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족 (r20180326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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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역사 /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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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역사
중세
(기원)

여진족


근세
치하 만주

여진족

후금(만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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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기원
2.2. 금 건국
2.3. 원의 지배
2.4. 명의 지배
2.5. 청 건국
3. 한국에서
4. 관련 문서




1. 개요


女眞
만주 일부와 한반도 북부에 거주했던 퉁구스계 종족집단. 영어로는 Jurchen이라고 하는데 이는 몽골에서 여진을 가리키던 말인 주르첸(Jürchen)이 전해진 것이다. 하지만 만주 개칭 이전의 여진족도 그냥 간단하게 Manchurian(맨추리안; 만주족)으로 묶어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만주어로는 주션(jušen)이라고 한다. 이것을 조선과 비슷하다고 하거나 아예 쥬신이라는 사이비 용어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조선'이라는 단어가 처음 쓰인 상고기 중국에서 '조선'의 음은 아직 구개음화가 반영되지 않은 폐쇄음인 상태였고 '주르첸'/'주션' 등의 표현은 숙신에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

2. 역사



2.1. 기원


여진족의 기원에 대해선 말이 많은데, 말갈을 여진의 원류로 보기도 하나 북쪽의 민족구성과 이동이 워낙 뭣 같은 데다가 검증할 사료조차 충분치 않아 확신할수 없다. 중국 사료에는 시대에 따라 종족 이름이 모두 다르게 나타나는데, 읍루, 숙신 → 말갈, 물길 → 여진, 야인[1] → 만주 순으로 오래되었다. 여진(女眞)이란 이름은 누르하치후금 건국 이후, 금지되어 만주족으로 바뀌었다.
기본적으로 여진족은 말갈선비, 그리고 갈족의 혼혈로 형성되었으며 퉁구스계이지만 같은 알타이계인 몽골계의 영향도 걸쭉하게 받았다. 특히 언어 및 복제 등. 여진족에서 나온 만주족이 쓰는 모자는 원래 몽골인의 전통의상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귀족을 버일러(Beile)라고 하는 것도 몽골어인 바얀(Bayan) 및 투르크어인 베이(Bay)와 같다.
엄밀히 말해서 만주와 여진도 같다고는 할 수 없다. 물론 만주가 여진이라 불렸고, 계승의식을 가지기는 했지만, 만주족 선포 이전까지 만주는 단지 여러 야인 부족의 이름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만주 자체가 여진족과 만주 북부와 내몽골 동부(만주로도 간주되는 흥안령 일대)에 살던 몽골계 종족인 우랑카이족을 합친 것이다.
남송조 우문무소가 쓴 금지(金誌)에서부터 석세신(席世臣)이 청조 1796년에 금지를 초본으로 하여 쓴 대금국지(大金国志)에서는 “금나라 시조의 휘는 함보(函普)이다.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다.”라고 쓰여 있다.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와 원나라 인종 연유 4년에 마단림(馬端臨, 1254년 ~ 1323년)이 완성한 문헌통고(文献通考)에서는 금나라의 시조는 신라에서 왔다고 쓰여 있다.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472[2]
여진족이 유명했던 또 다른 분야는 해적(!)질인데, 특히 동해 방면에서 유명했다. 한반도 북쪽의 이민족은 다 말 타고 뛰어다닌다고 생각한다면 충격일 수 있겠지만, 의외로 읍루 시절부터 해적질을 해 옥저 사람들이 산에 가서 숨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 시대 지방행정제도에서 군사적 성격이 강한 행정 구역인 양계 중 동계가 남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것이 여진족 해적에 대비하기 위해서였고, 심할 때는 일본까지 원정을 갔다. 일본에서는 이들이 누구인지도 몰랐는데, 고려와 접촉해서 고려인들이 이 족속을 '도이(刀伊)'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고('되놈'할 때의 그 '되(도+ㅣ→도이)' 맞다) '도이의 입구(刀伊の入寇)'라고 부르게 된다. 그 스탠스는 가히 일본판 왜구

