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대한제국) (r20180326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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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고종(高宗)[1]
시호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
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
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
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
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
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2]
군호
익성군(翼成君)
절일
만수성절(萬壽聖節)
연호
개국(開國)[3], 건양(建陽)[4], 광무(光武)[5]
본관
전주(全州)
능묘
홍릉(洪陵)

명복(命福)[6] / 재황(載晃)[8] / 형(㷩)[9][10] / 희(熙)[11]

명부(明夫) / 성림(聖臨)

주연(珠淵)
출생지
조선 한성 정선방 흥선군 사저
사망지
일본제국령 조선 경기도 경성부 덕수궁 함녕전
장례식
1919년 3월 3일
황후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양부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 조선 익종, 효명세자)
양모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
생부
흥선대원군 이하응
생모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생몰기간
1852년 9월 8일(음력 7월 25일) ~ 1919년 1월 21일[12]
재위
기간
현직 재위
1864년 1월 21일(음력 1863년 12월 13일) ~ 1907년 7월 20일
조선국
국왕
1864년 1월 21일 ~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황제
1897년 10월 12일 ~ 1907년 7월 20일
대한제국
태황제
1907년 7월 20일 ~ 1910년 8월 29일
일제강점기
이태왕
1910년 8월 29일 ~ 1919년 1월 21일

1. 개요
3. 평가
3.1. 상세
3.1.1. 권력 집착
3.1.2. 재정 운영
3.1.3. 외교와 내정
3.1.4. 반일
4. 개인사
4.1. 고종과 군밤떡밥
4.2. 미국인 황후 에밀리 브라운 떡밥
4.3. 숨겨진 딸 이문용 떡밥
5. 가족관계
6. 어진과 사진
7. 현대 매체에서의 고종
7.1. 각 매체의 고종
8. 관련 항목




1. 개요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태황제(太皇帝). 휘는 재황(載晃), 형(㷩). 연호광무. 대한제국을 제외한 조선의 마지막 왕이다.[13]
안으로는 부국강병, 바깥으로는 국체 보존이라는 2가지 시대적 대과제를 맡았으나 어느 것 하나 달성하지 못한 군주. 두 목표를 전부 달성하면 사실상 먼치킨이지만 고종이 보여준 행각은 이도 저도 아닌 우유부단함의 점철이었고, 오히려 동학 농민운동당시 파병요청 등 조선 멸망을 스스로 가속화한 행보도 보여준다.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읽지 못하는 어두운 바보는 아니었지만 민첩하진 못했고, 큰 힘에 맞설 시도조차 하지 않고 굴복할 만큼 나약하진 않았으나 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결단력은 무척이나 부족했다. 불가능에 가까운 시대과제를 해결할 비범한 지도자가 필요한 시대에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떠안은 보통 사람.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정치술은 대단했지만 정작 외세에는 한없이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모습만 보여줘 가뜩이나 어려운 시절에 해악과 병크를 많이 끼쳤다. 그나마 일본에 사실상 합병된 후 죽기 전 비자금으로 독립운동을 도우려 했지만, 그마저도 완전히 성공하진 못했고 실패했다(헐버트 문서 참조).
상명지통[14], 고분지통[15]은 물론, 망국지통[16]에 독살의혹까지 겪게 된 비운의 군주로도 유명하다. 혜경궁 홍씨를 능가한다.[17]
재위기간이 조선왕조 전체를 통틀어 영조(52년), 숙종(46년)에 이어 세 번째로 긴 임금이다. 게다가 태황제 3년을 더하면 숙종을 뛰어넘고, 이후 이태왕으로서의 기간을 더하면 56년(+ 15일)로 영조를 거뜬히 뛰어넘어 발해 문왕의 기록에 근접한다. 망국이 없었다면 살아있는 기록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
그의 치세에 조선이 개항부터 시작해 실질적으로 망했으므로 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는 찾아보기 힘들며 단지 '잘 해보려 했는데 시대가 따라주지 않았다', '운도 안 따라줬고 결과도 안 좋았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식으로 졌지만 잘 싸웠다식의 동정론적 평가를 받거나, 제국 멸망 후 안습한 왕족들의 삶[18]등으로 인한 동정표도 많이 받으나, 혼란한 시대였지만, 동시에 뚜렷한 능력을 보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라는 평가도 있으며 그의 근대화 노력 자체는 민씨 일가의 부패, 두루뭉술한 행정, 서양 문화와 기술에 대한 불이해 등의 여러 실정으로 점철되어있는 것이 사실이며, 고종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은 고종이야말로 나라를 망친 병신 중에서도 으뜸이라고도 볼 정도다.
그의 한계를 여실히 보이는 것이 바로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 때에 처신. 임오군란을 제대로 나서지도, 수습하지 못해서 일을 너무 크게 벌려버렸고,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려고 외국 개입을 일으키는 오판을 했다는 점에서 사태를 분명히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재위 시기가 차라리 세도정치 시기였거나 단명했더라면 크게 문제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2. 생애



