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r20180326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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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時烈
1607 - 1689

송시열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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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의 이조판서 임명장
문묘 및 종묘 배향 6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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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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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정계 입문
2.2. 예송논쟁 속에서
2.3. 몰락
3. 사상과 평가
3.1. 인간성 문제
3.1.1. 수이강 사건
3.1.2. 술이부작 사건
3.2. 허목, 윤휴와의 관점 차이
3.3. 수구꼴통이었는가?
3.4. 허목, 윤휴에 대한 증오
3.5. 정몽주
4. 기타 이야깃거리
4.1. 떡밥
4.2. 정명공주를 평가하다
4.3. 야사
5. 총평
6. 그 밖에
7. 관련 항목


1. 개요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바탕으로 삼고, 사업은 효종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북벌)을 주로 삼으라.[1]

본관은 은진(恩津). 현재의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구룡리 출생.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에서 자랐다[2]. 조선 후기 서인 노론의 영수, 학자, 저술가이자 권신이었으며 그의 후학들에게 공자, 주자에 버금간다는 송자(宋子)라 불리였다. 이덕일영원한 적
유사역사학자 이덕일은 이 사람을 싫어하다 못해 증오하며, 대중적으로도 '노론이라는 수구꼴통의 수장'으로서 까야 제맛인 인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네이버캐스트 송시열 항목의 댓글들만 봐도 이 사람에 대한 대한 대중적 인식이 어떤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읽어보면 애초에 송시열 글 한번 제대로 읽어봤을리가 없으니 학문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은 없고, 송시열이 행한 정책에 대한 피상적인 비난들이다.
시대의 풍운아로[3] 인조부터 숙종까지 4대에 걸쳐 봉직했으나, 결국 카리스마 군주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사사크리를 당했다. 사후 서인노론이 종신집권하면서[4] 추종자인 서인 세력들에게서는 성인(聖人)[5]으로 추대되어 율곡, 김장생도 듣지 못했던 칭호로 송자(宋子)라고 불리기도 했다[6]. 특히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양현전심록』이라 하여 주자의 일생과 송시열의 일생을 비교한 글을 쓰기도 했고, 즉위 이후에는 그를 송자라 하면서 자신의 내탕금과 국비를 지원하면서까지 <송자대전>을 비롯한 그의 문집과 저서들을 간행했다. 숙종을 가장 힘들게 한 사람 중 한명이며, 숙종은 송시열 한사람 때문에 남인과 손을 잡을 정도였다.
평가야 어쨌든 이 사람을 빼놓고 조선 후기의 정치와 사상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당대는 물론 이후의 조선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조선 최대의 문제적 인물답게 상당히 엇갈리는 해석과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정계 입문


1633년,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경릉의 관리인)이 되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직했다. 그러나 이듬해에 다시 봉림대군의 스승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서 있다가 인조가 치욕적인 항복을 하자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이후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한 후 자신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이게 되는데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 진선을 거쳐 사헌부 집의가 되었지만 인조대의 간신 김자점이 영의정에 오르자 거기에 항의해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이듬해 다시 효종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왔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이었고 금방 사직서를 올렸다. 이에 효종은 그를 조정에 잡아두고자 사직 인사를 올리려는 그를 일부러 만나지 않았고 송시열은 사모관대를 벗어 정청 위에 얹어놓고 낙향했다. 그리고 좀 막나가는 행동이었다고 스스로도 인식했는지 돌아가서 사과는 했다.(...) 이후 효종은 10년 가까이 송시열에게 같이 일하자고 졸랐으나 송시열은 요지부동이었다. 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는 송준길이 조정에 자주 있었다. 하지만 그도 걸핏하면 낙향하긴 마찬가지였다.
송시열은 효종 7년 스승 김집이 죽으면서부터 장문의 상소를 통해 현실 정치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상소 하나에 별책부록(...)이 10권이나 딸려올 정도였다. 다만 여전히 사대의 명분을 내세우는 건 마찬가지여서, 옛날 고려송나라와 통했듯이 명나라의 잔존 세력인 남명과 통해야 민심(정확히는 사대부 민심)이 효종을 따를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기대하지 말라는(...) 당대의 주류였으나 지금 보기엔 황당한 상소를 하기도 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결국 남명은 남송보다 더하게 와르르 망해버렸다.
효종 9년이 되어서야 송준길이 조정에 자리를 잡았고 사람들은 뭔가 달라지려나 하고 수군거렸다.
과연 효종 9년 겨울, 송시열을 마침내 효종의 부름에 응답하여 상경했고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로 제수하여 북벌을 맡긴다. 송시열이 북벌에 관심이 없었고 단지 명분론에 입각한 북벌이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기유독대를 보면 효종은 구체적으로 북벌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라고 물으면 송시열은 "임금님하께서 덕을 잘 쌓으시고 학문을 익히시고..."라는 말이 나온다, 이게 성리학적인 명분론이랑 현실이 합쳐져서 나온 것이라는 해석. 효종때의 조선은 황폐하기 짝이 없는데 북벌을 한다는 것은 마치 몸살에 걸린 복서가 시합을 나가겠다는 것과 같으니 별 뜻이 없어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기유독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 「악대설화」후반부의 내용에는 송시열이 '양병과 양민이 서로 방해가 되지 않을 방법'을 묻는 효종의 질문에, 재력을 (사치 등에) 낭비하지 말고 군수로 돌리며, 보오법(保伍法)을 시행하여 누락되는 민정을 없애고, 3명 중 1명은 병사로 만들되 나머지 2명은 포(布)를 통해 그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도록 한다면 농민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그에 뒤이어 이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기강을 세워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국왕이 스스로 사심(私心)을 없애야 함을 언급하고 있다(이는 실제 현실에서는 내수사 혁파 주장과 이어진다). 즉 우리가 보기에는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한 그의 공부하세요는 과거 조광조중종에게 그러했듯이 국왕 스스로가 사심을 없애 각성하고 백성을 돌볼 것을 요청하는 것과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을 감안하면 그를 위선적 북벌론자로 보는 것은 다소 조심할 필요가 있으리라고 판단되며, 그보다는 그 살아생전에는 북벌을 실천하기가 어려우니, 양민(養民)을 통해 국력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는 쪽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위의 해석에서 더 나아가서, 오히려 효종도 북벌을 진심으로 할 생각이 없었고, 단지 왕권과 국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북벌을 이용했을 뿐이며 송시열은 여기에 말려서 이용당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송시열로선 일단 북벌이라는 명분 자체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위에 언급한 신중론을 펼치는 수준에서 효종과 협력해야 했으며, 이 것이 바로 효종이 노린 결과라는 것이다.