2.2. 금 건국


11세기 후반부터 영가, 우야소 등의 지도 하에 요나라의 통제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생여진(동부의 여진 세력)이 힘을 키웠으며, 1115년 완안아골타가 최초의 통일국가인 을 건국하자 급속도로 상승세를 타서 과 동맹을 맺고 요를 박살냈고 그 다음에는 동맹국이었던 북송반박살을 내서 북중국 + 만주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아무튼 금나라는 과거 거란이 그들을 핍박했듯이 그들도 그들 아래에 있던 유목민족을 핍박하고 분열시키던 중에 자신들이 요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칭기즈 칸몽골족과 송의 후신인 남송에 의해 비참하게 멸망당한다.(1234년) 그 와중에 비슷한 패턴으로 반씩 멸망하는 송나라

2.3. 원의 지배


금나라가 처참히 멸망했을 때, 중원에 살던 여진족 대부분은 학살을 당하거나 나중에 중원을 통일한 나라 치하에서 중하계급으로 흡수되었다. 이래저래 고려로도 많이 귀화했고, 원나라의 정동군에 별개의 여진군으로 편성되어 일본 원정에까지 참여하기도 했다. 후일까지 한족에 동화되거나 몽골인의 일부가 되지 않고 여진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남은 자들은 만주(요동)에 남아있던 소수에 불과했다. 거란과 융화되기도 했으며, 특히 해서여진의 하다부는 기원이 거란인 몽골계 종족으로 우랑카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 이 우랑카이가 바로 우리가 아는 그 오랑캐의 의미다.

2.4. 명의 지배


이 망하고 한족의 이 들어서자, 여진족들은 명과 조선의 강력한 영향력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야인, 오랑캐, 되놈 등으로 불리며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충돌했다. 지금 한국 북쪽 국경선인 압록강, 두만강세종 대에 이들과의 투쟁(4군 6진)에서 얻어냈다. 세력이 약해지면 조공을 바쳐왔으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백그라운드로 여진족 출신이 많았다.[3] 일제 이전 조선의 주 까임 대상[4]떡밥. 또한 끊임없이 싸우는 와중에도 여진족의 많은 수는 조선으로 계속 귀화했다.
그렇게 여진족은 분열된 씨족사회 상태로 치하에서 근근이 살아갔다. 명과 조선에 눌려 기도 못펴고 있었는데, 명나라도 이성량 같은 인물까지는 막장짓을 자주하였고, 여진족이 계속 노략질을 하자 변경을 접하고 있던 조선에서는 때때로 여진족 부락을 토벌하러 나섰으며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조선에 칩입한 니탕개처럼 까불다가 신립에게 바로 밟혔고, 이순신 장군 역시 임란 전에 북방에서 여진족을 상대한 경험이 있다. 이렇게 토벌된 이후에도 여진의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토벌기록을 보면 기병대가 마을에 들어가서 미적거리던 민간인은 학살 or 포로, 저항하는 자는 살해. 집은 불태우고 숨겨둔 식량까지 꺼내서 뒤엎어버렸으며, 산으로 도망간 여진족들은 마을이 쑥대밭이 되는 걸 보면서 통곡을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어쨌든 이런 토벌은 거의 누르하치의 건국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여진족이 사는 땅은 이미 답이 없었지만,[5] 여진족이 힘을 기르면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약간만 세력이 큰 부족이 나타나면 충돌을 핑계로 기병대가 가서 짓밟아 놓는 식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여담으로 여진족의 생활양식은 유목민족보다는 반농 반수렵에 가까웠다. 유목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주력 산업은 농업과 수렵. 땅이 척박해서 그런지 밭을 일굴 수 있는 곳은 모조리 개간해놔도 남쪽의 중국이나 한반도보다는 농업 생산력이 딸렸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농사를 지었다. 또 수렵으로 얻은 모피나 기타 부산물들을 팔고 식량을 확보하는 등의 교역도 중요한 부분. 누르하치 시절에는 명의 무역봉쇄 한방에 크게 궁지에 몰렸고, 그간 쌓여온 것들까지 합쳐져 전쟁까지 터졌었다. 그리고 기세좋게 무역봉쇄까지 먹이던 명은 그대로 펀치맞고 뻗었다(...)