3. 평가


아주 무능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격동의 시대를 헤쳐나가기에는 한없이 부족했다.
먼저 간략히 요약하자면, 그는 아주 무능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유능하지도 않았고, 약하지도 않았지만 강하지도 않았으며, 정치감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뛰어나지는 못하였으며, 일의 핵심에 있으면서도 핵심이 어디인지 혼동하였으며, 둔하지도 않았지만 민첩하지도 않았고, 인사를 알고 있음에도 인사를 몰랐으며, 자신의 시대가 근대라는 것을 알았지만 전근대적으로 행동했다.적절하다
결과적으로 수십 년 고종 재위기에 조선왕조가 사실상 망했으므로 평균 이상의 명군이라고 보는 시각은 거의 없으며, 이태진 교수 류의 근대화에 힘을 썼다는 것과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등을 호평하여 나름대로 할 만큼은 했다는 우호적인 평가 vs. 암울한 한국근현대사를 개막한 총 책임자에 해당하는 구제불능암군 또는 처음에는 신하들에게 벼슬을 팔다가 나중에는 일본에 나라까지 팔았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다.
비판 측의 요지는 고종 제위기에 외척인 민씨 일파의 부패를 사실상 방조 및 조장한 점,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는 유약함과 우유부단함, 내부의 민란인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군인 청나라 군대를 불러 결정적으로 나라의 주권을 외국에 넘겨줄 계기를 제공한 점[19]과 지나칠 정도로 권력에 집착하여 독립협회를 무너뜨리고 만민공동회를 탄압해버린 일 등을 꼽는다. 그리고 정작 제대로된 재정충원조차 이뤄지지 않은채로 양무호등 외국산 무기를 산다거나[20] 등의 이유로 무분별하게 돈을 썼고, 그러면서 재정운영 관리는 엉망으로 해 일본이 억지로 차관을 도입시켜 거액의 빚을 지게했을 때도 제대로 갚지 못하여 국채보상운동까지 일어났다. 게다가 근대적 개혁이라고 실시한 광무개혁조차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점들은 고종과 그의 측근 즉 대한제국 지도부가 근대적인 제도와 문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21] 문제는 굳이 근대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그 이전에 운요호 사건이나 임오군란 등을 보면 소수의 구식군대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 했다. 이후 고종이 나름대로 박문국, 전환국, 기기창을 설치했고 경복궁에 전구를 부설했으나 근대무기 제작에 실패하면서, 더 나아가 제대로된 근대국가 설립에 실패하면서 일본 식민지의 그림자로 다가서게 된다. 이런 와중에 커피자동차 등의 자기 취미에 심취해 있어서, 송휘종이나 명 4대 암군들처럼 자기 취미에 너무 깊이 빠져 나라를 말아먹은 것 아니냐는 의혹도 존재한다.

3.1. 상세



3.1.1. 권력 집착


고종은 유독 권력에 집착하였는데,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영향력이 있었다는 추측이 많다. 대원군은 고종이 성년이 되었음에도 섭정을 계속하였는데, 고종이 민씨 일가와 힘을 합쳐 고생끝에 친정을 할 수 있었다. 이후 친정이후에도 대원군이 별도의 쿠데타, 임오군란,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등으로 정치노선을 전혀 가리지 않고 다른 세력과 결탁하여 왕권을 위협하였고, 고종이 이를 방어하다보니 정권에 관한 집착이 심해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한제국 선포후에도 독립협회와 개화파 등과 친교를 유지하다가,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며 자신과 의견이 맞지않자 개화파와 갈등을 빚다가 독립협회를 탄압하고 만민공동회를 해산시켰다.
물론 선진국인 유럽에도 전제군주국이 많았고, 애초에 고종은 전제군주국의 왕으로 즉위했던 인물이므로 그가 단순히 전제군주였다는 점이 비난 받을 거리는 아니다. 더불어 개화파와 갈등을 빚었던 것도, 애초에 현실성이 떨어지는 집단이었던건 둘째치고 급진개화파의 경우에는 갑신정변이나 기타 무리한 행동으로 지지기반인 백성들로부터 지지도 상실했고 독립협회도 고종이 탄압하기전부터 내부모순으로 몰락했었다는 점 등 단순히 그들과 갈등을 빚었다고 일방적으로 고종만 비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개화파가 현실에 어둡다고는 해도, 고종이 온건개화파 이후로 국내의 지식인들로부터 어떠한 지지도 얻지 못하였고, 심지어 광무개혁을 통해 자기가 육성한 인재들 조차 친일이나 친미로 반정부활동으로 돌아서는 등 자신의 지지기반을 제대로 육성하는 것조차 버거워했으며, 그나마 만든 충직한 측근 조차 이용익이나 홍종우같이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 뿐이었다. 그리하여 고종은 단순히 특정 지식인 계층과의 갈등을 떠나서 거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한마음으로 외면 받았고, 그렇게 실력을 인정받지 못한 상태로 권력에만 집착하는 모습만 보여주었다. 뒤에서 말하겠지만 고종은 실적이나 실력은 형편없는 주제에 욕심만 많았던 것이기에 이러한 점에서 고종의 정권집착이나 독재가 비판받는 편이다.

