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 (r20180326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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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창이 그린 표준영정. 고려도경의 묘사를 재현한 듯하다.
시호
문열공(文烈公)
작위
낙랑국 개국후(樂浪國 開國候)
공신호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
본관
알수없음[1][2]

김(金)
이름
부식(富軾)

뇌천(雷川)

입지(立之)
아버지
김근
형제
김부필, 김부일, 김부의
생몰년
1075년 ~ 1151년
1. 개요
2. 일대기
2.1. 정치 입문 초창기
2.2. 묘청의 난을 진압하다.
2.3. 권력의 정점, 그리고 몰락
3. 논란 거리
3.1. 무신정변의 씨앗
3.2. 사대주의 대표?
4. 수많은 라이벌
4.1. 정지상
4.2. 묘청
4.3. 윤언이
5. 그 외




1. 개요


삼국사기를 쓴, 유교적 합리주의자

네이버 캐스트 인물 한국사 - 김부식

고려시대 중기의 문신. 주로 삼국사기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며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도 했다.
관직명이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개부의동삼사검교태사수태보문하시중판상서사겸이예부사현전태학사감수국사상주국(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事兼吏禮部事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3]으로 무척 길다.

2. 일대기



2.1. 정치 입문 초창기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고려에서도 손꼽히는 문벌귀족 집안. 당대의 권신 이자겸(李資謙)하고도 맞짱을 뜰 수 있던 유일한 인물이였다. 하지만 이자겸 집권 시기에는 라이벌이라기보다는 협조하는 편이었다. 이자겸이 금에 대한 사대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고구려 계승의식을 강조하던 서경파와 대립하였기 때문에, 송나라와 신라에 우호적인 김부식이 속한 동경[4]파와는 어느정도 협력한 것.
사실 명문이긴 했지만 개경의 중앙귀족에 비하면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었고, 부친이나 조부나 높은 직위에 있지는 않았다. 가문이 본격적으로 위력을 떨치기 시작한 건 김부식의 5형제 때부터인데, 장남은 윤관여진전쟁 당시 전선에서 활약했고, 나머지도 모두 과거에 급제해서 5형제의 어머니는 고려에서 큰 포상을 받았다.
이후 이자겸 및 문벌귀족에 대항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예종은 신진 측근세력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이 때 측근세력으로 등장한 대표적 인물이 한안인 등이었으나 이들은 이자겸에게 제거된다. 이후 인종도 측근 신진세력을 양성하는데 이 때 적극적이었던 인물인 김찬과 안보린 등은 모조리 이자겸과 척준경(拓俊京)에게 제거된다. 김부식은 이 시기 한 번 꿈틀한 적을 제외하면 조용히 이자겸 치하에서 승진을 거듭하는 등 이자겸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중 김부식의 형인 김부일(金富佾)이 인종과 척준경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참가하여 이후 이자겸이 몰락한 이후에 급성장하게 된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김부식이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것은 아니다. 이후 그리고 척준경을 제거하면서 정권의 중심을 장악한 정지상(鄭知常) 등의 서경파에 대항하여 기존의 문벌귀족을 대표하는 개경파 귀족으로서 김부식 일족이 급부상하게 된다.

2.2. 묘청의 난을 진압하다.