2.5. 청 건국


여진을 지속적으로 간섭하고 통제하던 명나라가 점점 위태해 지자 1616년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해 만주족으로 개칭하며 후금을 건국, 반란으로 대순을 세운 이자성을 제압하고 후에 강남 일대까지 평정해 중국을 완전히 지배한다. 그 후의 역사와 현대 만주족의 근황은 청나라,만주, 만주족 문서 참조.
중국 간쑤성(감숙성) 경안현 완안마을이라는 곳에는 완안성씨를 가진 여진족(정확히는 그들의 후예)들이 동족촌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감숙성으로 도망간 사연은 대략 금황실 내부 정쟁에 휘말려 완안올출의 아들이 살해당하자 몇몇 왕족들이 도망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의 여진족 후예들은 사당도 지었고 족보가 가지고 있다고 한다. 뿌리는 같은 여진족이지만 만주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3. 한국에서


한민족계 국가와 관계가 매우 깊다.
부여에서 읍루를 복속시키고 있었다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니 한국사의 서장부터 떼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셈. 고구려, 발해시대에는 말갈이란 이름으로 피지배층으로 복속해 있기도 하였으며 신라에 내려가 9서당에 소속되어 살거나 신라에 살았고 말갈의 한갈래 흑수말갈이 이들과 대립하기도 했었다. 이들이 침략자의 이미지지만 꽤 오랜 시간 한민족의 피지배 민족이었던 셈이다.
송막기문에서 왜 거란이 나왔는지는 좀 뜬금없지만 거란인과 발해인(고구려인)의 관계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거란은 발해인에게[6] 즉 '논밭을 주고 그 부입을 덜어주었으며 무역이 오고 갔으며 시장이 모두 탈취하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나[7], 즉 '전쟁이 있으면 곧 앞서 말을 몰게 하기 위하여 부렸다'라고 하여 전시(戰時)를 위한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송사 송기에는 '발해의 병마와 토지는 해장에 비해 풍성하다. 비록 거란에 힘써 일하지만 주인을 죽이고 나라를 무너뜨린 원한을 품고 있다[8]'라는 언급이 나와 발해 유민들이 거란에 대한 원한이 사무쳤음을 기록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거란은 고려나 여진족과의 전쟁에도 발해인을 강제 동원하여 선봉에 세웠다. 특히 여진족과 싸움을 붙인 이유는 후술하겠지만 여진족과 발해인이 사이가 나빠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거란국지 1116년에서 '대저 요동에는 일찍이 여진과 발해가 원수여서 전호가 곧 양민들로 하여금 여러 번 명하여 전쟁하게 했다.[9]'라고 기록하였고, 금사 호사보 열전에서 여진족 호사보가 거란에게 사신인척 파견되어 정탐하다 발해군과 마주치자 발해군은 오랑캐를 향해 한편으로 비웃고 한편으로 말하기를 '들으니 여진이 난을 일으키고자 한다는데 너희들은 참으로 나쁘도다.[10]' 즉 '야 너네 여진족 XX들 임마 거란놈들 상대로 반란 일으키려다가 이제 와서 사신보내고 꼬리내리냐? 이런 졸렬하고 간사한 새퀴들 같으니'라고 욕한것이다. 발해인들이 얼마나 여진족에 대해서 안 좋게 보았는지 알수있는 대목.
아골타의 경우도 금사 1114년에 '발해인 양복과 알답자로 하여금 거짓으로 도망치게 하여 그 고향 사람들을 불러놓고 '여진과 발해는 같은 집 식구이니 우리가 군대를 일으켜야 (거란의) 죄를 벌할 수 있으니 함부로 망동하지 말고 우리를 따라서 죄가 없게 해야한다.[11]' 여진과 발해를 한 집안이라고 언급을 하지만 곧 '딴 생각 말고 우리 따라와라?'라고 말하게 하여 사실 세력 흡수 목적임을 천명했다. 금사 1116년 기사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잘 드러나는데, [12] 고영창이 동경을 근거지로 삼아 발해를 다시 일으키려고 하고, 금나라에 달불야를 사신으로 보내 동맹을 제안하자, 금사 알로(斡魯) 열전에 [13] 오래지 않아 달불야가 영창과 탁자를 잡아 바치니, 이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하여 요의 남로의 계적여진(요나라, 즉 거란 국적의 여진)과 동경의 주현이 모두 항복하였으니, 알로를 남로도통과 질발극렬에 임명하여, 오준에 남아 동경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 요나라의 법을 폐하고 세금을 덜어주었으며 맹안모극을 설치하여 본조(금나라)의 제도와 같게 하였다.' 즉 얼마후 고영창을 배신하고 정복 후 죽여버린 다음 그 세력을 모조리 흡수한 것이다.
