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궁 (r20180326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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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궁 터의 현재 모습.
1. 개요
2. 역사
2.1. 창건
2.2. 조선 왕실의 뿌리가 되다
2.3. 수난과 마지막
3. 주요 건축
4. 역대 도정궁 주인
4.1. 역대 사손


1. 개요


都正宮.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친아버지 덕흥대원군과 그 종손들이 머물던 사저(私邸, 개인이 살던 집)이자 종택(宗宅, 종갓집)이며, 선조의 잠저(潛邸)[1]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왕산로 1길과 사직로7길 사이 일대(사직동 262번지 일대)로 사직단의 남쪽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없어졌고 몇몇 건물만이 서울 곳곳에 산재해 있는 정도이다.

2. 역사



2.1. 창건


덕흥대원군은 중종의 서자로 왕이 될 수 없는 왕자였기에 비록 궁궐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나중에 반드시 밖으로 나가서 살아야했다.[2] 정확히 언제 출궁(出宮) 했는 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실록에 이미 중종 33년(1538년)에 덕흥군의 집에 대한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무렵에 나가 살았음을 알 수 있다.[3] 하지만 중종 35년(1540년) 기사를 보면 공사가 반이나 진행되었는데 집 터에 우물이 안 나온다는 핑계로(...)[4] 터를 옮기는 것이 어떠냐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이 때 아직 완공은 안되었던 것 같다. 그래도 중종 39(1544)년의 기사에 "덕흥군의 집이 지어진 지 오래인데..." 라는 내용을 보아 아마 1540년에서 1544년 사이에는 완전히 공사가 끝난 듯하다.

2.2. 조선 왕실의 뿌리가 되다


이렇게만 보면 일반 왕자의 저택에 지나지 않지만 이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덕흥대원군의 3남 하성군이 명종의 뒤를 이어 선조로 즉위하면서 대우가 일반 왕자 사저와는 확연히 달라지게 된다. 우선 덕흥군이 송나라 복왕의 예를 따라[5] 왕의 사친(私親) 자격으로 대원군의 칭호를 받게되었고[6] 이에 따라 잠저 후원에 대원군 가묘(家廟)[7] 덕흥궁(德興宮)[8]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덕흥대원군 종손(宗孫) 4대까지 대군(大君) 예로 작위를 주고 그 이후 사손(嗣孫)들에게는 '당상관 돈녕부 정3품 도정(都正)' 직을 대대로 세습하게 하였다. 그래서 이 궁의 이름이 대대로 도정들이 산다는 뜻의 도정궁인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순조 대에 와서 순조의 명으로 종친부 정1품 군(君) 벼슬을 대대로 세습하게 하였다. 그래서 덕흥대원군의 사손(嗣孫)들은 조선 후기 내내 엄연히 정식 왕족의 대우를 받았고 그래서 이 도정궁 13대 종손(宗孫) 경원군 이하전이 안동 김씨에게 밉보이지만 않았어도 헌종 사후 왕위를 계승했을 것이라는 잘못된 이야기가 알려지기도 했다.[9]

2.3. 수난과 마지막


단, 조선 후기 왕실의 본가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게, 아니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나름 수난을 많이 겪었다.
먼저 1588년(선조 21) 도정궁이 화마로 소실되었고 이 때 선조의 명으로 5개월 만에 신속하게 옛 모습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또 왕족 대접은 받았어도 사손 이하전의 정치적 몰락 때문인지 도정궁도 무관심과 냉대 속에 몇 년을 보냈고 1865년(고종 2)에 문조의 비인 신정익황후 조씨가 말하기를 "도정궁의 사손이 영체(零替)됨으로 인하여 무너지는 대로 보수를 하지 못해서 장차 허물어질 지경에 이르렀으니, 옛날을 돌이켜 생각할 때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이 집의 소중함이 다른 곳과는 아주 다르니, 수리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호조의 경비가 아직도 구차한 것을 걱정하고 있으니, 단지 어갑주전(御甲胄錢) 5,000 냥을 특별히 획하(劃下)[10]하여 호조에서 속히 수리하라"라며 복원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그리고 1913년 12월에 도정궁이 화마로 이때까지 150칸이나 되었던 궁이 20~30칸만 남기고, 소실되었다. 그리고 그나마 남은 영역도 1931년 일제가 왕실의 권위를 훼손할 목적으로 200여 필지로 분할해 버렸고 도정궁은 하나 둘 잘린 채 팔려나갔으며 해방 이후에도 도시 개발 명목으로 팔리고 헐려 현재는 본 터에 거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3. 주요 건축