그리고 서경파를 중심으로 하는 서경 천도운동이 결국 개경파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로 돌아가자 서경파중에서 강경파였던 묘청조광, 유참 등과 함께 서경을 기반으로 대위국을 선포하고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른바 묘청의 난이다. 이 때 김부식은 개경파의 대표로서 묘청의 난을 제압하는 총대장에 임명 되는데, 일단 개경에 있던 온건 서경파인 정지상, 백수한, 김안 등의 목부터 날리고 시작한다. 결국 김부식은 1년 2개월에 걸친 내란 끝에 이 반란을 제압했다.
사실 서경 천도 운동은 국왕인 인종의 의도가 다분했다. 애초에 천도는 기존의 수도였던 지역에 기반을 둔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그 과정에서 왕권이 강화되는 수순을 밟기 때문이다. 인종의 경우는 이참에 고려 문벌귀족들을 엎어버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서경의 서기가 돌고 하는 등의 장면은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정치쇼에 불과하다. 애초에 그런 일화는 엄청나게 많다. 다만 상당수는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인종은 서경 천도와 왕권 강화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이게 외부적 칭제건원과 금국정벌 등으로 확대되는 것은 꺼리고 있었다. 당시 금은 급속도로 성장하여 이자겸은 사대까지 받아들인 상황이었고, 서경파가 너무 강성해지는 것도 슬슬 견제에 들어가게 된다.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 일으키는데 개경에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것부터가 정지상 등이 묘청의 반란과 연관성이 약하다는 증거이지만, 기존의 정적이므로 그런 것 없이 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제거한 것이다. 애초에 문신간의 대립이기도 해서인지 고려사에서는 정지상 등은 반란자로 꼽지도 않고있다.
이때 김부식은 서경 하나로 반란군의 거점을 제한하는 계획을 세웠다. 김부식은 군을 셋으로 나누어 좌군은 황주와 자비령에서 서경을 견제하고, 우군은 동계로 진입하는 통로를 차단하며, 중군이 뒤에서 조율하는 방식으로 서경군의 세력 확대를 차단했다. 단지 이 기동만으로 개천, 성주에서 서경군 2,000명이 친왕파의 역봉기로 괴멸되고 서경군의 세력 확대 시도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는 김부식의 동생 김부의의 제안이라는 기록도 있지만, 김부식이 이러한 전략적 의도와 결과를 예견할 식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직후 묘청의 목이 배달되었는데 여기까지는 관군의 무혈 승리였다. 다만 이후 난이 길어진 것은 정부 사절인 김부가 서경을 거칠게 다룬 탓이 컸다.
서경 공방전에서도 김부식은 서경군의 야습을 예측하고 대동강 남쪽의 후군에 예비대 1천명을 급파했고, 덕분에 관군은 서경군의 야습을 차단하여 서경군을 성 안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또한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간 것도 김부식의[5] 전략이었다. 김부식이 서경을 포위만 한 채 전쟁이 길어지자 그를 탄핵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김부식은 "전쟁이란 본래 빠른 승리를 기약하지 않는것도 있다"면서 공격론에 반대한다. 김부식은 서경의 기능 자체는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고, 장기전으로 끌고가면서 최소한의 피해로 서경을 진압하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묘청의 난 진압 과정에서 김부식이 치졸하게 윤언이를 견제한 것은 사실이나 그와 별개로 총사령관에게 요구되는 전략적 식견은 충분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공로로 의종 즉위후 김부식은 낙랑국 개국후(樂浪國 開國侯)로 봉해지기도 한다.

2.3. 권력의 정점, 그리고 몰락


서경파를 제거한 이후 개경파 문벌귀족들은 그야말로 득세하게 된다. 김부식은 고려 최고의 관직인 문하시중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필연적인 내부 분열이 시작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김부식과 함께 서경파를 공격했던 윤언이와의 대립이다.[6] 윤관의 4남이기도 한 윤언이는 파평윤씨 가문으로 역시 고려에서 손꼽히는 문벌귀족 중에 하나였는데, 김부식은 윤언이가 묘청과 마찬가지로 칭제건원을 언급하였다는 이유로 윤언이를 탄핵한다. 이후 윤언이마저 좌천시킨 김부식은 고려의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하지만 권불십년이라, 말년이 되자 그의 형제들도 모두 죽고 지지자들도 하나둘 제거되면서 김부식의 권력도 줄어든다. 그리고 마침내 김부식이 좌천시킨 윤언이에게 사면령이 내려져서 중앙 정계로 복귀하게 되면서 김부식은 수차례 은퇴를 청원한다. 김부식의 권세도 막을 내릴 때가 된 것이다.
이렇게 은퇴할 때가 된 김부식이 인종의 권유로 없어진 역사를 복원하라는 명을 받고 만든 것이 《삼국사기》이다. 김부식은 총제작자 겸 감독일 뿐 김부식이 독단으로 삼국사기를 쓴 것은 아니다. 다만 김부식의 입지를 고려하면 내용에 김부식과 그 세력의 영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애초에 삼국사기 편찬에 참여한 이는 최산보, 이온문, 허홍재, 서황정, 박동계, 이황중, 최우보, 김영은, 김충효, 정습명으로 김부식까지 모두 11명인데, 이들은 모두 김부식과 가까운 이들이었으며 주로 자료 수집과 정리를 담당했다. 즉 편찬의 기준은 모두 김부식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여기에 김부식이 더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론만 보아도 김부식의 의도는 국왕의 집필 방침과 함께 양대축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3. 논란 거리