2.2. 예송논쟁 속에서


이후, 송시열은 본격적인 정치행보를 시작한다. 서인의 중심적 인물로서 남인의 중심적 인물인 윤선도와 키배를 벌이기 시작하는데 그 발단은 소위 "예송논쟁"이라고 불리는 논쟁에서 비롯되었다.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장렬왕후)가 몇년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나로 조정에서 논란이 일었는데 서인은 기년설, 즉 "1년만 입으면 된다"라고 주장했고 남인은 3년설, "3년동안 입어야 된다"라고 한것. 송시열은 기년설이 명분에 맞다고 주장하며 이를 관철시켰고 남인을 쓸어낸뒤 권력을 장악했다. 좌찬성의 자리에 올랐으나 남인은 송시열이 효종의 장지를 잘못 골랐다고 규탄했고 결국 송시열은 낙향했고 이후 우의정에 제수되었지만 남인측 좌의정 허적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다시 우의정에 제수되었고 좌의정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이후 효종비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다시 자의대비가 몇년 상복을 입을것인가라는 문제가 불거졌다. 처음에 예조에서는 아무 생각도 없이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보고를 올려 현종의 결재를 받았다. 그런데 송시열의 논리를 따르자면 기년복이 아니라 9개월, 즉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지적되자 예조는 허겁지겁 현종에게 알고보니 기년복이 아니라 대공복이 맞습니다. 라고 다시 보고서를 올렸는데 현종이 격노하여 예조 전체를 갈아버리더니 기년복을 입는 것이 맞다고 배수진을 쳤다. 이에 영의정 김수흥을 비롯한 서인 대신과 대간들은 그럼 예법에 안맞는다고 반대를 했지만 현종은 영의정 김수흥을 귀양보내는 등 초강경적인 대응을 보이며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고 3일만에 2차 예송논쟁, 즉 갑인 예송논쟁을 자신의 뜻대로 관철시켰다. 하지만 김수흥의 동생 김수항을 좌의정에 삼는 등 서인들에 대한 피바람을 일으키진 않았으니 아들 숙종과의 결정적 차이다. 어쨌거나 현종은 불과 두달만에 죽음을 맞이했는데 뒤를 이은 숙종이 왕의 행장에 송시열이 행패부려서 소란을 일으켰다는 문장을 넣을 것을 지시했고 송시열의 제자들이 차마 그럴 순 없다고 울고불며 반대하자 분노한 숙종은 서인을 모조리 내쫓고 송시열도 논의를 잘못 이끈 죄를 물어 귀양보내버리니 이것을 갑인환국이라고도 부른다.
귀양 생활 중에 송시열은 청남 계통의 꾸준한 고묘, 안율 요청 때문에 목숨이 오늘내일하는 위험한 처지에 이르지만 김석주가 허적의 서자 허견의 역모를 밝혀냄에 따라 허적, 윤휴, 유혁연, 오시수를 비롯한 청남과 탁남을 막라한 남인의 거물들이 대거 목숨을 잃고 서인이 귀환한 경신대출척[7], 즉 경신환국으로 남인 세력이 실각하자 귀양생활이 풀리고 영중추부사로 임명되어 조정에서 원로대신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때 숙종과 명성왕후는 민망하다 싶을 정도의 온갖 찬양의 문구를 다 담은 편지를 송시열에게 보내며 송시열을 구슬렸고 김수항은 나라의 대소사를 법규에 연연하지 말고 송시열에게 물어 처리하자는 의견을 올려 윤허를 받기도 했다. 이후 송시열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김석주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그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2.3. 몰락


그러나 남인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이번에는 제자뻘인 윤증과 키배[8]를 벌인 끝에 결국 서인 대분열 사태를 맞게 된다. 그런데 김석주가 훈련대장이자 김장생의 손자인 김익훈과 손잡고 남인 허새의 역모를 밝혀내어 남인의 잔여 세력의 뿌리를 뽑으려하다가 실패하는 사건이 터진다.
허새는 남인 중에서도 불만이 대단하던 자로 남인이었지만 연좌제 문제로 고생하다가 김익훈에게 포섭된 김환이 그에게 자신이 역모를 일으켜 복평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사실을 털어놓게 된다. 그는 권대운, 오정위, 민암을 비롯한 남인의 거두들이 자신과 한패라고 주장했는데 그가 역모를 꾸미려 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남인의 거물들이 그와 한패였다는 것은 무리를 크게 만들기 위한 구라였다. 이에 실망한 김석주와 김익훈은 전익대란 남인이 민암, 유명견을 비롯한 남인 거물들과 역모를 꾸몄다고 사건을 조작하기로 했는데 포섭된 김환이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무리수를 두어 전익대 명의의 고변서를 자기네들이 직접 만들어서 승정원에 올린다. 하지만 전익대가 무고를 실토하면서 일을 그르치고 만다. 그러자 젊은 서인들이 권신인 김석주는 차마 건드리지 못하고 대신 김익훈을 증거 조작, 체통 손상, 밀계 혐의로 탄핵했다.
그런데 김석주와 짝짝꿍이 된 송시열이 '김익훈은 내 스승의 아비의 친손으로 형제와 같은 자인데 도움이 못되어 부끄럽습니다.'라고 김익훈을 옹호한다. 그런데 송시열에게 실망한 젊은 서인들이 이에 격렬히 반발하면서 더욱 맹렬하게 김익훈의 처벌을 요청했고 이에 재야의 박세채가 크게 호응한다. 거기에 윤증, 남구만, 조지겸, 유득일, 오도일, 한태동 등의 신료들이 지지하면서 소론이란 새로운 무리가 결성된다. 그리고 이에 대립하여 송시열을 추종하는 김만기, 김만중 형제, 김수항, 민유중 등은 노론이라 불리게 된다.
이때는 송시열에게 실망한 젊은 서인들이 대거 소론에 합세하면서 소론이 압도적인 세를 자랑하게 된다. 김석주는 분노했고 오도일을 비롯한 소론의 젊은 수뇌부들을 숙종을 위협하여 영동으로 귀양보내는 한편[9] 박세채는 글만 읽던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양반이 쇠를 금이라 부르고 도적을 아들이라 일컫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비판했다. 이에 김수항 등 노론이 합세하여 거들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석주가 51세를 일기로 급사하면서 문제는 일단락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인은 노, 소론이 분당되긴 했어도 범 서인이라 칭할만 했는데 이후 회니시비 사건이 송시열의 제자 최신에 의해 조정 문제로까지 번지면서 노, 소론 분쟁은 격화된다.
이후 정계 은퇴 하여 청주 화양동으로 내려가 후진양성에 주력하던 중, 숙종이 28세의 나이로 장희빈에게서 아들을 얻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간 아들이 없던 왕실 입장에서야 대단한 경사이긴 한데 숙종이 백일도 안된 경종을 원자로 봉하려 하면서 문제가 커진다. 이미 서인 일각에선 장희빈과 남인 세력, 그리고 숭선군, 동평군 등이 결탁하여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에 대해 불안을 품고 있었고 이를 지적하다가 박세채, 남구만, 김만중 등이 유배되거나 호된 질책을 듣는등 숙종이 장희빈을 위해선 대신을 벌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조정은 유상운 등을 중심으로 전하 나이도 젊은데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숙종을 만류하려 했지만 숙종은 막무가내였고 경종에게 원자의 명호가 내려지며 장희빈이 이때 희빈에 봉해진다. 그런데 송시열이 송나라 신종의 예를 들면서 반대 목소리를 냈다. 숙종은 격노했고 "너 이 자식, 무슨 속셈으로 이따위 망발을 한거야?"라고 이를 공론화한다. 조정은 "다 정해진 마당에 부당하긴 해도 속셈이 있었겠습니까?"라는 태도를 보였으나 숙종은 "이 자식이 군주를 무시해서 그런거다. 놔두면 군주를 무시하는 무리가 잇달아 생길거다."라면서 송시열을 삭탈관직하여 문외출송한다. 그리고 승정원과 대신들을 갈아치우면서 남인으로 정권을 바꾼다. 당시 숙종은 반대를 무릅쓰고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고 이를 이미 종묘에까지 다 고한 상황이었다[10]. 2월 1일(기해) 1번째기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이 반대 상소를 올린것은 숙종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자책골이었다. 남인 대간은 송시열의 목숨을 요구했고 우선 송시열의 애제자이자 전 영상 김수항이 사사된다.
하지만 숙종은 송시열은 죽여 마땅하긴 해도 절도에 안치했으면 그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잠시 물러서더니 인현왕후 폐위를 문제삼아서 반대하는 소론 신하 박태보, 오두인 등을 사실상 장살하고[11] 남인들의 반대까지 잠재워버린 다음에 장희빈을 중전으로 삼는다. 그리고 마침내 송시열이 목표로 지정된다.
중전 폐비 문제로 유배를 갔다가 다시 명을 받고 상경 중이던 송시열은 국문을 받는 대신 금부도사를 내려보내 사사[12]하라는 처분을 받게 되었고 송시열은 정읍에서 금부도사를 만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한다.
평생을 정치가로 살면서 학자로 살았던 것을 반영하듯 그가 사약을 들이키면서[13][14][15]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남긴 유언은 "천지만물이 생긴 까닭과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길은 오직 직(直)자 한 자뿐이니, 이것은 공맹(孔孟) 이래 전해 온 것이다"와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바탕으로 삼고, 사업은 효종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북벌)을 주로 삼으라"였다.[16] 또한 죽기전 손자에게 자기가 쓴 상소를 나중에 올리라고도 했다. 그의 관은 널빤지로 덧대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효종의 관에 널빤지를 대게 만든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도 그렇게 한다는 의미가 있었다고.