경원당(慶原堂)
조선 철종 때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사형 당한 도정궁 13대 사손 이하전(李夏銓)의 봉제사를 지내던 가옥으로 흥선대원군이 1872년 경에 지어준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주소는 사직동 262-85번지로 이하전 생전에는 그의 살림집이 있던 곳이다. 1908년 이하전이 경원군(慶原君)으로 추봉되면서 경원당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1913년에 불타 1914년 경에 재건되었고, 성산대로 건설 계획 때문에 1979년 7월 4일 광진구 건국대학교 캠퍼스 내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11] 한 때 사직동 시절 정재문이 기거했다 하여 '사직동 정재문가'라고도 한다. 건평 36.66평이며 한 건물에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되어 공간구성이 합리적인 것이 특징이다. 평면으로는 전형적인 한국가옥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사랑채의 벽체와 창호(窓戶) 처리 등은 서양식과 일본식이 약간씩 가미되어 있다. 1977년 3월 17일 서울특별시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되었다.

덕흥궁(德興宮)
도정궁 후원에 있던, 불천지위 6위를 모신 사당으로 창빈 안씨(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조모), 덕흥대원군(선조의 사친), 하동부대부인 정씨(선조의 사친), 하원군 의헌공 이정(선조의 백형), 남양군부인 홍씨(하원군 정배), 신안군부인 이씨(하원군 계배) 6분을 모셨다. 1569년 선조의 명으로 잠저에 창건되었다. 창건 할때는 가묘(家廟)라고 하였으며, 후대로 내려오면서 부터 사묘(私廟), 덕흥사(德興祠), 대원군묘(大院君廟), 대원군 사우(大院君 祠宇), 덕흥대원군 사우(德興大院君 祠宇), 덕흥대원군묘(德興大院君廟), 덕흥궁(德興宮)으로 불리다가 고종조에 덕흥대원군궁(德興大院君宮) 또는 덕흥궁(德興宮)으로 불렸다. 임진왜란 때 화마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명으로 다시 복원하였으며, 선조 이하 역대 임금이 친히 전배와 제향(작헌례)을 행했다. 덕흥궁 건물 구성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는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된 정당이 있었으며, 정당 앞쪽에는 임금이 친행할 때 배례공간인 배각이 있었고, 배각 좌우로 전사청 및 이안청이 있었다. 현재는 도시 개발 및 도정궁 화마로 소실되어 사진으로마 볼 수 있으며, 불천지위 6위를 1950년대 경기 남양주시 별내동 339번지 덕릉마을 내 덕릉재실(德陵齋室, 水落山房)로 이전하여 영년봉묘하고, 각 기신일에 후손들이 제향을 받들고 있다.

장행랑(長行廊)
도정궁의 행랑채로 1920년대 서울 5대 명물 중 하나였다고 한다. 현재는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별채
도정궁의 별채로 추정되는 건물로 현재는 현대그룹 소유이다.

운경고택의 정문.
그리고 현재 도정궁 터 일부에는 운경고택이 들어서 있다. 전 국회부의장이었던 운경 이재형이 1953년에 매입한 뒤 1960년대 초부터 주거로 활용했으며 사후 그의 호를 딴 재단에 기증했다. 다시 재단은 옛 한옥을 2000년 원형대로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도정궁 당시의 원형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어 주요 건축에 이 곳의 건물은 적지 않는다. 운경고택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http://happy.designhouse.co.kr/magazine/magazine_view/00010002/6056 참조. 참고로 이재형도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 선조의 서7남 인성군의 10대 종손(宗孫)이다. 즉 한 때 덕흥대원군의 종갓집이 인성군의 종갓집이었던 셈. 400년만에 본가로 돌아온 인간 연어 참고로 왔다! 장보리의 비술채가 여기다.

4. 역대 도정궁 주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년 - 1559년), 조선 제14대왕 선조(宣祖)의 생부(生父).