3.1. 무신정변의 씨앗


김부식은 고려의 문관을 대표하는 인물인 동시에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 마지막 문신 권력자였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무신정변이 일어나게 된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아들 김돈중은 행실이 경망스럽고 무례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아들 역시 아버지랑 짝짝궁으로 무신정권 확립에 큰 공(?)을 끼쳤다.
고려사에는 섣달 그믐[7]에는 역귀를 쫓는 의식을 했는데, 각 신하들이 각자 일종의 장기자랑[8]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로 날뛰고 즐기는 중에 내시(內侍)[9]였던 김부식의 젊은아들 김돈중이 무신들을 만만히 보고는, 당시 견룡대정[10]이었던 무신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먹는 사건이 발생한다.[11] 당연히 빡친 정중부는 싸가지없고 병신같은 김돈중을 때리고 욕했는데... 문제는 김부식이 인종에게 정중부를 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왕은 그걸 허락했다.(...) 아무리 문신이 무신보다 위인 사회였다지만 김부식과 김돈중이 해도 너무했던 것. 다만 인종은 정중부를 아끼는 사람이었고, 은밀하게 도망다니게 해줘서 실제로 벌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정중부는 수십년 동안 깊은 앙심을 품게되고, 결국 이 앙심은 무신들의 반란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다만 김부식은 1151년에 죽었고, 그 뒤 약 20년 뒤인 1170년에 무신정변이 일어났을 때에는 김돈중은 무신들의 칼에 맞아 비명횡사하는 처참한 최후를 맞았고 죽은 김부식도 무덤까지 파헤쳐 시체를 토막내 부관참시당했다.
사실 김부식의 경우는 삼국사기를 통해 알수 있듯 6두품 문관 출신들을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했고 무인들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을지문덕과 김유신 계백같은 장수들을 제외하면 평이 크게 높지는 않았다. 또한 무엇보다도 외교관과 학자로 좋은 평을 받았고 반란군 진압에 신경쓴 나머지 토지제도의 개선과 문벌귀족에 대한 개혁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려사는 식화지를 보면 신라의 토지제도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삼국사기의 경우는 불교의 비판만 주류를 이루고 토지제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훗날 신라의 토지제는 이제현이 비판했다.
아래에 후술하겠지만 김부식은 조상을 알 수 없고 어느 집안 족보에도 기록되어있지 않으며, 손자인 김군수 아래로는 어느 사서에도 기록되어있지 않아 후손도 알 수 없다. 김부식의 후손을 자칭하는 가문도 없으니 후손이 흩어져 다른 가문 족보에 편입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3.2. 사대주의 대표?


