서 그런지, 효장세자를 그녀가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효장세자 항목에 보면 나와 있듯이 효장세자는 일개 궁인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추정한다.

9. 능


의릉 문서로.

10. 경종이 등장한 작품


사극에서는 주로 어린 시절이나 청소년기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왕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인 장희빈이 주역인 경우가 많다 보니 정작 경종이 왕이 된 이후의 이야기는 잘 다뤄지지 않는 편이기 때문. 왕이 된 이후 이야기를 다루려 해도 재위기간이 짧았으니 사극에서 다루기는 쉽지 않으며 이번에는 이복동생인 영조에게 밀리는 판. 37세에 사망했기에 '청년 임금'이라는 이미지는 완전히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사극 속 경종은 주로 청년 모습으로 등장한다.

10.1. 드라마


왕세자로서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역사 왜곡으로 태어날때부터 고자였다는 설정을 적용했다. 또한 연잉군(영조)와의 관계가 매우 우애가 깊게 묘사되어 있다.
등장한 왕세자 이각의 모델이라는 설이 팬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친모가 폐위된 왕비이고, 경종 독살설의 증거로 꼽히는 게장과 감이 극에서도 소재로 등장하며, 경종은 세자 시절에 한번 세자빈[20]을 죽음으로 잃었기 때문.
왕세자 시절부터 나온다. 근데 작가가 경종에게 무슨 악감정이 있는지 매번 연잉군에게 열폭을 해대는 찌질이 왕으로 나온다.
  • 이강백이 지은 희곡 《진땀 흘리기》는 노론들에게 빨리 영조에게 양위하라는 괴롭힘을 당하는 경종의 심리적 고통을 다루고 있다.

10.2. 소설


드디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숙종 44년을 배경으로 세자 시절의 경종과 생과방 나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로맨스 소설이다. 경종 외에 연잉군(훗날의 영조)과 내시 박상검, 선의왕후 어씨, 숙종 등이 대거 등장하는 팩션 소설로 보인다.

11. 관련 항목



12. 둘러보기(계보)



조선의 역대 국왕
19대 숙종 이순

20대 경종 이윤

21대 영조 이금
조선의 역대 왕세자
숙종 이순

경종 이윤

영조 이금 (왕세제)
[1] 실록에선 윤이나 균으로 읽는다.[2] 장희빈은 앤 불린과 비슷하지만 오히려 경종은 에드워드 6세 혹은 메리 1세, 영조는 엘리자베스 1세와 비슷하다.[3] 신빙성은 부족하다.[4] 다만 당시 독대의 내용이 직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숙종과 이이명이 비밀리에 세자의 대리청정을 확실하게 합의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견을 주고 받으면서 암묵적으로 상호 동의를 내린 수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5] 노론쪽에서도 사간 이봉익이 상소를 올려 숙종이 승정원에 내린 비망기가 지나쳤다고 말했을 정도였다.[6] 따지고 보면 후궁 소생. 장희빈이 한때 중전까지 된 적은 있으나, 경종을 낳을 당시 장희빈의 신분은 중전이 아니었다.[7] 새 태자가 바로 경종 년간에 즉위한 옹정제이다.[8] 30년. 세자+황태자 기간을 합하면 순종이 32년으로 더 길다.[9] 이이명이 부각된 것은 아들 이기지가 경종 살해에 참여한데다가 이이명이 전주 이씨로 왕실의 먼 친족이었기 때문이다. 실질적 이유는 노론 4대신의 필두였기 때문이지만...[10] 현대 저작물 중에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다루고 있다.[11] 이때 사관의 평이 "왕께서는 평소에 지나치게 얌전하셔서 흉악한 무리들이 전하를 업신여겼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하늘과 땅을 뒤집듯 피의 숙청을 하시니 전하께서 본성을 숨기고 계셨음을 이제야 알겠다"고...[12] 불 끄는 소화기가 맞다. 수총기(水銃器), 즉 물대포였다. 경종 실록 3년 5월 25일에 보면 관상감의 허원이 청나라에서 들여왔다고 한다. 그러나 비용 문제로 각 군문에 수총기를 두라는 목표는 실현되지 못했다.[13] 하지만 밀풍군 영입이 살짝 힘든게 밀풍군은 경종과 촌수가 8촌이나 된다. 왕실에 자손이 없기로서니 정말 그렇게 되는 경우는 가까운 친척이 아예 없을 경우인데 연잉군이 있는 마당에 밀풍군 영입은 명분없는 행동이다. 게다가 아무리 소현 세자의 후손들이 복권되었다고 하지만 잘못하면 예송논쟁마냥 효종의 정통성 역린을 건드릴 수 있다.[14] 음위증(陰萎症)이라고도 한다.[15] 이는 모욕을 넘어서 능멸에 가까운 발언이다. 발언의 수위를 생각하면 당장 주살당해도 할 말이 없는 수준. 주살 수준이 아니라 경종 정도의 배짱이면 아예 이건명 집안 자체를 박살 내버릴 수도 있고. 경종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훗날 이건명이 사약을 받아 죽고 경종은 급속도로 쇠약해져 2년 만에 죽는다.[16] '지금 세제를 내쳐버리면 종사는 어찌 한단 말인가? 미우나 고우나 지금 왕실엔 세제와 나 뿐이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5권中.[17] 다만 박상검의 경우 자복하지 않고 죽었고 석렬과 필정은 자살했으며 문유도만이 자복했다.[18] 승정원 일기 477책 (탈초본 25책) 숙종 39년 4월 9일 병진 22/23 기사 입진할 때 이이명 등이 입시하여 진맥 결과 등에 관한 문제, 의관 중 사관시임이 올라온 지 오래된 문제, 왕세자(경종)의 증후에 관한 문제에 대해 논의함[19] 14번째 줄, 하지만 요실금 같은 것인지, 아니면 몸을 돌려 요강 등에 소피를 누었다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20] 청송 심씨로, 이후 단의왕후로 추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