3. 사상과 평가


학문적으로는 당대부터 큰 인정을 받은 대학자이기도 하였다. 단, 현대적 관점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전에 대한 독자적이고 참신한 해석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 있다. 현대에 정약용이 각광받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기존의 주자 중심의 학문체계를 어느 정도 탈피하고 경전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내놓았다는 점을 내놔서 이와 비교해 비판하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비판에 대해 반론도 있는데, 참신하지 않다고 해서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까놓고 말해 공자가 한 것도 어찌보면 주나라 시기의 그나마 남아있는 문물들을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는데... 주자도 그냥 그 때까지 전해오던 학문을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조리 끌어모아 집대성한 다음 본인의 참신한 견해를 바탕으로 정리했을 뿐이지. 마찬가지로 공자도 그 때까지 전해오던 학문을 집대성한 다음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서 새롭게 정리했을 뿐이다. 그리고 현실정치에 아무런 영향도 못미친 정약용이 근대에 주목받은건 식민사관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실학을 의도적으로 격상시켰기 때문이지 다른게 아니다. 물론 참신한 이론을 펼치는 학자가 현대에 존경 받기는 하지만, 인문학 분야에서 기존 학자들의 이론을 최대한 정확하게 분석하고 강해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21세기에도 존경 받는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상당한 성리학 원리주의자로서 철저하게 주자를 존숭하는 주자 중심의 학문을 추구하고 주자의 학문을 더 심화하는 것이 그와 그의 학파의 연구경향이었다. 예를 들어 주희와 제자들의 문답을 모아 놓은 "주자어류"라는 어록집이 있는데 이를 강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좀더 정리된 내용으로 순서와 배열을 바꾸고 재편집한 "주자어류소분"이라는 책도 만들었다.[17] 사단칠정을 "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런데 사단이 이에서 나왔긴 한데 이도 선악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래서 해석에 따라 이황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쪽도 있고 이이를 주자학의 정통에 세우려 하였다는 쪽도 있다.
문제는 이런 원리주의적 성향에 학자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정도로 지나친 과격주의에 권력에 대한 의지가 겹쳐져서 생전에 참 많은 정적을 만들었다는 거고,[18] 왕한테까지도 서슴없이 싸움을 걸정도로 좀 문제가 많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송시열의 문하가 이후 조선후기 권력을 확실히 장악한 탓에 송시열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는 조선시대는 물론 그 반동적 여파가 미치는 지금도 어려움이 있다.이 문서도 그 반동의 반동의 영향이 깊게 끼치는 바람에 다시 그 반동과의 투쟁을 벌어지는 하나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반동의 반동과 반동의 반동의 반동. 반동과 반동이 무수히 중첩된 상태
게다가 학문계에서도 원리원칙에 충실했던 송시열의 제자들이 판을 치는 바람에 성리학의 교조화가 이루어져, 이후 성리학에 대한 다른 시각의 해석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박세당같은 인물을 제거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정확히 말하면 박세당은 사문난적 건으로 귀양갔다가 풀려나서 돌아오는 과정에서 노환으로 사망, 윤휴는 사문난적 건으로 죽은게 아니라 경신환국으로 남인들이 갈려나갈때 같이 사망. 그리고 사문난적은 둘뿐이다.[19] 자세한 건 사문난적 항목 참조
송시열의 벽창호적 기질은 많은 비판을 받아왔지만, 시대상이 어려우면 더 보수적인 사람과 더 개방적인 사람으로 정치판이 극단화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거기에 남송으로 쫓겨내려갔지만 도통만은 지켰다는 주자의 상징성에 당시 오랑캐한테 얻어터졌던 조선을 은근히 동질화하는 정신승리를 일으키면서 더욱 보수적이 되어버린 것. 성리학의 교조화 문제는 원래 좀 교조적인 데다가 유교가 원래 그렇듯 정치학이자 실천학이라 더 현실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점을 이해하면 더욱 좋다.
첨언하자면, 사문난적이란 건 학문적 경직성보다는 정치적 투쟁의 결과로 탄생한 말이었다. 사문난적이라는 말이 처음 나온 것은 서원의 사석에서였다. 그러던 것이 정치적 투쟁 과정에서 점차 상대방을 비판하는 용어로 사용되어간 것이다. 처음 이 말을 들은 윤휴는 서인 쪽에서도 학문적 차이는 있을지언정 윤선거[20] 등 다수가 추천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투쟁이 격화되면서 점점 남인 일반에게 적개심이 커지게 되고, 그에 따라 남인의 이념적 지주였던 윤휴에 대한 적대감 역시 커져가는 것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볼 수 있다.[21] 박세당 같은 경우는 책을 쓰고 10년이 지나 노론 소론 대립이 시작된 때에 사문난적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굳이 말하자면 정치와 학문적 견해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시대에, 학문이 정치적 투쟁에 이용된 경우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환국 이후 족친인 김석주와 결탁한 것은 좋게보기 힘들다. 김석주는 자신의 할아버지 김육의 대동법을 반대한 송시열에게 평소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김육이 죽을때 마지막 올린 상소에서 대동법의 집행을 맡겨야 한다고 한 사람이 송시열, 송준길이다. 그보다는 족친으로써 권세를 부리는 인물과 협력한 게 문제가 되었다면 되었을 것이다. 유학자인 그가 금기를 범하고도 계속 권세를 부리는 모습에 실망한 젊은 소장파들이 송시열 계통의 서인에게서 이탈하여 소론이라는 새로운 정파를 만든[22][23]걸 보면 당대에도 무조건 호의적인 시선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3.1. 인간성 문제


정치척, 학문적 스탠스와 별개로 대인관계에서 상당히 공격적이고 대범하지 못한 모습을 왕왕 보였다. 이경석에게 저지른 수이강 사건과 윤선거 묘갈명의 술이부작 사건이 대표적이다. 두 사건 모두 비판을 대놓고 했으면 모르겠지만 방식이 너무 치졸했다.