김부식은 유명한 공자 추종자이기도 했다. 왕이 국학에 방문해서 공자에 제사 지낸 것을 칭송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공자에 대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하행국학표'를 저술했으며, 공자에 대한 찬사인 '중니봉부'[12]를 지어서 자신의 추종심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이런 특출난 점도 김부식이 모화주의자라는 평을 받는 한 가지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유학자로서 당연한 행동이다. 애당초 고려의 정치제도가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행동이다. 당장에 전 세대의 서희강감찬, 윤관부터가 유교 경전을 공부하여 벼슬길에 오른 유학자들이었고, 특히 윤관은 여진과 싸우는 진중에서도 경전을 휴대하고 탐독한 인물이다. 때문에 김부식이 그렇게까지 두드러지게 공자를 모화했다고 볼 수는 없다. 실제로 공자를 좋아했다지만 정작 고려왕조 유학자들에게 있어서 정관정요가 문화로 자리잡아 순자의 이론에 따라 행한 사람이 많고 더욱이 이 시대의 유교는 굉장히 호국화 성향을 띄어 대체로 유학자들이 고려초기와 중기에 전란과 반란에 개입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름부터 송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소식(소동파)에게서 이름을 따와서 그러한 선입견을 강화시키기도 한다. [13] 대표적으로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라고 비난한 사람이라면 단재 신채호가 있다.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김부식이 국사를 사대주의적인 《삼국사기》에 집약하고 당시 전해지던 다른 사서들을 말살했다고 적고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수십년후 이제현, 일연의 시기 혹은 백여년이 지난 조선 초기까지도 《삼국사기》 이전 시기의 사서들이 여럿 전해지고 있었고 인용되었다. 애초에 사대라는 것 자체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다른 나라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개념이 아니다. 상대가 우리 국력보다 훨씬 강한 대국인 만큼 맞서기보다는 차라리 비위나 맞춰주면서 얻을 것은 얻자는 논리다. 현실적이고 보수적이기는 해도 매국이나 나라의 정체성을 파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14] 또한 김부식은 중화 추종이 아닌 철저히 실리를 챙기는 행보를 보였는데, 송이 아닌 북방 오랑캐로 보던 금에 사대를 하자는 이자겸의 주장에도 크게 반대를 하지 않았고, 고려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남송에 대해서는 대놓고 거절했다.
그리고 《삼국사기》를 보면 김부식을 단순한 사대주의자로 보기엔 어려운 면들이 적지 않다. 《삼국사기》항목 참조. 물론 《삼국사기》가 꽤나 보수적인 내용인 것은 맞다.[15] 다만 이런 부분을 인정해버리면 좋아할 세력[16]이 좀 많아서 대놓고 언급을 하지 않을 뿐이다. 마땅히 다른 사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17].
사대주의자라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김부식은 중국과 다른 한반도의 고유 문화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삼국사기를 통해 엿볼수 있는데 몇가지를 찾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 가장 확실하게 알수 있는 것은 바로 삼국의 역사를 제후가 아닌 황제의 역사에 해당하는 본기(本紀)로 구성하였다는 점이다. 참고로 이후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는 《삼국사기》와 같은 기전체 형식을 따랐지만 고려의 역사를 본기가 아닌 세가(世家), 즉 제후의 역사로 기록하였다. "고구려사가 어디에 귀속되어야 하는가?" 하는 논쟁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해 진행 중이지만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존재로 인해, 고구려사는 중국사가 아닌 우리의 역사로 남을 수밖에 없다.