3.1.2. 재정 운영


우선 고종은 명성황후처럼 직접 매관매직을 주도했는데 대한제국 선포 이후 그 정도는 더 심해졌다.[22] 고종은 이렇게 매관매직을 하거나, 원납전을 거두거나 등의 방법으로 개인비자금인 내탕금을 형성하였다. 문제는 이렇게 마련된 황제의 개인비자금이 본래 자금을 관리하는 탁지부의 예산보다 훨씬 비대해졌지만, 정작 정상적인 방법으로 재정을 마련하는 징세제도는 광무개혁을 실시하였음에도 전혀 정비되지 않아 세수는 늘 부족하였다. 게다가 매관매직으로 관직을 산 지방관리나 수령, 이서배등이 백성등을 착취하여 개인재산을 축적하였지만 정부에 납부해야될 세수를 중간에서 횡령하면서 재정부족에도 일조하였다.
문제는 그나마 이렇게라도 모은 돈을 제대로 썼냐하면, 그것도 아니라서 정작 가장 많은 예산을 퍼부은 군사비용은 대한제국군 항목의 해군 파트에서 볼 수 있듯이 중고 석탄 화물선을 군함이랍시고 원가보다 더 비싼값에 사는 등 잘못사용하거나 사실상 사기를 당하며 허망하게 낭비하는 것이 많았다.
그나마 최근에는 이태진에 의해 고종의 비자금이 당시 독립운동 및 반외세운동을 하던 이들 특히 을미의병과 을사의병에서 활약한 최익현, 이인영, 민종식, 정환직, 허위, 신돌석 등이 고종의 밀지나 자금지원 등을 받았다는 것이 밝혀졌고, 고종 사망이후까지 이어져서 국내외 대일본투쟁에는 직간접적으로 고종과 연관이 있었다고 하지만[23], 고종이 이렇게 항일의병들에게 밀지를 보내며 비자금을 내주게 된 계기가, 결국은 독자적이 군사력을 양성할 기회와 부족하지만 어느정도의 예산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다 말아먹었기 때문이므로, 모양새가 마치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 여전히 비판의 여지가 많다.
그 밖에 조약으로 광산 개발권이나 삼림 채굴권 등을 외국에 내주던 상황 역시 당시 구한말 조선과 대한제국의 궁핍한 상황과 고종과 왕실의 부실한 협상능력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부분이다. 특히 그중 두드러지는 것이 운산금광인데, 당시 미국의 일개 개발사에서 금광채굴을 위해 지불한 돈이 미화로 500만 달러였는데, 이 금액은 대한제국의 1년 평균 세입보다 큰 금액이었다. 채굴권 이양계약은 25년 만기에 수익의 1/4, 25%를 왕실인 궁내부가 갖는 조건이었지만링크, 사측의 초기투자비가 너무 많아 초기 7년간은 수익배당이 전혀 이뤄지지 않을 정도였다. 더욱이 수익배당이 이뤄진 1904년의 이듬해인 1905년에는 러일전쟁이 발발하는데, 궁내부에서는 러시아와 일본간의 갈등이 고조되자 전쟁을 염려하여 수익배당조차 못받고 1899년에 소유한 운산금광의 채권을 10만 달러에 매각했다.[24]

3.1.3. 외교와 내정


대원군을 하야시키고 고종이 친권을 잡은 이후 나라에 큰 반란이 2번 일어나는데 하나가 임오군란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동학농민운동이다.
임오군란은 고종이 친정을 하면서 세력을 결탁한 명성황후의 친척인 민씨 척족, 즉 민씨 외척이 장악한 선혜청이 구식군인들의 급여를 횡령하여 군인들의 급여가 13개월이나 밀린 것과 신식군인과 비교하여 구식군인에 대한 차별대우에 불만이 쌓여 폭발한 것이었다. 애초에 친정을 위해 민씨척족을 키워주다보니 이들이 비리와 부정부패를 저질러 고종에게도 책임이 있거니와, 임오군란 이전에 구식군인들이 창고지기를 폭행한 이후에도 그저 잘 타이르라고만 했을 뿐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않다가 이게 반란으로 번지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정확하게 임오군란으로부터 1년 전 고종이 무얼 했냐면, 1881년 신사년에 민태호의 딸이자 황태자비인 순명효황후 민씨과 순종의 가례를 위한 혼수품으로 대량의 비단을 일본회사로부터 구입하였다.링크 [25]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의 급여는 그전부터 체불되었는데 아들 혼수품 장만에는 거액의 돈을 들인 것이다.
어찌됐던 임오군란은 나중에 친정으로 몰아냈던 대원군을 복권시키고서야 겨우 진정했지만, 반란의 결과로 많은 일본인들이 죽어 일본측에서도 책임을 요구하며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였고, 나라를 지켜야할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덕택에 외국군인 청나라를 통해 진압을 하려한 결과 청의 영향력을 증대시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으로부터 이중으로 외압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임오군란을 기점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이를 계기로 갑신정변이나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이 일어나 국내는 쑥대밭이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후에 일어나는 동학농민운동은, 그 발생원인이 고종 친정이후부터 매관매직등이 성행했기 때문이었다. 민씨척족도 매관매직을 일삼았고, 고종도 이것을 통해 개인비자금인 내탕금을 마련하기도 했는데, 문제는 매관매직으로 관직을 산 관리들이 중간횡령을 일삼아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게다가 고종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외국군인 청군을 들여와서 진압하려 들었는데, 앞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청군의 개입은 자연히 일본군의 개입도 불러오게 되었다. 동학농민운동 진압과정에서 일본군의 학살을 조선관군이 아예 직접적으로 지원해주었는데, 결론적으로 왕이 자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을 동원해 학살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후속조치는 더욱 형편없는데, 동학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인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은 사태가 종식된 후 1년간 유배형을 가나 곧 고종이 직접 사면하여 법무민사국장에 이어 고등재판소 판사까지 승승장구하였다. 고등재판소 판사가 된 조병갑은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이자 2대교주였던 최시형에 직접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하기까지 한다. 아무리 동학군이 당시로서는 반군이라지만 탐관오리에게까지 이런 처우를 한 것은 유교적 왕도정치관점에서나 현대적인 관점에서나 옹호받을 여지가 거의 없다. 고종의 이런 용인술은 역시 같은 탐관오리인 조병식을 후에 황국협회에 가담하게 하여 신나게 민권운동을 탄압하는데 이용했다는 예에서, 그리고 역사적 평가가 갈리는 홍종우의 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요컨대 고종은 전제군주적인 권력을 위해서라면 민생을 도탄에 빠트린 탐관오리건 누구건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밖에 고종은 천연자원 채굴권 등의 이권을 통해서 외교관들을 매수하려고 하였다. 여기서 성공적 매수가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였고, 실패한 것이 미국공사 호러스 뉴턴 알렌이다. 이는 사실 시기적으로도 연결고리가 있는데, 베베르는 러일전쟁 전까지 주 활약시기였던 러시아 공사였고 정치적으로 영향력도 상당했기 때문에 효과가 아주 컸다. 반면에 알렌은 러일전쟁 패전 이후까지 남아 있었고, 실력에 비해서 욕심만 컸기 때문에 고종이 더 이상 이권을 제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바로 등을 돌리고 배신해버렸다.
만일 러일전쟁이 벌어지지 않았거나,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고, 이를 미국이 승인하는 형태로 결론이 나왔다면, 고종의 매수외교가 어느정도 효과를 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뤼순을 점령하는 등의 러시아의 강경화와 무엇보다 러일전쟁에서의 일본 승리로 이런 외교적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게다가 러시아는 남하정책을 피며 영향력 확대를 꾀했는데, 반대로 조선이 러시아의 괴뢰국이나 식민지 혹은 병합이 되는 상황도 초래할 수 있었고, 일본, 미국, 영국 그외 각국이 힘을 합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상황에서 홀로 러시아와 친교를 도모했다는 점에서 단지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자칫 늑대를 몰아내려고 호랑이를 불러오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었다.
청과 러시아가 모두 사라지고 남은 외세가 일본 뿐인 상황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실시하여 개혁정책을 실시하지만 계획부터 실천까지 전부 형편없는 실패작으로 끝이 나게 되었고 오히려 악평만 더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또 한 천연자원 채굴권과 철도 부설권등을 독일,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외세에 팔아 어떻게든 힘의 균형을 유지하여 중립국이 되려 했으나 당시 조선은 그들을 축출해낼 힘이 없었다. 나당전쟁을 통해 외세를 능동적으로 사용하고 축출시킨 신라와 대비되는 점이다. [26]

