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한드로 비야누에바 (r20180326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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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카를로스 알레한드로 비야누에바 마르티네스
(Carlos Alejandro Villanueva Martínez)
생년월일
1908년 6월 4일
사망년월일
1944년 4월 11일
국적
페루
출신지
리마
포지션
포워드
신체조건
198cm / 80kg
등번호
-[1]
소속팀
테니엔테 루이스(1926)
알리안사 리마(1927-1943)
국가대표
11경기 / 6골(1927-1938)
감독
알리안사 리마(1940)
알리안사 리마(1941)
호스
1. 생애
1.1. 선수 생활
1.3. 사망
2. 플레이 스타일&평가
3. 뒷이야기
4. 수상
4.1. 클럽
4.2. 개인


1. 생애



1.1. 선수 생활


알레한드로 비야누에바는 1908년 리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카예 데 말롬보에서 보낸 그는 소년기는 바리오스 알토스의 마라비야스[2]거리에서 보냈다. 지금은 없는 클럽인 테니엔테 루이스에서 첫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1년 후에는 알리안사 리마에서 활동하였다. 그 당시 알리안사 리마는 호르헤 사르미엔토, 후안 발디비에소 등 페루 최고의 스타들이 뛰고 있었고 26연승과 시즌 평균 득점 4.8 등 페루 리그 내에서 독보적인 팀이었다.
1928년 비야누에바는 페루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리는 골을 넣었는데, 이것이 페루에서 최초로 기록된 바이시클 킥이라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 슛을 비야노바 골 또는 tiro caracol. 달팽이 슛으로 불렀지만, 나중에는 찰라카로 불렀다. 하지만 이듬해인 1929년, 알리안사 리마 팀이 쪼개지는 바람에 다른 팀에서 뛴 사르미엔토와는 달리 공식 경기를 뛰지 않고 지방의 운동장에서 시범 경기만 뛰었다.
1931년부터 알리안사 리마는 아예 페루 리그 내에서 최종보스로 군림했고, 1934년에는 27경기에 출전, 115골을 기록하여 탈 페루급 선수임을 보여주었다.
후안 발디비에소, 테오도로 페르난데스 등과 함께 참가한 칠레 투어에서 그의 기술로 칠레 관중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 당시 페루 선수들은 큰 활약을 보여주었고, 이 팀은 올림픽에서도 축구계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비야누에바는 무질서하면서도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에 30년대 후반부터는 기량이 쇠퇴해갔으며 선발 명단에서 그의 이름은 점차 빠져갔다. 그래도 1943년까지 질병들 때문에 고생하면서도 알리안사 리마에 머물렀으며, 이 동안 총 99경기에 출전하여 371골을 넣었다고 전해진다.[3]

1.2. 국가대표


192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데뷔하였고 그는 1골을 넣었다. 그리고 초대 월드컵에도 출전하여 2경기를 모두 뛰었지만 페루는 2경기에서 모두 패하며 3조 최하위로 탈락하였다.
그의 국가대표팀 커리어의 하이라이트는 1936년 올림픽이었는데 용감하면서도 깔끔한 플레이로 핀란드오스트리아를 연파하며 4강에 갔다. 이 동안 비야누에바는 총 4골을 넣었지만 페루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탈락하여 기록행진은 여기에서 마무리되었다.
비야누에바는 총 11경기에 출전하여 6골을 기록하였다.

1.3. 사망


비야누에바는 1944년, 35세의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2. 플레이 스타일&평가


비야누에바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알리안사 리마와 페루 대표팀에서 가장 중요한 스트라이커였다.
198cm의 큰 키도 충분히 위력적이었지만[4] 페루 최초의 바이시클 킥 사용자로 알려져 있을 만큼 몸이 유연해서 별명이 호스[5]였다. 그리고 볼 컨트롤까지 뛰어났던 것은 덤.
알리안사 리마의 홈구장이 있는 라 빅토리아 지구의 다른 이름이 바로 그의 별명인 망게라이다.

비야누에바는 축구계에서 가장 뛰어난 설계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천재성과 재능을 가졌다. 나는 그의 게임의 위대함에 감탄했고, 내 어릴 적 우상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에 정신적으로 고통 받았다. 의지를 갖고 공을 지배했고, 축구로 행하는 마술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루이스 구스만(전 알리안사 리마 선수)

몇 년을 그의 곁에서 뛰었지만 특별히 외국 그리고 내가 그의 능력을 칭찬할 수 있는 곳에서 나타나는 신성한 능력들, 위트와 명랑함. 그의 위대함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나의 최고의 성공의 맛을 보게 해준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나는 그를 그리워하는 것은 가장 뛰어난 축구 선수였기 때문이라 믿는다. 그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고 그것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

테오도로 페르난데스

알레한드로 비야누에바.. 진정한 마스터고 훌륭한 선수이자 친구였죠. 난 그의 곁에서 뛰며 많은 것을 배웠고, 놀랄 정도로 현명했었죠. 난 망게라가 그의 시대에서 가장 뛰어났다고 생각하고, 정확한 패스와 지배능력도 있었죠. 알리안사 리마는 특별했어요.

후안 키스페(전 알리안사 리마 선수)


3. 뒷이야기


  • 테오도로 페르난데스와는 절친으로, 페르난데스는 비야누에바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였다.
  • 1929년, 알리안사 리마 선수 중 일부가 경제적 문제로 대표팀 참가를 포기해서 징계가 떨어졌다. 어쨌든 알리안사 리마 선수들이 참가를 포기한 코파 아메리카에서 페루 대표팀은 말 그대로 깨박살이 났고,[6] 비야누에바도 축구 협회에 반발했다. 처음에는 이 깨박살에 대해 선수들을 다루지 않았다고 축구협회에서 주장했고 그에 대한 증명을 위해 알리안사 리마와 나머지 선수들 간의 시합이 열렸고, 리마가 2대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비야누에바는 여기에서 페널티 킥을 얻었지만 일부러 실축했고, 이는 관중들이 크게 열광하였다.
  • 기예르모 손다이크에 따르면 비야누에바는 두 번 죽었다고 전해진다. 원래 사망선고가 내려지고 얼굴에 천이 덮여있었는데, 그의 부인인 로사가 잠시 천을 치웠을 때 눈을 뜨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한다. 오래가지 않아 다시 눈꺼풀은 닫히고 영면에 들어갔다.

4. 수상



4.1. 클럽



4.2. 개인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maravillas. 영어로는 wonders[3] 물론 이 모든 것이 공식 경기는 아니다.[4] 페어 메르테사커와 같은 키이니 지금 따져도 충분히 거인이다.

이 사진의 왼쪽 인물은 호세 나사치로 그 역시 182cm의 장신이었다.
[5] 스페인어로 Manguera[6] 3전 전패. 1득점 12실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