4.1. 역대 사손


1. 의헌공 하원군 이정(河原君 李鋥, 1545년 - 1597년), 호성원종2등공신.
2. 당은군 이인령(唐恩君 李引齡, 1562년 - 1615년)
3. 응천군 이돈(凝川君 李潡, 1579년 - 1617년)[12]
4. 동지돈녕부사 이정한(李挺漢, 1601년 - 1671년)[13]
5. 동지돈녕부사 이홍일(李弘逸, 1640년 - 1718년)[14]
6. 돈녕도정 증 이조참판 이세정(李世禎, 1661년 - 1721년)
6.5. 진사 이명좌(李明佐, 1681년 - 1722년)[15]
7. 돈녕도정 증 이조판서 이명회(李明會, 1685년 - 1727년), 임인사화 연좌
8. 동지돈녕부사 증 좌찬성 이형종(李亨宗, 1706년 - 1759년)
9. 판돈녕부사 이풍(이례)(李灃, 1727년 - 1795년)
10. 진안군 이언식(晋安君 李彦植, 1752년 - 1819년)[16]
11. 완성군 이희(完城君 李爔, 1771년 - 1830년)[17]
12. 완창군 이시인(完昌君 李時仁, 1805년 - 1843년)[18]
13. 증(贈) 경원군 이하전(慶原君 李夏銓, 1842년 - 1862년)[19]
14. 창산군 이해창(昌山君 李海昌, 1865년 - 1945년)[20][21]
15. 비서감승 이덕주(李德柱, 1887년-1962년)[22]
16. 이우갑(李愚甲, 1918년∼1950년)[23]
17. 이영기(李英基, 1946년∼))[24]
여담으로 사손들의 군호를 보면 재미있는 규칙을 발견할 수 있다. 왕족 대우를 받지 못한 사손 및 제11대 완성군과 제12대 완창군을 제외한 모든 사손들의 군호는 본인의 외가 본관에서 따왔다는 점인데 다만, 본관명을 그대로 쓰지는 않고 다른 글자를 첨가하거나 옛 지명 또는 별칭이나 관련 지명으로 지었다. 예를 들어 제1대 하원군(河原君)의 '하(河)' 같은 경우는 생모 정씨의 본관 '하동(河東)'에서 한 글자를 고른 것이고, 제3대 응천군(凝川君)의 군호는 어머니 박씨의 본관인 밀양의 옛 지명인 '응천(凝川)'에서 따온 것이며 제14대 창산군(昌山君) 군호의 경우 양어머니 서씨의 본관 대구 달성에 있는 지명 중 하나인 '창산(昌山)'으로 정한 것이다.