3.1.4. 반일


고종이 확실하게 고평가를 받을 만한 점은, 일본에게 끝까지 저항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군 앞에서 벌벌 떨면서도, 뒤로는 일본 엿 먹일 궁리를 했고,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 면전에서 그 점을 비꼬기도 했다. 일본이 뭐 자기네 힘 과시하려고 고종 끌어내린 게 아니다. 고종이 일본의 계획에 실질적으로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끌어내린 것이다. 고종이 정말 일본에 저항할 의지도 없었다면 일본이 굳이 고종한테 순종에게 양위를 강요할 이유가 없었다. 그와 반대로 고종을 비판했던 수많은 국내의 지식인들과 명사들 중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는 일제에 굴복해서 변절의 길을 걸었다. 거의가 개화파를 잇는 인사들이었는데, 이들에게 일본이란 물리쳐야 할 대상이면서 근대화의 교사라는 양면성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의 저항은 주로 아관파천, 의병 궐기 권유 같은 꼼수나 헤이그 특사, 이권 배분 같은 외교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식으로나마 저항했다지만, 일본의 개입이 커지게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보다 자기자신한테 있었다. 친권을 잡아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를 방조 및 이용하면서 내정을 파탄냈고, 파탄된 내정의 결과 2차례의 민란이 일어나 외세를 통해 진압하려 들었으며, 외세를 개입시킨 결과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진 것이다. 비록 여러가지 수단으로 저항을 하다보니 일제의 조선병합이 그리 수월하지는 않았지만, 결과는 고종이 죽은 이후 대부분의 항일독립운동 단체들은 군주정(유교적인 전제군주정이든 근대적인 입헌군주정이든)을 폐지 및 부정하였다. 어디까지나 끝까지 저항했다는 그 자체에 의미부여를 했을 뿐이지, 애초에 원인을 본인이 제공한 것인데다 저항조차 전혀 유효하지 못한, 부실한 방식이었으므로, 국가원수로서 까방권은 못된다.

4. 개인사



보통의 조선 사람들이 기피하였던 사진 찍기를 거리낌 없이 즐겼다. 초기의 사진기의 특성인 무지막지한 대기시간도 조금의 불평 없이 잘 넘어갔다고 한다.[27]
또 낮에는 일을 하지 않고, 저녁 때부터 일을 해서 밤을 새, 아침이 되서야 잠이 드는 올빼미족이었다고 한다.
머리는 명석했던지, 당시 선교사나 외교 사절들은 그의 교양이나 지식에 감탄했다는 기록이 있다.(키는 작지만 너그러운 얼굴에 상냥하고 이야기가 잘 통했다 한다. 반면에 뒤에 자주 서 있던 순종은 키는 크지만 어리버리하게 생겼다고 좀 까고 있다.) 직접 상대국인 일본의 평에서는 면전에서는 유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반항을 계속한 인물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많다. 이토 히로부미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고종을 찾아가 "한 건 하셨더군요, 폐하. 그런데 앞으로 대일본 제국에게 맞서려면 좀 더 공공연하게 하시는 게 어떨까요?"라고 조롱하였다. 실제로 고종의 대일본 전략이기도 했다. 그러나 단지 그것은 개인적일 뿐, 이미 망해가는 나라를 붙잡기에는 그의 역량도, 뒤를 받쳐줄 만한 힘도 너무 부족했다.[28] 그리고 그 결과는 조선의 멸망이었다.