  • 또한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과 술이부작(述而不作)[18]에 의거해 저술한 《삼국사기》에서도 고구려 시조, 신라 시조의 탄생 설화를 기록해 두며, "중국의 기록에도 신비한 설화들이 있는데, 우리라고 없어야 할 이유가 없다."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각종 당시 한반도의 기이한 설화들을 기록해두며 "믿지는 못하겠는데 일단 전해지니까 기록해둡니다."라고 각주를 달아놓기도 했다.
  • 거서간, 마립간 같은 고유어 왕호는 촌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이걸 제왕연대력에서 모두 '왕'으로 바꿔 썼던 최치원을 비판하는 논평을 넣었다.
>사관이 논평한다.>신라왕으로서 거서간이라 칭한 이가 한 사람, 차차웅이라 칭한 이가 한 사람, 이사금이라 칭한 이가 열여섯 사람, 마립간이라 칭한 이가 네 사람이다. 신라 말의 이름난 유학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에서는 모두를 왕이라 칭하고 거서간 등으로 칭하지 않았다. 혹시 그 말이 천박하여 칭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겨서일까? 『좌전(左傳)』과 『한서(漢書)』는 중국의 역사책인데도 오히려 초(楚)나라 말인 ‘곡오도(穀於菟)’, 흉노(匈奴) 말인 ‘탱리고도(撑犁孤塗)’ 등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신라의 일들을 기록함에 그 방언을 그대로 쓰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본다.>>《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지증 마립간
  • 중국에 항복하고 고구려를 멸망하게 한 연남생을 '남생, 헌성은 당나라에는 공신일지 몰라도 우리 입장에서는 반역자다.'라고 사론에서 평가했다.
  • 주필산 전투에 대해서도 "중국 사서에는 별다른 언급이 안되어 있는데, 내가 찾아보니 당나라 놈들도 고구려 만큼 피해를 크게 입은거 같단 말야. 중국애들이 쪽팔려서 안쓴게 아닐까?."라며 중국사를 디스하기도.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에서는 ‘주필산 전쟁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군사를 연합하여 그 군사가 바야흐로 40리나 뻗쳤다. 태종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황제의 6군이 고구려 군사에게 제압되어 거의 꼼짝 못하였네. 영공(이세적)의 휘하에 있는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척후병이 보고하였을 때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네.’라고 하였다. 비록 끝내는 스스로 탈출했으나 저와 같이 겁을 내었거늘 『신ㆍ구당서』나 사마공(司馬公)의 『자치통감』에 이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나라의 체면 때문에 말하기를 꺼려한 것이 아니겠는가.>>《삼국사기》
  • 《삼국사기》 진삼국사표에선 "하물며 생각건대, 신라ㆍ고구려ㆍ백제가 나라를 세우고 솥발처럼 대립하면서 예를 갖추어 중국과 교통하였으므로, 범엽(范曄)의 『한서(漢書)』나 송기(宋祁)의 『당서(唐書)』에는 모두 열전(列傳)을 두었는데, 중국의 일만을 자세히 기록하고 외국의 일은 간략히 하여 갖추어 싣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고기(古記)라는 것은 글이 거칠고 졸렬하며 사적(事跡)이 누락되어 있어서, 임금된 이의 선함과 악함, 신하된 이의 충성과 사특함, 나라의 평안과 위기, 백성들의 다스려짐과 혼란스러움 등을 모두 드러내어 경계로 삼도록 하지 못하였습니다."라면서 중국이 남의 나라 역사까지 왜곡을 한다는 것을 맨 처음 알린 사람이다.
정리하자면 김부식은 중국의 문화를 깊이 흠모했던 모화주의자였던 건 사실이지만 사대주의자라 보기는 어렵다. 학자로서의 김부식은 유학의 대가답게 모화주의의 면모가 있지만 정치가로서의 김부식은 현실주의자였다. 묘청이 금나라를 공격해 우리의 옛 땅을 되찾자는 이상적 자주주의자라면 김부식은 현실적으로 지금 고려의 국력으로 창성하는 금나라를 적으로 돌리면 이득이 될 게 없으니 차라리 금나라와 관계 개선을 통해 국익을 얻어내자는 현실적 자주주의자였다.
따라서 묘청과 김부식 간의 대결은 자주 대 사대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간의 싸움이라 보는 것이 옳다. 흔히 사대주의와 모화주의를 합쳐 사대모화라고 하기 때문에 양자가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둘은 구분되어야 한다. 김부식은 모화주의자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중화 왕조를 섬겨야 한다는 삼학사 같은 고지식한 사대주의자는 아니었다.