[1] '잠길 잠(潛)'에 '집 저(邸)'. 즉 (임금)이 잠겨 있었던 집이라는 뜻으로, 정식 왕의 후계자가 아닌 왕족이 왕이 되었을 때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집이라는 뜻이다.[2] 궁궐 안에 살 수 있는 남자는 단 둘 뿐이다. 왕과 왕세자, 상왕세손이 있다면 최대 4명. 그 이외에는 절대 궁궐 안에서 쭉 살 수 없었다. 내시는? 그래서 떼잖아[3] 조선왕조실록 - 중종실록, 중종 33년 7월 29일 경자(庚子) 두번째 기사 : "왕자녀의 저택이 제도에 벗어난 것을 적간하였는데, 덕흥군(德興君)의 집은 50칸이므로 법전에 많이 벗어나지 않았으나 정신 옹주(靜愼翁主)의 집은 8칸, 숙정 옹주(淑靜翁主)의 집은 11칸이 각각 법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장무소(掌務所) 2칸과 마구 5칸은 왕자녀 집의 원도형에는 없지만 으레 다 있는 것이다. 이것을 제하고 따진다면 정신 옹주의 집은 3칸, 숙정 옹주의 집은 6칸이 제도에 벗어난다. 이것은 헐라. 적간은 공조가 하였으나 허는 일은 오부(五部)의 관원이 감독하게 하되, 서부(西部)와 중부(中部)에 있는 저택은 반드시 2부의 관원이 감독하게 하라. 그리고 헐어 버릴 때에는 각 집의 종들에게 미리 이르라."[4] 실제로는 안 나오기는 커녕 관리를 보내어 확인해봤더니 네 곳을 팠는데 네 곳 다 물이 많았다고 한다(...) 결국 터는 옮기지 않고 원래 장소에 그대로 지었다. 걍 집 짓다 뭔가 지 맘에 안들어서 강짜부리는 것[5] 사실 이게 그냥 쓴 것은 아닌 나름 의미가 있는 것이 뭐냐면, 원칙적으로 조선시대에는 왕의 아들만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선조는 덕흥군의 아들이라 절대 왕이 될 수 없었지만, 사람이란 꼼수를 쓰는 동물. 선조를 선왕인 명종의 양자로 입적시켜 그 자격으로 왕을 세운 것이다. 그래서 덕흥대원군과의 법적 관계는 단순히 서삼촌과 조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하지만 그래도 친아버지이니 다른 일반 왕족들과 다르게 높여 대접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인지상정. 그래서 중국에서도 방계 출신 황제가 자신의 아버지를 높인 예를 찾아내어 조선식으로 대입시킨 것이다. 이것은 조선의 대원군 제도가 정착하는 계기가 된다.[6] 단 이 때 덕흥대원군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그 부인 하동부대부인 정씨 역시 마찬가지.[7] 집안의 사당.[8] 집안의 사당[9] 이하전은 조선 왕실 직계와는 실질적인 혈통으로는 덕흥대원군의 아들 대에서 이미 갈라졌고 양자 계열로 보면 중종 때 갈라졌다.(선조가 명종의 양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헌종과는 실제 혈통 상으로는 25촌(...), 법적으로는 27촌(...)이다. 아무리 항렬이 높다지만 실제 혈통 상 헌종의 7촌 숙부인 사람과 25촌 - 27촌이 되는 사람 중에 누구한테 왕위를 물려줄 것인지는 굳이 말을 안해도 될 것이다.[10] 이전에는 기획에서 내려주다라고 하지만 여기서 획자는 자르다라는 뜻이다. 재정용어로 본래의 재산을 때어 내려준다는 뜻이다.[11] 즉, 현재 소유와 관리는 모두 건국대학교에서 하고 있다.[12] 여기까지 종실 예우로 종친부 '군'의 칭호를 받은 정식 왕족이었다.[13] 여기부터 대원군 적장손 세습 제도로 돈녕부 도정(정3품 당상관)의 칭호를 받았으며 대원군의 적장손 세습 제도가 시작되었다. 조선의 귀족의 탄생되었다.[14] 4대 사손 이정한의 양자이자 이정한의 동생 이석한의 장남.[15] 6.5대라는 숫자가 참 애매한데 왜 이러냐면 원래 7대 사손이었던 이명좌가 임인사화에 연루되어 사형당했기 때문에 그 뒤를 동생 이명회가 대체한 것이다. 이명회 또한 임인사화에 연루되었긴 했지만 이명좌와는 달리 살아남았고 후에 영조가 신원을 복구시켜주면서 이명좌의 자리를 정식으로 대체한 것이다.[16] 여기서부터 다시 대원군의 적장손 세습제도에 의해 왕족의 예우에 해당한 종친부 '군(君)'의 칭호를 받는다.[17] 10대 사손 진안군 이언식의 양자이자 이언식의 동생 이민식의 장남.[18] 11대 사손 완성군 이희의 양자이자 이희의 친동생 이옥의 2남.[19] 왜 증이 붙었냐면 이하전은 생전에 군의 칭호를 받지 못했었다. 죽고나서 신원이 복위된 뒤 대원군 적장손 예우로 추증된 것.[20] 경원군 이하전의 사후 양자로 실제 혈통은 3대 사손 응천군 이돈의 친동생 종실 밀산군 정혜공 이찬에서 갈라졌다. 이하전과 촌수로는 23촌 숙질간.[21] 이 이름하면 동명의 야구선수(...)가 먼저 생각날 것이다. 사실 아주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닌게 이해창 선수도 덕흥대원군의 후손이다. 즉, 같은 항렬의 먼 친척이라는 이야기.[22] 여기까지 대원군의 적장손 제도가 세습되어 이어졌다.[23] 여기서부터는 대한제국 멸망으로 대원군의 적장손 세습 작위를 못 받고 상징적의 칭호로 '도정궁 사손'으로 불린다.[24] 여기서부터는 도정궁에서 거주를 못 했지만 남양주시 대원군의 재궁인 '덕릉재실'에서 거주하였으며 상징적의 칭호로 '도정궁 사손'으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