오른쪽 여자가 고종이 총애한 귀비 엄씨. 귀비 엄씨와 그녀의 친정은 교육사업에도 관심이 많아 양정학교,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를 창립했다.[29] 왼쪽의 제복을 입고 있는 소년은 귀비 엄씨 소생 왕자인 영친왕.
야사인 매천야록에는 고종이 을미사변 이후 5일 만에 엄귀비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물론 야사이니 신빙성은 떨어진다.[30] [31]
그 외에도 명성황후 민씨의 사치가 심한 것을 알았을 텐데도 정작 이를 통제하려 한다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커피니 양식이니 자동차니 하는 것에 취미를 붙여 돈을 썼다고도 한다.
게다가 선교사들이나 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점이 있으니, 죽음을 매우 두려워하는 인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을사조약을 체결할 때라든가 일본군경복궁에 난입할 때라든가 강하게 나서야 할 시점에 초반부에는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면서 저항하다가도 사태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하면 두손두발 다 들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고종이 유일하게 끝까지 격렬하게 저항한 건 퇴위당할 때뿐이었다.
자동차에도 취미가 있었는데, 고종은 캐딜락을 타고 다녔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 일제강점기손병희가 캐딜락을 구입했는데, 자신의 차가 고종의 캐딜락보다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임금의 자동차보다 좋은 것을 탈 수는 없다면서 고종과 캐딜락을 서로 바꾸어 탔다는 이야기가 있다 .
고종 어차용으로 수입한 다임러 리무진은 나중에 순종황제가 탔으며 순종황제가 타던 캐딜락은 순정효황후가 탔다. 이들 어차는 각각 등록문화재 318, 319호로 등록돼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고종 어차용으로 수입한 다임러 리무진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1995년 문화재관리국은 80여 년간 방치돼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던 어차를 꺼내 ‘복원’하려 했다. 당시 영국 재규어 다임러에서 고종 어차를 복원하기 위해 전문가가 파견됐다. 고종 어차를 본 전문가는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일부 녹만 슬었을 뿐 차의 상태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기 때문이다. 부품 손상도 없었다. 당시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전영선 소장은 “복원이라고 하기보다 보수라는 개념으로 보는 게 맞는다”고 말했다.
재규어 다임러에서 파견된 전문가는 “같은 종류의 차가 영국의 한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면서 “전 세계에 딱 1대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여기 또 있다니 놀랐다”며 값은 얼마든지 줄 테니 본인들이 보수할 수 있게끔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에서 보수해 창덕궁을 거쳐 현재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어린 시절부터 글씨나 문장에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14세 때 의정부 청사가 중건되면 편액을 자신이 직접 쓰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고 고종 7년에 오례편고가 완성되자 자신이 직접 서문을 쓰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고종의 어필은 많이 남아 있다. 아버지가 추사 김정희에게 글씨와 그림을 배운 예술가이기도 했었으니 그런 아버지에게 글씨를 배운 자신감도 있었던 모양.
커피와 함께 냉면, 군밤 등을 즐겼다고 한다. 특히 군밤은 후술할 떡밥과도 관련 될 정도로 매우 즐겼다고 한다. 고종이 좋아했던 냉면을 만드는 방법
한국에서 에스페란토를 공부한 최초의 군주로 알려져 있다. 궁중의사의 권유로 간단한 에스페란토를 배웠다고 한다.
경복궁 깊숙한 곳에 있었던 고종의 서재인 집옥재(集玉齋)가 2016년 민간에게 개방되었는데 도서관과 찻집 형태로 개조되어 친근하게 변했다. 보유 서적은 4만권.
최근 창덕궁에서 와플 틀이 발굴되어 와플 매니아임을 인증했다(....) 여봐라. 짐이 와플을 먹고 싶으니 가배와 함께 가져오너라!! 이와 동시에 카스테라 틀도 발견되어, 와플과 카스테라를 곁들여 우아한 커피 타임을 즐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거 참 고상하시네
이를 보면 조선의 왕 중에선 개인 취미기록이 제법 많은 왕이라 할 수 있다.

4.1. 고종과 군밤떡밥


특이하게도 고종은 군밤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았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버전에서는 군밤이 호떡으로 변한 버전도 있다.
  •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는데, 왕위에 오르자마자 군밤장수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죄목은 '공짜로 군밤을 주지 않은 것' 물론 이 군밤장수는 신하들의 반대로 사형은 면했다. 매천야록에 실린 야담(野談)이므로 승정원일기의 기록과는 많이 다르다. 바로 아래 문단 참조.#[32] 사실 고종의 서장자인 완친왕(완화군)이 군밤을 좋아했다는 일화가 있기 때문에 아들의 이야기가 잘못 와전되어서 나온 카더라일지도 모른다.아니면 부전자전이든지 현재로서는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모호해서 사건의 진실여부를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고종에게 군밤 관련 이미지는 계속 따라다니게 될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빵 사건??
  • 위에서 나온 군밤이야기에서 일부 진실부분이 있다면 실제로 고종이 즉위 초기부터 최소 즉위 중반기까지는 을 좋아했던 건 사실로 여겨진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다른 왕 시절 기록보다 유독 고종시절의 기록에 밤에 대한 진상기록이 많았기 때문이다.[33] 다만 나중엔 커피로 갈아탔다 이 진상기록에서 밤의 진상이 늦는 경우 유독 관찰사[34]들이 대죄를 자주 청했는데 매번 봐준 걸 보면 꽤 인자한 성격이었을지도 모른다. 인자는 무슨 간식 안보낸다고 벌할 정도의 식탐이면 군주 이전에 인간실격이지 머리가 완전히 빈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생각해 보면 저런 군밤장수 사형 요구 루머가 공공연히 돌아다닐 정도인데, 고작 밤 따위로 죄를 족족 물었다면 민심이 엄청나게 흉흉해졌을 것이고 고종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인 완친왕이 군밤을 좋아했다는 일화가 있는 걸 보면 완친왕의 이야기가 고종의 이야기로 잘못 알려지고 왜곡된 것일지도.
  • 경술국치 이후에는 순종창덕궁 후원에서 주운 밤[35]을 손수 구워다가 고종에게 자주 바쳤으며, 고종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순종이 구워 온 밤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고종이 군밤을 좋아했던 건 어느 정도 사실인 듯 싶다.

4.2. 미국인 황후 에밀리 브라운 떡밥


해당 항목으로.

4.3. 숨겨진 딸 이문용 떡밥


해당 항목으로.