3.1.1. 수이강 사건


백헌 이경석은 본래 송시열과 잘 지냈었고, 애시당초 송시열을 조정에 추천한 게 백헌이었다.[24] 송준길과 송시열이 재야 시절에 서울에 오면 하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백헌의 집을 찾아 서로 즐겁게 담소하는 것이었다고 할 정도였다.관련기사
그런데 이후 송시열은 백헌과 윤선도 처벌에 이론이 생겼다 하여 자신의 은인이었던 백헌을 비방하려는 마음을 몰래 가졌고, 한편으로는 삼전도비문을 적은 일을 고깝게 생각하여[25] 백헌이 궤장을 받을 때 글을 구하니 "오래 살고 건강했다(壽而康)"라고 써주었다. 처음엔 그냥 좋은 표현인 줄 알았지만, 현종이 온천여행 갈 때 조정 중신 중에서 아무도 환송을 안 가자 낙향해 있던 백헌이 이들을 까는 상소를 올렸고. 송시열이 반박상소를 올리면서 '수이강'의 정체가 드러난다.[26] 수이강은 송나라금나라에 끌려가서 아첨한 후에 살아남은 손적이란 자의 고사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당시 손적은 금나라 황제에게 항복문을 지어바치면서 온갖 미사여구로 금을 찬양하고 송을 깎아 내렸는데, 이를 들은 주위 사람들이 "너는 그렇게 아첨을 하니 참 오래 살고 건강하겠구나(壽而康)"라고 비아냥 거린 것이다.
이런 조롱을 받으면서도 백헌은 별 다른 반응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27] 어쩌면 그 자신도 별로 떳떳한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백헌이 이 사건을 가지고 얼마나 대인군자의 자세를 보였는지는 백헌의 이후 대처에도 나오는데 백헌의 문집 백헌집 52권의 내용중 하나인 사궤장식감록(謝几杖識感錄)에 따르면 1668년 11월 27일 백헌이 궤장을 하사받는 그림을 그리고 교서(敎書)와 제가(諸家)들의 축시(祝詩), 화시(和詩)를 모아 첩(帖)으로 만들어서 잔치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보내고 한 부는 집안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는 주석이 있다. 이때 은인을 수이강으로 조롱한 송시열의 비방문은 주변사람들이 넣지 않으려 했는데 백헌이 특별히 없애지 말라고 하여 붙여두었다고 한다. 참으로 군자의 자세였다. 그의 문집인 백헌집에 송시열의 비방문이 그대로 남은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이런 백헌의 대처가 송시열을 비판하던 이들이 백헌을 동정하는 여론에 더욱 불을 지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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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술이부작 사건


평생지기였던 윤선거는 병자호란때 죽겠다고 해놓고 혼자 살아남은 일[28]과 남인 윤휴사문난적으로 지목한 송시열의 태도를 비판했던 일 때문에 사후에 무척 배척했다.[29]
송시열의 제자인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사망하였을 때, 죽은 친부에 대한 묘비문을 송시열에게 부탁하였다. 송시열이 자신의 스승이며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던 만큼 이런 부탁은 당연한 것이었다. 어쨌든 이런 미묘한 상황에서 송시열은 분명 윤선거를 좋게 생각하지 않음에도 묘비문을 지어주는 것을 허락했다. 망자의 묘비문에는 좋은 말만 써주는 것이 관례였다. 좋지 않은 말을 쓸 정도로 사이가 안 좋거나 망자를 나쁘게 생각했다면 애초부터 묘비문 짓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송시열은 이를 수락하고서, 박세채가 쓴 윤선거의 행장을 인용했다. 문제는 여기서 술이부작이란 말을 썼다는 것이다.[30]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이렇다. 송시열이 인용한 것이 박세채가 쓴 윤선거의 행장인데, 송시열이 그것을 인용하면서 술이부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는 "박세채가 윤선거를 찬양함이 참 아름답다. 하지만 난 그것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그래도 망자의 묘비문이고, 박세채의 글도 참 좋아서 인용하기는 하겠는데(述而) 내가 쓴 글이 아니다(不作). 하여 나도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둔다." 라는 뜻이 된다. 생전에 있었던 갈등의 원망을 묘비문에 표현한 것이다.
아버지의 묘비문에 이런 표현이 들어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윤증은 이후 몇 번이고 송시열에게 묘비문을 고쳐줄 것을 요청했다. 지은 사람만이 수정도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송시열은 결국 이를 수정해주지 않았다. 이는 송시열과 윤증의 사이가 틀어지는 이유가 되었고, 회니논쟁의 단초가 되었으며, 장차 서인노론소론으로 갈라지는 계기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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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허목, 윤휴와의 관점 차이


예송 논쟁에 관해 살펴보자면 송시열은 조선의 왕족도 일반 사대부와 비슷한 가문으로 보고 왕위는 효종이 계승했지만 효종은 그럼에도 적자 중 차자인 바 장자로 대우할 수 없다고 했다. 송시열과 다른 견해를 보이던 허목은 왕실의 법도는 특별한 법도이며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니 일단 적장자라고 본 것이다. 이는 왕가의 특수성을 부정하는 기호학파와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영남학파간의 학문적 대립, 그리고 효종의 정통성을 둘러싼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예송 논쟁을 다루기 이전에는 소현세자의 이야기를 논할 필요가 있는데, 기실 따지고 본다면 소현세자는 조선왕조실록에서 그나마 독살 가능성이 인정될 정도로 조선사의 역대 세자 중에서는 가장 비명에 간 케이스라 할 수 있고, 민회빈 강씨나 연줄이 있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숙청당하다시피 했다. 당시 정치판에서는 김자점으로 대표되는 주류 서인과 송시열, 김집 등으로 대표되는 재야 서인, 그리고 남인이 있었는데 이 중 재야 서인들은 소현세자에 굉장히 동정적이었다고 한다. 송시열이 소현세자에 정통이 있다고 한 데에는 이제는 주류가 된 당시 재야 서인들의 그러한 동정도 한 몫한다.
그러나 남인들 입장에서 보자면 효종은 적통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효종과 현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발언으로 들릴 여지 역시 충분했다. 특히 소현세자의 아들이 당시로서 생존해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문제는 더 커진다. 그리하여 남인의 행동대장 격인 윤선도가 송시열을 공격했다가 역으로[31] 털렸다.

3.3. 수구꼴통이었는가?