4. 수많은 라이벌



4.1. 정지상


동시대의 명문장가 정지상과는 숙명의 라이벌 관계인데 문장에서는 정지상이 한 수 뛰어나서 김부식이 그를 질투했다고 한다. 사실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정지상과는 달리 김부식은 시보다는 당시에 유행하기 시작한 당송대의 고문체에 능한 문장가였다. 그 때 즈음 고려에서는 그간 대세를 이루던 사륙변려체 대신 고문체가 자리잡고 있었다. 훗날 묘청의 난이 일어났을 때 김부식은 제일 먼저 정지상부터 잡아 죽였다.
사실 정지상은 서경파였기 때문에 묘청과 연결고리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 태평스럽게 개경에 남아있었다는 것만 봐도 반란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때문에 묘청 토벌을 담당한 김부식이 개경에 있던 서경파인 정지상, 백수한, 김안 등의 목부터 날린 것은 동경파가 서경파를 "기회는 이 때다" 하면서 제거한 정치적 의도가 다분했다.
이는 고려 건국시기부터 있었던 고구려 계승주의와 신라 계승주의 간의 대립의 종결이기도 했다. 즉, 처음에는 고려 예종이 윤관 등을 통해서 동북 9성을 개척한 시기까지는 고구려 계승세력이 주도했지만, 외척 이자겸이 득세하여 금에 사대를 받아들이는 때는 신라 계승세력이 정권에 중용되었다. 그런데 서경파인 정지상 등이 척준경 등을 동원해 이자겸을 제거하면서 이자겸에 협조한 동경파도 같이 눌러 버리다가 결국 척준경도 제거되면서 고구려 계승세력이 정권을 대부분 장악하게 되고, 이에 대한 절정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나 김부식이 이를 제압했고 그 결과 서경파가 완전히 박살나 버렸다.
야사 <백운소설>에 의하면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이고 난 뒤 어느날 헛간에서 쭈구리고 앉아 큰일을 보고 있었는데, 원한을 품은 정지상이 귀신이 되어 나타나 김부식의 부랄을 덥썩 움켜쥐고 터트릴듯 말듯 오물락쪼물락 거리며 '이게 누구의 부랄이냐'고 묻자 부랄이 터질까봐 식은 땀을 흘리던 김부식은 그 희롱에 발끈하며 '니 에비 부랄이다 니 에비!'라고 발언하는 바람에 화가 난 정지상이 그 즉시 부랄을 터트려 죽였다고 전해진다(...).
또 백운소설에는 김부식이 시를 짓자 정지상의 귀신이 나타나 "그것밖에 못짓냐 멍청아"라고 비웃고는 더 좋은 구절을 제시해서 김부식을 버로우시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자세히 말하면 정지상이 죽은 후의 어느 날 김부식은 ''이라는 주제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柳色絲綠 버들가지는 천 가닥 실처럼 푸르고/桃花點紅 복사꽃 일만 점이 붉구나