5. 가족관계


대한제국/가족관계 문서 참조.

6. 어진과 사진


근대의 황제답게 어진사진이 많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다.


촬영 시기 미상, 황제 일가 사진
1918년 영친왕 귀국을 기념해 덕수궁 석조전에서 촬영한 사진
왼쪽의 황제 일가 사진은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황제, 덕혜옹주, 영친왕,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윤씨, 의친왕의 정실 덕인당 김비,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단, 이 사진은 후대에 조작 및 합성되었다는 의견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촬영 시기가 불확실한데다가 인물의 비율과 광원의 위치가 어색해 사실상 조작 및 합성이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기사 참고[36]) 오른쪽의 황제 일가 사진은 1918년 영친왕의 일시 귀국을 기념해 덕수궁 석조전에서 촬영한 것으로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황제,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윤씨, 덕혜옹주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진을 보면 황실 가족이 단독 사진이 아니라 여러 황족과 함께 사진을 찍을 때는 오른쪽 사진과 같이 서열이 제일 높은 사람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유사한 서열을 갖는 사람을 배치하며 각각의 인물들 또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오른쪽 사진과 같은 서열 배치 및 거리 차이를 감안한다면 왼쪽 사진은 원래 의친왕, 순종황제,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윤씨, 의친왕비 김씨만 찍힌 사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군복 차림의 고종
군복 차림의 고종
정장 차림의 고종
 


곤룡포를 입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왼쪽 흑백 사진을 컬러화한 것이 오른쪽 사진이다[37].




석지 채용신의 고종 어진
작자 미상의 원유관 강사포본 고종 어진[38]

전신 어진
 

1919년 승하한 해의 고종. 장소는 덕수궁. 이 때 당시는 이태왕.
 

한국인이 찍은 가장 오래된 고종황제 초상 사진이 발견되었다. 미국 뉴어크 박물관에 소장된 사진으로 근대 서화가이자 사진작가인 해강 김규진이 촬영했으며, 촬영한 해는 1905년이고 촬영장소는 덕수궁 중명전이다. 고종이 외교사절로 방문한 미국인 사업가 에드워드 해리먼에게 선물로 준 것으로 보인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보도자료

7. 현대 매체에서의 고종


조선이 근대화되는 시점의 군주였고 재위기간도 길었기 때문에 사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왕 중 한 명. 그런데 정작 고종 시대를 다룬 사극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이나 부인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사극들이 많아서 고종 본인은 주역에서 한 발짝 벗어난 모습으로 등장하곤 한다. 자신의 치세가 사극에서 자주 다뤄지나 정작 본인이 사극의 주역이 된 적은 없다는 점에서는 사극 속 취급은 어쩐지 조선 중종과 비슷하다.
고종은 즉위 전에 익성군(翼成君)에 봉해지긴 했으나 아주 잠깐 동안 봉해졌다가 바로 즉위하였고, 따라서 특별한 벼슬이나 군호를 받지 못 했기 때문에 즉위 전 어린 시절의 고종이 등장하는 매체에서는 대부분 아명인 이명복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사극에서는 주로 아버지와 부인 등쌀에 기를 못 펴는 우유부단한 군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마냥 무능하다기보다는 동정적인 시선으로 묘사되곤 한다. 실제 고종에 대한 평가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사극 속에서는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 했는데 시대가 따라주지 않았다(운이 없었다)'는 식의 평가에 맞춰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 명성황후가 대표적인 예.
대체역사소설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왕인데 이런 소설들에서도 아들 순종처럼 30%는 훌륭한 군주로 나머지 70%는 개 찌질이 왕고집 무능한 군주로 묘사되고 있다.
영화 한반도에서는 김상중이 분했다. 일본의 직접적인 침략을 대비해서 가짜 국새를 만들어놓고, 진짜 국새는 내관에게 맡겨서 봉인시켰다. 특히, 신하들이 일본 해군 간부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일본을 건드리면 큰일나니 청나라 야만족을 몰아내려면 일본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고종을 설득하는 장면에 명대사가 등장한다.[39]하지만 영화가 똥망이다

내 나라에 들어온 외세를 물리치는 것도 일본이 하고, 스스로를 지키는 것도 일본이 한다면 이 땅이 누구 것이며 누가 주인이란 말인가.'''

'''일본의 힘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수 없다는 그대들은!! 대체 어느 나라의 신하이며 지금 누구를 섬기고 있다는 말이냐!!

드라마 닥터 진에서는 아버지인 이하응과 함께 아명인 이명복으로 등장한다. 물론 본격적인 군왕의 모습은 아니고, 어린 시절의 모습만이 그려진다. 어린 시절의 모습이라 그런지 비교적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영특하게 덕치론을 설파하는 장면과 좌의정 김병희의 천주교 박해 주장을 "내 어머니도 천주교도라 박해를 하면 불효다"라고 일갈하며 반박하는 장면이 눈에 띈다.
야스히코 요시카즈왕도의 개에서는 위안스카이의 위협에 벌벌 떨면서 아무 것도 못 하는 무능하고 한심한 인물로 나온다.[40]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나름대로 머리도 좋았고 재위기간이 길어지면서 노회한 면모도 보였으며, 개화에 대한 생각은 있었던 인물로 묘사하면서도 깔 부분은 제대로 깐다. 가령 전제적인 전제권(황제권) 강화에만 집착하는 면모도 묘사하고 있고 민씨 일족의 전횡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을 비판했으며, 무엇보다 우유부단하고 황제에서 퇴위되기 직전 말고는 전혀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군주로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 권 말미에는 망국 이후의 고종의 후일담을 짤막하게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고종에 대한 총평을 볼 수 있다.
2016년에 개봉한 영화 덕혜옹주에서는 백윤식이 연기했고, 늦둥이 고명딸인 덕혜옹주를 아끼는 딸바보 아버지의 모습과 함께 감언이설을 늘어놓는 친일파 이완용, 한택수에게 일갈하는 모습이 나온다.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하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일제의 음모에 걸려 독이 든 수정과를 먹고 죽는다.[41]