사대와 성리학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완강하고 교조적이었다. 다만 본래 윤휴를 사문난적이라고 일갈했던 당시 송시열이 문제시했던 것은 윤휴의 『중용장구』에 대한 해석 그 자체였다기 보다는 주자라는 인물을 대하는 그의 태도였다. 송시열에게 주자는 공자의 도통을 이은 것으로 여기고 칭송해 마지않는 존재였다. 반면 윤휴는 주자를 유교의 도통(道統)을 이은 성인이라기 보다는 학인의 한 사람으로 간주했고, 이는 당시 조선의 현실을 남송의 그것에 겹쳐보고 있던 송시열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오활(迂闊)한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관련글
한편《송자대전》을 보다보면 송시열이 성리학을 절대화한 수구꼴통, 반개혁적 인물이라는 대중의 생각과는 다른 멘트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아내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썼으며 출근, 외출과 집에 왔을 때는 아내에게 서로 맞절로 큰절을 했다 한다.
여성의 교육을 중요시하고 당연하게 생각하여 여자도 사람답게 살려면 학문을 하고, 학문을 통해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야 된다며 여성 교육을 주장하기도 한다. 주자학을 가르치고자 했는데 송시열이 남자들에게 주자학을 가르치고 주자의 말을 따르라고 했으니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고 오히려 남자들에게 가르치는 주자학을 여자들에게도 가르친, 꽤나 선구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동아시아권에서 '여자는 무학이 상덕'이라는 것이 사대부들의 보편적인 인식이었고, 이는 시대가 지나면 지날수록 더 심화되었을망정 약화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참작해 볼 때 당대 송시열의 사상은 상당히 혁신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671년 송시열이 맏 손자 며느리인 박씨에게 써 준 글과 시집간 딸에게 한글로 손수 지어준 계녀서도 있다.[32] 그는 시집간 딸들과 손녀딸들에게도 계녀서라는 것을 손수 써서 보냈으며, 읽기 쉬우라고 한글로 써서 보냈다.[33] 며느리와 손자며느리, 조카며느리 등에게도 이러한 계녀서를 써서 보냈다.
심지어 "서북 지방의 여자들은 매우 건강하고 민첩하니, 이들에게 포를 쏘는 연습을 시켜...성을 지키게 한다면 남자 병사만 못지 않을 것이다"[34]라며 여군 창설을 주장했는데, 이는 단순히 주장 수준이 아니었고 현종대에는 실제로 여포수 제도라는 흠좀무한 제도가 실제로 존재했다.[35]
송자대전을 보면 송시열은 서북 지방의 백성들이 다른 지방의 백성들보다 군사적으로 뛰어났다고 생각했고, 게다가 당시 서북 지방은 징병을 폐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을 군사적으로 다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다시한번 말하지만 송시열은 여인들이 문 밖으로 나와서 그것도 전투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물론 이를 현대적인 남녀평등의 기준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송시열이 남녀유별로 인해 일어난 당시 조선의 사회적인 통념, 즉 이러한 당시 유학자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넘어서는 제안을 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또한 서얼들에게도 관직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과부의 재혼을 법으로 막아놓는 건 너무 잔인한 처사이므로 부녀자들의 재혼을 허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36]#
또한 송시열은 동시에 이이, 김육으로 내려오는 제도 개혁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내수사[37]를 혁파하기를 주장하고, 노비 제도를 노비 종모법으로 완화(적어도 당시엔 완화다.)를 주장했다. 송시열의 이미지로 흔히 알려진 "대동법 반대"도 초기엔 스승(김집)의 영향으로 반대하던 입장이었지만 실질적 효과를 보고는 적극 찬성하게 되었다. 더구나 김집이나 다른 관료들의 반대론도 지주층의 이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기상조론이나 징세액이 오히려 늘 수가 있다거나, 쌀이 잘 나지 않는 지역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38] 즉, 대동법의 이점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지주들의 이익을 위해 격렬히 반대한게 아니다. (개인적으로도 김집은 김육이랑 무척 잘 교류하는 사이였다.) 다만 대동법에 따른 의견 갈등으로 앙금이 생기긴 했다.
또한 관리의 녹봉을 금전으로 지급하자는 의견도 앞장서서 찬성했으며, 관리의 녹봉이 지나치게 적은 것이 수탈의 원인이 된다는 말을 남긴 적도 있다.[39] 게다가 호포제를 주장, 사실상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부과하자고까지 주장하였다.
송시열의 호포제 시행에 대해서는 흔히 부정적이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조금 좋게 봐주어도 "처음에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본래는 찬성론자는 아니었으나 다만 자신의 라이벌(?) 윤휴가 호포법을 적극 관철하자 이에 영향을 받아선지, 그 이후 자신의 제자 김수항을 필두로 하여 호포법 실시를 관철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족들의 끊임없는 반발로 실현시키지 못했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단 호포제 시행론은 서인 산림이 먼저다. 산림의 유계 등이 사족출포론을 처음으로 논의 제안한 것은 효종 10년 무렵이었고, 김수항과 박세당, 유계 등이 호포론 등 군역제 대변통론을 제시했으나 논의 미숙과 대사헌 강백년 등 대간들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한 것 또한 이 무렵이었다.
이 당시 윤휴는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상태였고,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유계의 호포론 논의에 비해서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그의 호포론 논의는 숙종 초년에 출사한 그가 북벌론을 적극적으로 부르짖으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건의 전후 관계를 통해 라이벌 의식에 기인, 자극을 받았다는 식의 설명이 이루어진다면 도리어 윤휴가 서인계 산림에게 자극을 받았다는 식의 설명이 더 적합할 것이다. #관련글 (해당 글에서 함께 제시되고 있는 이이의 입장 변화를 본다면, 대변통과 소변통 문제를 이해관계 문제, 내지는 의지의 약함 문제로 환원하고 마는 것이 얼마나 섣부른 판단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진보주의자 이미지가 강한 이이가 입장을 바꾸면 "시대의 한계로" 돌려지지만 수구꼴통 이미지가 강한 송시열 등이 입장을 바꾸면 "그네들 자신의 의지 문제"로 환원되는 것은 무릇 잘못된 것이다.) 다만 유계와 산림의 호포론이 송시열, 송준길의 적극적인 지원 사격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아쉬워 하는 견해도 있다. 송시열이 적극 호포제 도입에 나섰다면 김육의 대동법처럼 얼마든지 자리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호포제는 일단락 하고, 이외에도 송시열은 청나라를 본받아 수차(물레방아)를 활성화 하자는 말도 있었고,[40] 일본과의 무역을 활발히 하여 포를 많이 구입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무과의 궁술 시험을 포병 시험으로 바꾸자고 주장했으니, 이완보다도 시대를 앞서 본 셈.
또 그는 스스로를 벌레라고 자학하면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차피 이 말은 성리학의 거두인 정자가 한 말을 그대로 읊은 것이므로 그의 보수적인 가치관을 잘 드러내는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발언으로 어떤 이의 성향을 파악하고자 한다면 그 맥락을 깊게 살펴야 한다.

신은 듣건대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기한(祁寒)과 서우(暑雨)를 무릅쓰고 농부들이 농사지은 곡식을 내가 얻어 먹고 있는데, 이처럼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니 그야말로 이 천지간에 하나의 좀벌레라 하겠다.’ 하였다 합니다. 신처럼 쓸모없는 자가 천지 가운데 헛되이 살면서 한 가지도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앉아 농민이 생산한 곡식을 먹으니, 이미 좀벌레 중에서도 더욱 심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당시 조선은 전염병과 기근으로 10명 중 1명이 죽어나가는 시절이 있을만큼 사회경제적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정부와 지식인 등 실제 정치 영역에서 지배계층의 역할은 세금 제도를 개혁하거나 적극적인 진휼을 통해 백성의 삶을 구제해 주는 영역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즉 이런 맥락에서 송시열은 '외양', 즉 북벌의 전제로서의 '내수', 그리고 그 내수의 전제로서의 '정심'을 강조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애초에 이런 현실에서 당장 북벌을 실행에 옮기자고 주장하는 게 이상하지 하지만 효종이 적극적으로 밀어주었음에도 적극적으로 정책을 지향하진 않았다는 점에서 한 시대의 경세가로 보기에는 아쉬움이 크다.
사실 수구꼴통 성리학자 이미지는 송시열의 생전 시기에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길 송시열이 상경하자 송시열이 화폐와 돼지 사육을 폐지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했다. 그 때 송시열은 상경해서 그것은 오해이며, 오히려 상업을 발전을 위해 화폐 유통을 촉진해야 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조세의 금납화를 제시했다. 거기에 더해, 돼지 사육 역시 소를 죽이는 폐단을 감소시키므로 오히려 권장해 마땅하다는 주장을 했다. #

3.4. 허목, 윤휴에 대한 증오


일단 예송논쟁 초기에 송시열은 허목과 윤휴의 주장을 이견으로 접수는 했다. 그러나 윤선도가 자신을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 역적으로 규탄한 뒤, 윤휴가 이에 동조하거나 묵인하고, 허목은 아예 송시열을 사형에 처하라는 여론을 조성한뒤 허목 자신도 송시열을 사형에 처하자는 상소를 여러번 올리게 되면서 송시열의 태도와 행동은 경직되고 만다. 자기를 죽이라고 하는 사람을 증오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거지.
그래서 송시열의 후학들은 윤휴를 참적(讒賊), 적휴((賊鑴), 흑수(黑水)라 불렀고, 허목은 독물(毒物), 독극물, 연인(漣人), 또는 연한(漣漢), 지비공(紙鼻公) 또는 지비옹(紙鼻翁)이라 불렀다.[41]

3.5. 정몽주


정몽주의 극렬 빠(...)로 유명하다. 조선이잖아
당시 정몽주의 후손이 포은집을 중간하자 서문을 써주는데 그 내용은 그야말로 정몽주에 대한 찬양으로 넘친다. 그래서인지 그 종가에 대해서도 그야말로 오지랖 넓게 간섭하여 제사 문제 등에서도 이런저런 조언을 했으며, 후에 종손이 자손 없이 죽자 입양 등의 문제에 끼어들었는데 자신의 제자로 정몽주의 직계 후손이었던 정찬휘라는 인물을 종손으로 올리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덕분에 숙종~영조 시대에 종가의 후사문제는 조정에서까지 논의가 되며 복잡한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했다. 자세한 것은 연일 정씨 항목 참조.
그래서 당시 유림에서 정몽주가 받은 존경심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 강화에 이용하려고 했다는 비판도 받았으며 남인과 대립하기도 했다. 후에 정찬휘가 스승의 잘못에 연좌되어 처벌될 위기에 처하자 '차라리 내가 벌을 받을지언정 포은 선생의 대가 끊기게 할 수 없다.'라며 반발하기도.
사실 정몽주에 대한 유림의 존숭은 일반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에 송시열이 유난했던 것은 아니나 그가 워낙 당시 정국에 끼친 영향력이 강해서 좀 더 돋보이는 면도 있긴 하다.