그런데 갑툭튀한 정지상 귀신이 김부식의 싸닥션을 날리더니 다음과 같이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버들가지가 천 가닥인지 복사꽃이 만 송이인지 세어 보는 미친 놈이 어딨냐? 시를 쓰려면 "柳色絲綠(버들가지 가닥가닥 푸르고)/桃花點紅(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라고 왜 짓지 못하는 거냐?!"

겨우 두 글자만 바꿔서 김부식을 버로우시키는 일화의 사실여부야 어쨌든, 이 일화는 시를 퇴고하는 하나의 요령으로 인용되곤 하는 일화 중 하나다.
참고로 정지상을 죽인 것 때문에 결혼이 어려워진 후손이 있다(...).
고은 시인은 <만인보> 2권에서 이를 다룬 시를 썼다.
<시인 정지상>
고려 이미 기울어가는데
송도 도읍은 빈집투성이
백성의 원한 기러기보다 높은데
이때
대동강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 써 떨쳐
나라를 큰 땅으로 펼치려 함이 옳거니와
묘청과 함께
백수한과 함께
대동강물과 함께
이 뜻 품었던바
신라 사대주의 이래의 김부식에게
맨 먼저 죽고 말았다
한 시절 지상과 부식 시의 벗이었으매
'절간에서는 독경소리 끝나고
하늘빛 깨끗하기 유리로다'
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부식이 이를 탐내어
제 시로 하려고 알랑댔으나
지상이 들어주지 않자
이 앙심으로 부식의 칼이 지상의 목을 내려쳤다
죽은 지상 음귀로 떠다니며
절간 칙간에 숨어 있다가
부식이 뒤를 보자
그의 불알을 뽑아 죽여버렸다
6대 왕조 주름잡은 늙은 송장
일흔일곱 늙은 송장에 묵은 구린내깨나 푹 절여 있었다

4.2. 묘청


또한 본인이 토벌한 인물인 묘청과는 지금까지도 한국사 속 사상적 라이벌의 대표적인 예로 알려져 있다. 사대주의와 자주의 대표나 유학자와 승려라는 여러 입장 등으로 라이벌 플래그를 형성하는 모양. 물론 이렇게 단순화해서 보기에는 많이 복잡한 부분이지만.

4.3. 윤언이


묘청이나 정지상에 비해 덜 알려진 감이 있지만 윤관의 넷째 아들인 윤언이와도 여러 사연이 얽혀 거의 평생을 대립했다. 윤관은 예종의 명으로 대각국사 의천 의 비문을 지은 적이 있는데, 의천의 제자들이 나중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항의를 하게 된다. 이에 예종은 김부식에게 비문을 고치게 하는데, 문제는 이 때 김부식은 아직 신진 관료에 불과했고, 또한 형식적으로라도 사양하지를 않아 윤관의 아들 윤언이의 분노를 사게 된다. 이에 대한 복수로 윤언이는 김부식이 자기 전공인 <주역>을 인종에게 강의하는 자리에서 그가 진땀을 뺄 정도로 몰아붙여 무안을 주었다. 묘청의 난 진압 때 함께 참전하여 공을 다투기도 했는데 총대장 김부식은 윤언이가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하려고 그의 부대를 작전 방향과 전혀 상관없는 곳으로 보내버리기도 했다.
또한 김부식의 최종보스가 임원후와 공예태후인데 묘청 세력에 가장 반기를 들고 죽여야한다고 주장해 김부식과 이내 친한관계가 된다. 서남계 출신과 동남계 출신은 본시 싸잡아 신라계로 매도되는 중북경남 풍조로 멸시받을때 이들은 더 친해졌는데 이들이 갈라선 결정타가 외척 문제와 후사문제로 실제로 김부식계는 인종의 신임을 얻어 의종을 미나 정작 공예태후나 임원후 일가는 대령후를 밀게된다. 이로 인해 후사문제가 매우 엉망이 되고 마침내 이들은 갈라서게 된다. 실제로도 삼국사기에서 역사학의 조예가 깊었지만 이 사람의 이름이 빠질 정도이다.
이렇듯 김부식 본인도 뛰어난 능력만큼 자부심이 대단히 강했던 인물이었고 거기에 비타협적인 성품의 소유자라 이래저래 라이벌이 많았던 인물.