7.1. 각 매체의 고종


영화
드라마
뮤지컬
게임
  • HOI4 : 게임 시점이 고종 사후인 2차 대전 배경이니 당연히 고종이 나오는 건 아니고, 중국계 국가로 플레이 시 새로운 장군을 고용하면 나오는 랜덤한 포트레잇 중 하나로 위의 군복 차림의 고종과 똑같이 생긴 포트레잇이 나온다. 고종이 어째서 중국 장군으로 나오는지에 대해서는 아마도 군복 입은 동양인 사진을 구글링 해서 나온 고종의 사진이 그럴싸해서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트레이싱해서 중국 랜덤 장군으로 넣었다는 설명이 그럴싸하다. 물론 대한제국이나 조선을 플레이 가능하게 만든 모드에서는, 다른 당대 인물들과 함께 정식으로 구현되어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유저패치인 모드 기준.

8. 관련 항목



[1] 꽤 심상하게 받아들이는 묘호지만 이왕직에서 올린 묘호 망단자 고종(高宗), 신종(神宗), 경종(敬宗) 중에서 순종이 수망(首望)인 고종을 사왕(嗣王)의 자격으로 승인한 것이다.[2] 약칭 고종태황제. 광무제가 아니다. 남양주시 주민이라면 홍유릉에서 간혹가다 고종태황제라는 명칭을 발견할 수 있는데, 홍유릉 권역에 고종의 후손인 의친왕, 덕혜옹주 등의 묘가 있기에 추모제향 때 현수막을 걸기 때문이다.[3] 조선왕조가 개창된 1392년을 원년으로 하는 개국연호는 엄밀히 말해 고종의 연호라기 보다는 기년법의 일종이다. 흔히 1894년(개국 503년) 갑오개혁 때부터 처음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갑오개혁 때의 조치는 '국내외 모든 공문서·사문서에 개국 기년을 사용토록' 한 것이며, 실제로는 1876년(개국 485년) 강화도 조약 이후로 청나라를 제외한 외국과의 조약에는 개국 기년을 사용해 왔다. 1896년 건양 연호 사용 이후에도 칙령 등에서 개국 기년이 혼용된 예가 있다.[4] 1896년(건양 원년) 1월 1일부터 1897년(건양 2년) 8월 16일까지 사용.[5] 1897년(광무 원년) 8월 17일부터 1907년(광무 11년) 8월 11일까지 사용.[6] 아명. 어릴 때 이름. 자식의 아명을 천하게 지어 불러 액운을 막고 장수하길 바라는 전통으로 비롯한다. 그 누구가 아니다.[7] 첫번째 휘(諱)라는 뜻으로 휘라는 뜻은 왕이 되었을때 쓰는 이름이다.[8] 왕이 되면서 임시로 개명한 초휘(初諱)[7]다. '일단' 고종의 본가인 인평대군 8대손 '재(載)' 자 항렬에 맞춰 지었으며 오래 사용하진 않았다.[9] '희', '형' 두 개의 독음이 알려져 있으나 '형'이 맞다.[10] 문조에게 입양 됨에따라 자연스레 헌종과 형제가 되고 헌종의 이름 '환(烉)'의 '火' 를 따라 '형(㷩)'으로 지었다. 그리고 나중에 고종의 친 형 이재면 역시 여기에 맞춰 '희(喜 + 火)'로 개명했다.[11] 경술국치 이후 이태왕 시절의 이름.[12] 국왕 즉위일로부터 정확히 55년 만에 승하.[13] 순종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한제국의 황제였지, 조선의 왕은 아니었다.[14] 아들을 잃은 슬픔[15] 아내를 잃은 슬픔[16] 나라를 잃은 슬픔[17] 실정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동시대 니콜라이 2세 정도를 제외하면 가장 험난한 꼴을 당한 군주였다. 선통제와는 막상막하?[18] 일제강점기 때는 고위 귀족 대우는 받으며 구왕족들은 충분히 잘 먹고 잘 살았다. 삶이 안습해진 건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대 이후. 그리고 그런 왕족들을 싫어한 것이 전주 이씨인 이승만이라는 것도 참으로 아이러니하다.[19] 결과적으로 이 사건이 청일전쟁으로 발전해 위태위태한 동북아의 균형이 무너졌다.[20] 보급을 원활하게 하려면 무기의 규격과 탄약의 종류가 통일되어야 하는데 독일제 쪼금, 프랑스제 쪼금, 러시아제 쪼금, 일본제 쪼금 이런 식으로 무기를 구입하여 대한제국군이 해산될 때까지 병사들이 서로 사용하는 총이 달라 탄약 보급과 무기수선에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광무개혁항목에도 나오지만 양무호는 일본이 영국으로부터 산 중고 석탄화물선인데 이것을 더욱 비싼 값에 일본으로부터 사들여와 사실상 사기까지 당한 일도 있었다. [21] 나름 조사시찰단 보내서 근대관제를 조사시켰고 고종에 서재인 집옥재에는 각종 근대지식의 관련된 책자가 보관되어있었다. 화학개론서인 화학감원, 전기에 관한 내용인 전학도설, 석탄,철강에 관련된 개매요법, <역람기략> 경재학 서적인 부국책까지 있었다. 출처 <규강각 세계지식을 품다. 조선에 들어온 서양 근대지식>[22] 매천야록에 따르면 관찰사의 경우 10만~20만 냥, 일등 수령이면 최소 5만 냥 선으로 벼슬의 구체적인 값까지 제시되어 있었다.[23] 의병들에게는 전근대적일지언정 '국왕'이라는 매력적인 명분이 주어지고, 무엇보다 실제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고종의 비자금만한 자금줄이 없었기 때문이다.[24] 운산 금광의 총 수입은 5600만 달러로 정확하게 캐낸 금의 교환가가 그렇다는 것이고,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벌어들인 순이익은 1500만 달러, 연평균 50만 달러 정도였다. 물론 시기별로 채굴량이나 수익률은 편차가 있었다. 이 운산금광은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8년에 일본에 매각되었다.[25] 「고궁문화」, 국립고궁박물관, p. 27. "황태자비 민씨는 여은부원군(驪恩府院君) 충문공(忠文公) 민태호(閔台鎬)의 딸이며 임오년(1882) 왕세자 순종과 가례를 올렸다. 