4. 기타 이야깃거리



4.1. 떡밥


송시열의 지나친 권력 의지 때문에 일각에선 심지어 효종과 현종을 송시열이 독살한게 아니냐는 떡밥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근거는 희박하지만[42] 왕과도 거침없이 싸움을 벌인 송시열의 포스가 그만큼 대단했다.. 정도로만 보면 되겠다.[43]

4.2. 정명공주를 평가하다


공주는 부인의 존귀함에 걸맞게 겸손하고 공손하며 어질고 후덕해 오복을 향유했다.

정명공주와 동시대를 살아간 송시열의 평가.
송시열의 묘지 글대로라면 정명공주에게 오복은 ‘존귀함, 겸손, 공손, 어짊, 후덕’이었다.

4.3. 야사


야사에서는 대단한 대인배여서 이경석과의 일화를 보면 대인배라기는 좀...자신을 몰라보고 싸다귀를 갈긴 무관을 중용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송시열은 비오는 날 주막에서 우연히 만난 무관과 장기를 두다 통성명을 하게된다. 그 전까지 무관은 그를 알아보지 못해 거만하게 굴다가 그가 송시열이라고 하자 당황하지만,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어디서 감히 송시열 대감 행세를 하냐며 싸다귀를 갈기고 튀었다. 하지만 송시열은 오히려 재치와 배짱에 감탄해서 얼마 뒤 그를 중용하려했으나 이미 죽은 후여서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44] 이러한 종류의 야사는 웬만한 조선시대 거물들이라면 다 하나씩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신빙성은 별로 높지 않다.
또한 힘이 장사라고 하여 장정 여럿이서 겨우 드는 비석을 혼자서 이리저리 돌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몸이 안좋아 누웠을 때[45] 정적이자 의학에도 능통했던 남인의 거두 미수 허목(許穆)허목사가 아니다에게 처방을 부탁했는데, 비상을 처방하자 모두가 먹지 말라고 했는데도 그 자리에서 비상을 먹고 병이 나았다는 일화도 있다. 심지어 송시열의 아들이 비상을 빼고 약을 지어온 것을 알고 '허미수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다시 가서 약을 지어오너라.'라고 꾸짖고 허목의 처방대로 병이 낫자마자 그에게 아들 대신 사과했다는 후일담도 있다.[46] 하긴 비상(비소)이 항상 독한 것은 아니니까.[47] 왠지이 사람들이 떠오른다. 송시열은 건강관리를 매우 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든이 넘어서 사사되기 전까지 건강하게 살았던 그는 소식(少食)의 습관을 가졌다고 한다.(우암 송시열이 말합니다, “여기 사약 한사발 추가요” 바로가기)잘 보면 미키 사야카도 있다

5. 총평


오늘날에도 기호 지방(경기도/충청도)에 잔존하는 유림들에게는 말 그대로 '송자'로 대우된다. 왜냐하면 기호 지방을 기반으로 하는 서인 - 노론 당파가 조선 말까지 집권하는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송시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조선의 기호학파 유림 한정이며 외국에서까지 성인으로 통하진 않으니 주의. 게다가 학맥상의 최고격 스승은 당연히 지폐에까지도 얼굴이 올라간 이이이다.
그와는 반대로 동인 - 남인 당파의 지역 기반이었던 영남에 잔존중인 유림층[48]에게는 사문난적으로 취급되었으며, 영남 유림층은 송시열을 송자라는 어감과는 반대로 '시열이'(…)라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담은 단어로 지칭한다. 심지어 개 이름을 '시열이'라고 짓기도 했다고.[49][50] 심지어 처음 만난 사람의 성이 은진 송가일 경우 말도 섞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지은 유홍준씨는 남인의 본거지였던 안동지역의 노인들과 대화하는 사람이 만약 자신이 은진 송씨인걸 밝히면 은근히 분위기가 험악해진다고 말한다.
이 사람의 9대손이 그 유명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송병준이다. 서출이었고 다른 방계 송씨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다고는 하나, 혈통상 송시열의 직계 자손임은 맞다.
문재인 정부의 첫 국방장관이 된 송영무가 송시열의 13대 후손이다. 키도 크고 거구에 얼굴도 송시열의 초상과 비교해보면 많이 닮았다.
또 이 사람이 세운 괴산에 세운 화양서원과 이 사람의 유지로 세워진 만동묘는 조선 후기 서원의 횡포를 논할때 빠지지 않는 곳이 되었다. 당장 당대 노론 유림의 막강한 위세에 지역 수령들 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 최우선으로 철폐를 명령받은 곳이기도 하다.
이후에도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쳤는지 정조 때엔 송시열의 후손인 송덕상이 홍국영과의 결탁을 이유로 파직되었는데 전국에서 송덕상을 처벌한게 잘못되었다고 하여 한동안 큰 파란이 일었다.

6. 그 밖에


조선왕조실록에서 역대 국왕들을 제외하면 그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된 인물이다. 살아있을 때에는 1000여번, 사후에도 2000여번 이상이나 언급될 정도이다.
한명회, 윤원형, 박원종, 허목, 홍국영, 흥선 대원군 등과 더불어 조선의 파벌 주도형 정치인의 한사람.
시드노벨에서 송시열을 모에화(...)한 라이트 노벨이 2014년 8월 1일에 발매되었다. 제목은 <모애모애 조선유학>. 게다가 조선 최고의 거유(...)라는 듯. 벌써 은진 송씨 가문 홈피에 이거 괜찮느냐 문의한 사람도 있다. 까임방지책인지 송시열(宋始悅)로 한자 표기를 바꿔놓았지만 실상 눈 가리고 아웅. 게다가 유학자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에 팬티가 보일 만큼 심한 노출도를 자랑하는 기모노를 입혀놨다고 까이는 중(...). 역사카페에서는 상당히 의견이 분분한 상태. 그래도 상당히 충격과 공포에 벙찐 데다 개드립인 줄 알았다고... 참고로 정말 나오면 분서 인증(!)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결국 진짜로 분서인증 했다.급하면 2분경부터
  • 그러나 한국 복식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저 옷이 전통 한국 복식의 면모가 분명 있으나 허리에 띠를 두르는 오비(기모노 허리띠)가 나오니 무리수다. 한국에 대대라는 허리띠가 있지만, 허리띠 위에 하얀 끈을 두르는 형상은 아무리 우기더라도 오비에 가까운 형상이다. 또한 논란을 잠재우기란 무리니 현재의 주요 쟁점은 굳이 송시열이란 이름을 쓴 무리수, pv와 표지 일러스트 문제 때문이라 내용이 잘 나오더라도 현상유지, 아니라면 최악의 결과가 나타날 확률이 높다. 결국 시드노벨은 7월 28일 등장인물의 이름을 변경한다는 공지를 내놓았고, 바뀐 이름은 '송시연'(...)
  • 다만, 이름의 경우 작가가 당초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는 얘기가 있어서, 시드노벨의 노이즈 마케팅이란 해석도 있다.
90년대 후반에 효종의 북벌을 주제로 한 전략 시뮬레이션 '잃어버린 제국'에서 이완과 함께 영웅 유닛으로 등장한 전례가 있다. 여기서 송시열은 무기가 큰 붓이고 황소를 타고 다닌다.
대체역사소설 천윤의 비사에서는 김상헌과 마찬가지로 원래역사와 달리 보수꼴통에 문제있는 인물로 나오며 암군 인조의 명으로
교사 자격으로 성경(심양)에서 봉림대군을 왕재로 만들려한다
시집가는 큰딸에게 교훈으로 써주라며 써 준 <우암선생계녀서>(우암계녀서尤庵戒女書)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 소경(여기서는 법사를 말한다)들이 하는 기도는 어쩔 수 없지만 무녀나 화랭이가 굿하는 집은 머잖아 상놈이 될 집안이니 굿구경 가지 말라는(...) 내용이 있어 충청도 지역에서 경을 읽는 앉은굿이 발달한 게 이 사람 영향 아니냐는 설도 있다.[51]
KBS사극 <장희빈>에서는 이순재가 연기했다.