5. 그 외


  • 송나라 사신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는 김부식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있다. 그 기록에는 얼굴은 시커멓고 키가 크고 뚱뚱하며 눈이 튀어나왔다고 적혀 있다. 또 서긍은 소동파 빠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김부식, 김부철 형제의 이름 돌림자를 보고 슬그머니 어떤 뜻인지 물어보기도 했다고 한다.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서 그가 등장하는 가사가 "죽림칠현 김부식"인데, 이 때문에 김부식이 죽림칠현이었다거나, 혹은 죽림칠현과 관계 있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김부식은 고려의 죽림고현과 전혀 관계 없는 인물이고 죽림칠현보다 한 세대 후의 사람이다. 죽림칠현은 김부식이 죽고 난 뒤인 무신정권기에 주로 활동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의 가사는 그냥 단순히 죽림칠현과 김부식을 동시에 나열한 것뿐이다.
  • 유학자 임에도 불교에 대한 조예가 매우 깊었고 불교를 비판했음에도 정작 본인 역시 불교를 좋아했던 유학자이다.
恢恢一道 분명한 하나의 가르침을
落洛其音 분명하게 이야기하건만
機聞自異 근기에 따라 서로 다르게 들으니
大小淺深 크고 작고 깊고 옅은 이해의 차이가 있네.
如三舟月 같은 달이 상황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과 같고
如萬竅風 바람이 구멍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는 것과 같네.
至人大鑒 지인(至人)의 큰 이해로 보면
卽異而同 다르면서 또한 같도다.
瑜伽名相 유식[瑜伽]은 명상(名相)을 이야기하고
方廣圓融 화엄[方廣]은 원융을 이야기하지만
自我觀之 내가 보기에는
無往不通 서로 통하지 않음이 없네.
百川共海 백 개의 강이 모두 같은 바다로 가고
萬像一天 하나의 하늘이 만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네.
廣矣大矣 크고도 넓어서
莫得名焉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을 뿐이다
유학자임에도 도저히 유학자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시를 적었고 불교에 대한 조예는 생각보다 깊었다. 실제로 개인 절간도 있었다. 실제로 이로 인하여 조선왕조 유학자들로부터 유자의 탈을 쓴 불자라고 비판을 받은 적은 있으나 정작 조선왕조에 사대부들도 불씨잡변을 외치면서 뒤로 승려들을 만나거나 불경을 읽는 등 할건 다 했다. 당장에 불씨잡변을 쓴 정도전부터가 그러했다.
  • 고은 시인은 <만인보> 2권에서 그를 다룬 시를 썼다. 제목은 사람 이름과 같은 '김부식'.
||송나라 동파거사는
고려 사절 따위 내쫓아버렸다
고려놈들 이 천한 오랑캐놈들! 하고
그런 동파거사 흠모한 아버지 김근 나리
셋째아들 이름을 동파 소식의 식자 따서
부식이라 고치고
그걸로 성이 안 차
넷째아들 이름도 소식의 아우 소철의 철자 따서
부철이라 고쳐주고
만약 동파거사께오서
손위 형들이 있었다면
부필 부일마저 그 이름자로 고쳐야 했것다
시와 학문에 뒤진 것으로
정지상 죽여버리더니
묘청 역적이라 들씌우더니
어찌 이뿐이겠는가
늙어 써 올린 『삼국사기』가로되
거기에는
고구려 승전고도 올리지 않고
발해도 없고
오로지 신라가 제일 먼저 세워진 듯이
세발 네발 가로되
밤새도록 중화 춘추필법 이소사대[19] 맨망[20]으로 가로되
[1] 많은 사람들이 경주 김씨라고 알고 있고 위키백과에도 그렇게 기술되어있지만 사실 김부식이 경주 김씨라는 확증은 없다. 김부식의 증조부인 김위영은 고려 태조가 경주의 주장으로 임명한 이래 일가가 경주에서 살았는데, 이 김위영이라는 사람의 출신을 알 수 없다.심지어 장흥위씨 족보에서 김위영이라는 분은 위씨의 방조(傍祖)로 나오기도 한다. 뭐 경주 출신이니 신라계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당장 가야 김유신김해 김씨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2] 김부식의 손자인 김군수가 동도객관이라는 시를 지어 거기서 자신을 태종 무열왕의 후손이라 칭하는데, 참고로 강릉 김씨를 제외한 대부분의 경주 김씨는 내물왕계로, 무열왕의 후손이 아니다. 신형식 교수가 쓴 <신라통사>라는 책에는 고려 개국 당시에도 무열왕계는 강릉으로 물러나 세력이 위축된 상태였기에 경주와 관련이 없다고 설명한다. 확실한 물증이 없어 추측밖에 할 수 없으니 판단은 알아서 할 것.[3] 본인이 쓴 삼국사기의 기록.[4] 경주. 무인집권기의 신라 부흥운동인 동경의 난으로 인해 중심지였던 동경이 경주로 격하되게 된다.[5] 사실 동생인 김부철의 능력이 컸다. 지구전도 김부철이 장기전략책인 평서십책 平西十策이다.[6] 다만 윤언이와 김부식의 관계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뒤틀린 관계였다. 김부식이 재상의 지위에 오르기 전에 벌어진 비문 사건부터 시작해서, 질긴 악연은 20년이 넘도록 지속된다.[7] 제석(除夕)[8] 잡기(杂技)라고만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는 귀신쫓는 춤 같은 것을 췄을 것이라고 추측한다.[9] 고려시대의 내시는 조선시대의 내시와는 전혀 다른 성향을 지닌 엄연한 관직으로 왕의 최측근역을 맡은 정식관료들이었으며, 다른 관직을 지닌 자가 겸임하였다. 고려 중기까지는 유력 귀족 자제들이 주로 맡았으며 이를 환관이 맡게 되는 것은 원간섭기를 거쳐 가며 원나라의 영향을 받으면서다. 그래서 고려 초중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선 내시에게 수염이 있다.[10] 견룡군은 고려 왕실을 지키는 근위대이다.[11] 정중부는 외모도 훤칠하고 멋진 수염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의 외모가 왕과 여러 대신에게 주목을 받자 김돈중이 이를 시기하여 벌였다고 한다.[12] 중니는 공자의 자로 공자를 봉황에 빗대어서 칭총하면서, 자기도 공자의 뜻을 따르고 싶다는 글이다.[13] 게다가 동생 이름조차도 소식의 동생인 소철에게서 이름을 따와서 김부철이다(...).[14] 오히려 김부식은 조선시대에 와서는 제후국이면서 세가가 아닌 제국의 역사인 본기를 쓰는게 불손하다는 식으로 까였다. 어떤면에서는 자주적으로 보일 수도 있어 미묘하다.[15] 그러나 "고려시대의 역사서들이나 《삼국사기》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 《구삼국사》 등의 내용을 현재 추정하는 것과 비교해서, 《삼국사기》는 보수적인 사서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 성급한 주장이다. 구삼국사의 경우에는 허무맹랑한 기록들도 모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삼국사기》는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과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원칙에 의거해 "사실로 확인 될만한 기록"만 기록했기 때문이다.[16] 환자 계열 추종자라거나, 일본이라거나, 중국이라거나 꼽아보면 꽤 많다.[17]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의 성향을 대놓고 보여주는 것은 사론이다. 《사기》에서 사마천의 말이 태사공왈 로 나타나는 것처럼,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의 의도 역시 사론으로 나타난다.[18] 군자는 기이한 것을 쓰지 말아야 하며, 없는 이야기도 지어내어선 안된다.[19] 以小事大,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섬김. 쉽게 말해 사대주의.[20] 요망스럽게 까붊. 또는 그런 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