모후인 민비가 생존 시에 거행된 대혼(大婚)으로서 고종은 신사년(1881)에 가례에 필요한 혼수직물을 동경 직물회사에 주문하였던 기록이 확인된다74). 상기한 바와 같이 당시의 가례는 임오년 『嘉禮都監儀軌』와 상당한 수량의 의대기록이 있는 <궁중발기>로 남아있다."[26] 출처 ebs 다큐프라임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 제5부 - 고종, 열강의 덫에 빠지다 [27] 많은 조선 사람들은 인물사진의 주인공은 1년 내에 죽고 풍경사진의 나무는 얼마 안 가 시들고 찍힌 성벽은 얼마 안 가 허물어진다는 미신을 믿었기 때문에 사진기만 들이댔다 하면 두려워하며 도망가곤 했다. 물론 1800년대 후반 이야기이긴 한데 조선 말고도 당시 대다수 아시아나 아프리카 멀리 중남미, 심지어 유럽 일부에서도 흔했던 일이다.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흡수한다는 미신은 워낙에 흔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개방되었다던 일본에서도 사진 찍다가 불길하다며 돌팔매질당한 이들의 기록이 20세기 초반까지도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이런 인식을 가진 이들이 세계 곳곳에 있으니 무턱대고 사진 찍지 말라는 여행가들 충고가 많다.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다고….[28] 만약 망하지 않았다 해도 태국처럼 막후에서 지배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 당대 서구 열강 지도자들의 성향상 되든 안 되든 무장투쟁을 벌이는 게 외교전에서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29] 현재도 엄씨 집안에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고.[30] 그리고 그 당시 왕비와 함께 고위급 상궁들이 죽어 내명부를 조율할 여인이 없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세자빈 민씨(순명효황후)가 있긴 했으나 을미사변의 충격과 시어머니 명성황후 민씨의 갈굼으로 인해 세력이 없다시피 했고,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명성황후의 투기로 다른 후궁도 없던 상황이었다. 또한 그때까지만 해도 명성황후의 죽음이 공인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31] 한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저자 박시백 등은 자신의 저서에서 "임오군란 때처럼 고종이 명성황후가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32] 맹꽁이 서당에서 나온 고종과 군밤장수 이야기의 출처가 여기다. " class="wiki-link-external" target="_blank">고종이 상당히 찌질하게 묘사되어 있다. 다만 당시 고종 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일부러 기록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세도정치기를 지나면서 이쪽도 기록의 왜곡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가던 시기였다. 게다가 애시당초 승정원일기는 시행된 왕명을 기록한 사료이기 때문에 시행되지 않은 왕명인 군밤장수 어명 기록이 당연히 승정원일기에 기록될 리가 없다. 단, 고종 실록에 대해서는 좀 의문인 게, 고종 실록은 고종이 죽고 난 다음에 일본총독부가 실질적으로 작성했다. 이전에 고종 실록을 조선왕조실록으로 이어놨었는데, 고종 실록과 순종실록은 조선왕조실록에 포함되지 않는다.[33] 정확히는 황율(黃栗).[34] 대부분 경상도 관찰사[35] 창덕궁 후원의 언덕을 동산(東山)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밤나무가 많아서 가을에는 산책 중에 길에 떨어진 밤을 주울 수 있다고 한다.[36] 딱 봐도 의친왕영친왕의 모습은 빛과 그림자가 주변과 괴리가 큰 모습이다. 더불어 덕혜옹주의 출생 시기 및 영친왕의 일시 귀국 시점 등 시기적으로도 저 사진의 모습이 나타날 수 없다.[37] 이전 왕들의 어진들에 비해 다소 촌스러워 보이는데, 이는 흥선대원군의 복장 간소화 조치로 인해 곤룡포의 용보와 머리에 쓰는 익선관의 크기까지 대폭 축소되었기 때문이다.[38] 전통적인 어진과 달리 인물의 배경에 휘장을 드리운 것 때문에 일본의 화풍이 가미된 어진으로 추정된다. [39] 이 장면은 고종이 일본 간부들과 함께한 자리와 현재 시대의 대한민국 대통령과 일본 외상과 함께한 자리가 교차되어서 나온다.[40] 이 만화 자체는 제국주의 비판 만화다. 오해하지 말자. 오히려 명성황후가 여기선 고종 대신 조선을 움직이는 날카로운 인물로 나온다.[41] 상해임시정부3.1 운동의 결과로 세워지기 때문에 고종 생전에는 상해에 임시정부가 존재할 리가 없다. 고종이 망명시도를 한 흔적이 보이고, 망명을 준비해서 상해에 있는 독일 은행에 비자금을 마련했던 것은 호머 헐버트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그 대상이 상해임시정부가 되면 안 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서술한대로 대사로 직접 고종이 상하이로 망명할 생각이라고 김장한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