7. 관련 항목


[1] 죽기 전 수제자인 권상하에게 남긴 말이다.[2] 송촌동(宋村洞)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바로 이 송시열송준길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동네에 세워진 아파트 단지 이름은 선비마을이다. 선비마을 3단지 맞은편에 송준길의 호를 딴 '동춘당 공원'이 있는데 송준길 선생의 고택도 있다. 그리고 송촌동 근처에 작은 야산의 이름도 어르신들은 송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3] 이전 항목에는 허균 못잖은 풍운아라고 적혀있었는데 당대의 위상으로보나 조선사에서의 비중으로보나 비교 자체가 송시열의 굴욕이다. 허균은 현대와서 쓸데없이 과대평가 되는 인물로 실상 이이첨의 개에 불과했다.[4] 세도정치를 한 홍국영 일파나 경주김씨 김귀주가문, 안동김씨 김조순 김문근 가문, 풍양조씨 조만영 가문도 모두 당색으로는 노론이었다. 다만 그때쯤 되면 다른 노론들마저 밟아버리고 족벌체제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5] 물론 조선 한정. 같은 유교 문화권이라 해도 타국에선 성인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퇴계 이황의 경우는 중국의 사상가 량치차오에게서도 성인 대접을 받았다.[6] 비슷하게 퇴계 이황도 추종자들로부터 이부자(李夫子)라 불리기도 한다. 이자가 따로 있었기 때문에.[7] 庚申大黜陟 중 출척이란, '못된 사람을 내쫓고 착한 사람을 뽑아 씀'을 의미한다. 왕정이 폐지되고 민주국가가 들어선 마당에 '누구는 못된 놈이고 누구는 착한 놈'이란 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국내의 역사적 사건을 편향되게 바라보는 것으로서 옳지 못하다. 정국의 급격한 변화를 의미하는 환국이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표현이다. 관련자의 후손들이 의도적으로 '출척'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라면 족보에 도금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8] "회니시비(懷尼是非)"라고 한다. 송시열이 살았던 '회'덕('懷'德)과 윤증이 살았던 '이'성('尼'城)의 머릿글자를 딴 것.[9] 숙종이 김화로 보내려고 했는데 김석주가 너무 가깝다며 영동의 아홉고을중 하나로 정하자고 했다.[10] 종묘사직에 고한다는 것은 선대 임금과 왕비들을 모신 사당인 종묘와 조선의 지신(地神)과 오곡의 신을 모신 사직에 제사를 지내며 고한다는 것인데, 이는 오늘날 헌법을 제정 또는 개정하고 국민에게 공포하는 것과 같거나 그 이상으로 엄중한 정치적 행위이다. 따라서 종묘사직에 고하기 전에 떠드는 것은 어떻게든 허용되더라도, 이미 고한 후에는 절대로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11] 장살도 그냥 장살이 아니라 아주 혹독한 고문을 해대고 난리굿을 피웠다. 단 이떄 기록을 보면 박태보와 오두인의 절개와 의리를 강조한걸 보면 서인측의 윤색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12] 이 처분에 대해 남인들이 복수심에 불타서 조사도 없이 그냥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차피 송시열의 죽음은 피할수 없으니 80 넘은 노인이자 상대 당의 영수라는 것에 대한 배려로 마지막에 갈 때 국문을 당하는 것만은 피하게 해준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송시열의 존재감을 생각하면 후자일지도 모른다.[13] 참고로 이 사람은 사약을 3번이나 마시고 나서야 죽었다. 흠좀무.[14] 하지만 사실 보통의 경우에는 사약을 세번이나 먹게 하지 않고 한번 먹고 안죽으면 활줄로 목을 졸라 죽이는게 보통인데 송시열은 노론의 거두인 만큼 목졸라 죽일순 없었기 때문이었다.[15] 실제로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사사된 사람들 중의 반 가까이 되는 사람들은 사약이 통하지 않아 활줄로 교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16] 이것은 수제자인 권상하에게 한 말이다.[17] 송시열 말년에 작업에 착수해서 후손들과 제자들까지 대대로 작업에 참여하여 결국 완성했지만 인쇄하지는 못하고 필사본으로만 남아 있다.[18] 예송논쟁 때 치열한 키배를 벌인 상대인 윤선도와 허목, 사문난적으로 몰아버린 윤휴, 제자였다가 회니시비로 대립한 윤증, 현종 때 승지로 있으면서 계속 태클을 건 서필원, 남인의 영수 허적 등...그런데 윤선도 같은 경우는 그 쪽이 먼저 싸움을 걸었기 때문에 할 말이 없다. 윤증이나 허적 역시 그에 동조한 적이 있기도 했고...송시열은 처음에는 남인 집안과 통혼을 할 정도로 남인에 대해서는 악감정이 없었으나 예송논쟁 당시 극딜을 당한 이후로는 오늘날의 과격성향을 보이게 되었다. 대동법과 관련된 논쟁에서 처음에 일부 대립하기도 했던 김육과 그 아들 김좌명과의 관계는 원활하게 끝났다. 김육은 자신의 사후에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송시열과 송준길이라고 할 정도였다.[19] 아이러니하게도 송시열의 후학이 조선 정계에서 독주하게 되는 현상을 초래한 인물은 다름 아닌 송시열을 죽인 숙종이다. 숱한 환국 끝에 결국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하는 노론의 손을 들어주었으니...뭐 사실 숙종때는 노론이건 소론이건 동인이건 잦은 환국으로 몇번씩이나 갈려나가긴 했다(...).[20] 송시열의 절친한 친구이자 서인 학풍의 중요인물, 그리고 윤증의 아버지. 회니시비와도 얽혀있다.[21] 살때는 평이 좋은데 죽어서는 무진장 나쁘다가...남인 집권기엔 좋아진다.[22] 젊을 少다. 젊은 서인들이 대거 이탈해버렸다.[23]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은 김익훈 두둔 건이었다. 소인배에다 뇌물밝히고 역모 조작질이나 일삼는 김익훈을 남인과의 정쟁에 이용하려고 데려온 데에 서인 소장파들의 불만이 엄청났었는데 여기에 송시열이 불을 지폈다. '젊은 애들이 뭘 몰라서 그런다'라고 김익훈을 두둔했던 것이다. 소장파는 폭발하여 '송시열이 노망났다'며 들고 일어섰고 즉각 분당을 선언했다. 이 사건은 송시열의 빼도박도 못하는 흑역사이기도 하다.[24] 일찍부터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던 김집이나 십여세나 아래인 서인 산림들인 송시열, 송준길 등을 만나 나이를 떠나 고담준론을 펼쳤던 백헌은 인조 반정 이후 자신들이 임금을 세웠다는 말을 공공연히 입에 담는 등 공신들의 특권과 전횡을 보고 분개하여, 김집, 송시열, 송준길의 학문과 덕행을 인조에게 알리고 적극 천거하여 관직에 등용하게 했다. 이로써 송시열, 송준길 등은 반정 공신들의 전횡과, 인조의 뜻에 영합하려는 일(정원군의 원종 추숭론 등)에 적극 반대하고 소현세자민회빈 강씨의 복권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반정공신들의 반격과 반발에 대비해 백헌은 산림 학자들을 적극적으로 후견해주었다.[25] 송시열은 호란때 가족을 잃어 청나라를 증오하는 마음이 강했다.[26] 당시 송시열은 온양 근처에 살았는데 백헌이 자기를 깐 줄 알고 쓴 것이라고도 한다.[27] 자신의 사직을 청한 것도 있긴 하다.[28] 윤선거는 평생 이 일을 부끄러워하여 이후 다시 출사하지 않고 향리에서 후학 양성에만 힘썼다.[29] 송시열의 큰형 송시희는 1627년 정묘호란 때 전사했고 형수 김씨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다 뒤따라갔다. 