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형 (r20180326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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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1902년∼1981년)
대한민국서예가. 정치인. 호는 소전(素筌).
1902년 전라남도 진도군에서 출생했다.
1925년 양정의숙을, 1929년에 외국어학원 독어과를 졸업하고, 그해부터 1932년까지 중국의 금석학자 나진옥(羅振玉)[1]에게서 서화와 금석학을 공부하였다.
1930년 조선서화협회에서 특선, 1933년 조선 서도전 심사위원, 1934년 조선 서화협회 이사 및 동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1945년 조선서화연구회 회장, 1947년 고향에 진도중학교를 설립, 이사장이 되었다. 1947년-194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전임강사를 지냈고 서울시 문화위원이 되었다. 1949년-1959년 국전 심사위원, 1954년 1960년 각각 제1대 및 제2대 예술원 회원을 역임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진도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62년 한국미술가협회 이사와 5월문예상 심사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고 동년 예술원장 작품상을 수상했다. 1965년 예술인총연합회 이사장이 되었으며 1970년 국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전라남도 진도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서예가로 서예라는 단어를 최초로 만드신 분이다. 이전에는 서도 혹은 서법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행서와 해서를 쓰다가, 이후에 예서와 전서를 쓰면서 독창적인 문체를 만들어냈다. '소전체'라고 하는 문체는 현재까지도 서예인들 사이에서 호평과 비판이 오가고 있다. 좋아하는 사람은 "추사 이후로 한국 최고의 서예가"라고 칭송한다.[2]



손재형의 소전체 작품들

손재형의 승설암도. 추사의 세한도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여기까지라면 그냥 보통 서예가지만, 이분은 일본으로 반출된 세한도를 되찾아오신 적이 있다. 일제시대에 추사의 세한도는 그를 신봉한 일본인 동양철학자 후지스카 지카시가 갖고 있었다[3]. 지카시는 세한도를 제일 좋아했기에 돈을 줘도 팔지 않겠노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손재형이 포기하지 않고 매일 찾아와서 돌려달라고 요청을 하였다[4]. 결국 100일 동안 찾아와 요청을 하는 손재형의 끈기에 손을 든 후지스카는 세한도를 반환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후지스카의 집은 폭격을 당했고, 보관중이던 추사의 서화와 유품 일부가 이때 소실되었다. 손재형이 아니면 현재 국보 180호인 세한도도 재가 되었을 지 모른다.[5][6]

[1] 중국에서 최초로 갑골문을 체계적으로 해석한 본좌급 학자다.[2] 여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손재형에게 서예를 사사했는데 손재형을 직접 청와대로 초청하면서까지 서예를 배웠다고 한다.[3] 세한도 외에 다른 추사의 서화나 유품을 갖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부가 불타고 나머지는 그의 아들이 한국 정부에 반환했다.[4] 이게 정말 대단한 게, 이때 벌써 미군 폭격기가 이 동네에서 폭탄을 떨구고 다닐 시점이었다.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데 죽을 것을 각오하고 찾아갔던 것이다.[5] 그 후 손재형 선생은 정치에 투신해 재산을 탕진하자 고리대금업자에게 세한도를 담보로 맡겼는데 돈 갚을 길이 없자 세한도의 소유권을 포기했다. 그래서 이 작품을 개성 출신의 갑부 손세기가 사들이고 현재는 그의 아들인 손창근이 소유하고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했다.[6] 단 소유권은 손창근이 가지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