아버지 송갑조는 국치를 당한 슬픔에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상처가 더해져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종형 송시영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목숨을 끊었다. 호란으로 가족을 잃은 송시열 입장에선 죽자고 결의하고 다른 선비들과 부인까지 죽었는데 아버지 핑계대고 살아나온 윤선거가 곱게 보일리가 없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당당하게 교류를 끊거나 하는것도 아니고 평생을 친하게 지내놓고서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묘갈명으로 불만을 표시하는것은 치졸하다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 그리고 윤선거를 친구로 받아들이고 교류할때 송시열은 윤선거가 혼자 살아나온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정말 그게 곱게 안보인게 원인이라면 교류를 처음부터 거절하는것이 옳은 방식이지, 죽은 다음에 고인을 뒤에서 씹는건 명색이 대유학자라는 사람이 할 짓은 아니다.[30] 망자를 추모하며 쓰는 묘비문의 경우, 다른 사람의 평을 인용할 수는 있다. 오히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더 좋은 평을 인용함으로써 추모와 함께 저자의 겸손을 드러내는, 말 그대로 술이부작의 정신을 드러내는 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망자의 묘비문에 다른 사람의 망자를 찬양하는 아름다운 글을 인용해 놓고, 술이부작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된다.[31] 당시 남인은 세가 미약했고, 콩가루였던 서인에 비해 그저 비교적 단결력이 나았다는 점 때문에 비중을 차지한 정도였다.[3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26436[33] 이전 문서에는 '당시는 한글이라 하면 언문이라며 폄하하던 분위기가 남아있던 시대였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언문이 정말로 '폄하'의 표현이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당대에 이미 한글이 상층 사대부에서 부녀자들의 소통 수단으로 널리 쓰이고 있었고 남편이 부인이나 딸에게 편지를 쓰거나 소설을 지어줄 때도 한글을 쓴 것을 고려하면, 한글로 편지를 쓴 것 자체가 특출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34] 송자대전 제131권[35] 현종개수실록 12권 5년 12월 30일 1번째 기사[36] 과부들의 재혼은 허용은 되어있다시피하나 재가녀자손금고법(재가한 여자의 자손을 등용하지 않는 법)에 의해서 거의 불가능했다.[37] 왕실 재산을 따로 관리하는 기관으로, 이 즈음 되어 폐단이 많았다.[38] 공납을 쌀과 무명으로 걷는것이 대동법인데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수송이다. 당시에는 세금납부란 서울까지 수송하는것 까지 포함된다. 그냥 관아에 쌀냈다고 끝이 아니다. 그래서 쌀과 무명을 걷는 대동법은 백성을 더 힘들게 할수있는데, 예를들어 한 지역의 공납품이 꿩 5마리라 하고 토지가 100결이 있다고 하자. 공납제에 의하면 꿩 5마리를 수송할 사람 한명이면 되지만 대동법을 시행하면 200말(=20가마)을 수송할 사람 네다섯명은 필요해지고 백성들의 수송부담이 높아진다.[39] 일차적으로 녹봉이 늘어나면 수탈이나 부정부패에 대한 유혹에 덜 흔들릴 것이고, 또 걸렸다가는 좋은 보수를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덜 감수하려 할 것이므로.[40] 이는 훗날 박제가도 주장하게 된다.[41] 지비공이나 지비옹이란 송시열과 송시열의 제자들 중 허목을 부를 때 그나마 비교적 온건한 표현이었는데, 이는 허목이 평소에 축농증이나 비염 증세가 있어 코에 종이나 휴지를 붙였던 것을 두고 비꼰 것이다.그러니까 '코찔찔이' '코흘리개'라고 부르는 게 온건한 거라고?[42] 이런 주장을 밀어붙이는 사람이 이덕일이라서 더 근거가 희박하다. 더구나 송시열은 왕이 바뀔 수록 입지가 줄어드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효종이라면 몰라도 현종은 좀 상황이 다르다. 현종시기에 송시열은 예송논쟁 패배로 떡이 된 상황이었다. 더구나 예송 논쟁이 건드린 것은 현종의 아버지 효종의 정통성 문제. 그래서 2차 예송이 끝난 다음의 송시열의 입지는 '주인을 문 개'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원래는 기밀에 붙여야 할 기유독대 내용을 공개한 것도 송시열이었다. 기유독대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효종에 대한 본인의 충성심을 반드시 인정받아야 하는 신세일 정도였으니 독살설은 사실이 아닌듯하다. 애초 효종,현종의 사망 원인은 종기가 많이 차지한다.[4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현종편에서 '산당계 인사들은 그를 추어올리기 바빴다. 충성 경쟁을 하듯이;라고 할 정도면...[44] 흥선대원군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내려오며 이쪽은 상대가 진짜 이하응인 걸 알고도 모른 척 한게 아니라 체통을 지키라고 싸다귀를 날렸다고 하며, 그 역시 나중에 대범하게 넘어갔다고 한다.[45] 원인은 평소에 건강 관리를 한답시고 아이의 소변을 마시는일이 잦았는데 그 때문에 체내에 노폐물이 쌓였던 것.[46] 혹은 아들이 비상을 빼고 지어온 약을 먹었을 때는 낫는 듯 하다가 다시 병이 도졌는데, 송시열의 아들이 허목에게 가서 사죄하고 다시 한 번 처방을 받아와 그대로 만들어 먹이자 이번에는 나았다고도 한다.[47] 비상은 흔히 사약의 재료로 알려져 있지만, 독이 아니다. 양 조절에 실패하면 부작용이 큰 약재 중 하나일 뿐이며, 체질에 따라서는 아무리 마셔도 안 죽는다! 송시열 본인도 입천장을 긁어낸 뒤 3사발이나 마신 뒤에야 겨우 죽을 수 있었다.[48] 이 사실만 보아도서인 - 노론=경상도라는 주장이 왜 잘못되었는지 알수 있다. 심지어 세도정치의 폐단이라는 안동 김씨도 따지자면 서울의 장동 김씨다. 그밖에 충청도를 기반으로 한 서인, 노론 계열과 소론으로 유명한 노성 윤씨도 충청도 계열이고, 그밖에 김만기, 김만중, 김익훈의 집안은 광산 김씨들로 경상도와는 관련성이 멀다. 이는 과거의 역사를 현실의 정치판에 끼워 맞추려고 한 대표적인 폐해.[49] 이름 가지고 놀리는 게 뭐 그리 대수냐고 할 수 있겠지만, 고대 동양권의 발상에서는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괜히 자니 호니 관직이니 존칭이니 하면서 인칭표현이 극도로 발달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름을 대놓고 부르는 경우는 집안 어른이 연소자도 아니고 아주 어린 아이를 부른 경우 정도가 고작이다. 때문에 그 외의 경우면 그 자체가 엄청난 모욕으로 얕잡아 내려보는 격이 된다.[50] 그래서 후에 영조 초기에 노론들이 소론 영의정 이광좌를 두고 "광자"니 "광"(...)이니 하면서 어린아이까지 찧고 까불었던 것이고, 이게 영조의 격노를 샀던 것이다.[51] 참조 학술자료:<앉은굿 무경>안상경 저, 민속원 P.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