여진족도 발해인을 상당히 안 좋게 보거나 매우 경계한 듯한데, 송막기문의 내용을 살피면 대요, 대송 전쟁의 선봉으로 발해인을 사용하는데, 무려 발해군 3만을 동원하고 북송 전쟁이 끝난 후 산동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시켰고[14] 거란국지에서도 해당 사실을 기록하며 이에 발해인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15] 금사 병지의 기록에도 한족과 발해인을 맹안모극에서 강제로 탈퇴시켜 차별대우했으며, 그 혜택을 국인/내족, 즉 자신들에게 몰아주게 된다.[16] 금사 희종(熙宗) 본기에서는 거란인과는 달리 그냥 한족 취급을 해서 한족의 글자를 강제한다[17]. 금사 병지에서는 여진, 거란, 한인의 통혼을 허락하면서도 발해인은 아예 기록을 하지 않아 대놓고 없는 취급 내지는 배제를 하며[18] 금사 세종(世宗) 본기에서도 [19]발해인들은 여진, 거란과는 다르게 형사취수를 금지당하고, 양자를 들이는 것 또한 차단당하며 한족의 풍습을 강제당하는 등 한족과 똑같은 취급을 당했다. 이를 보면 북방에서 꽤 많은 숫자를 유지하며 살고 있던 한민족을 사라지게 만든 것은 바로 거란과 여진족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거란 사이에 끼어서 고려나 거란의 제후국 노릇을 하기도 했다. 고려는 외왕내제를 하려면 명분상이라도 제후국이 필요했는데, 탐라국이 비슷한 역할을 했고[20] 여진 제부족들도 고려에 형식상 복속되기도 했다. 물론 요나라서희로 대표되는 고려의 합의에 의해 영역을 빼앗기는 시절도 있었지만 그 직전인 983년 고려가 먼저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가려다가 여진에게 참패를 당하는 등 결코 만만하지만은 않은 상대였다.
이 중에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신라인 내지 고려인(문헌에 따라 기록이 일치하지 않음)을 조상으로 삼고 고려에게 숙이고 들어갈 때마다 '아 우리 생각해 보니까 옛날에는 잘 지냈져 그져' 하면서 족보를 읊는(...) 이들도 있었는데, 문제는 이들이 후에 금나라를 건국하는 완안부가 된다는 점. 이 때문에 이게 고려사에만 실려 있는 것이 아니라 금사 등 중국 측의 정사서에도 실리기까지 한다(...). 이게 유사역사학계의 손에 넘어가서 여진족 신라인설로 발전하고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출판하기까지 하는 등 온 난리를 쳤지만, 이는 후에 여진족 내에서 성공 신화를 이룬 단 한 명만이 신라인 출신이었다는 것일 뿐 여진족의 민족 구성이 뒤바뀌었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김함보가 무슨 씨뿌리기 폭탄 쓴 것도 아니고
고려 전기엔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섬기며 조공 했으나 힘이 강성해져서 고려 측에서는 윤관의 지도하에 동북 9성을 세우기도 했지만 겨우 2년 만에 반환해야 했다.[21][22] 여진족이 급속도로 흥기하여 금나라를 세워 화북을 정복하자 고려는 이런 금나라를 보고 매우 놀란다.[23] 하지만 여진은 고려의 제후국에서 금나라를 세울 때까지 성장한 뒤 이전 거란이나 이후 몽골과 달리 고려와 굳이 전쟁을 하려고까지 하지는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북중국을 제압했으므로 여요전쟁 때보다는 더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고려 측에서 압록강을 건너와 존재한 요의 영토였던 보주 등을 회복하겠다고 했을 때 완안아골타는 '우리 정신 없으니까 당신들이 알아서 먹으셈'이라고 얘기하고 끝냈다.
금나라를 세운 후 충돌을 피하고자 고려가 금을 상국으로 대우해준다. 금나라가 깨지고 고려 말에는 이성계에게 꽉 잡혀 있었다. 이후 조선을 위협하는 최대 세력인 건주 야인 이만주[24]동맹가첩목아 등이 죄다 이성계 부하출신(...).[25]
저기 나온 이름들 중에 아합출과 협온 맹가첩목아가 건주위, 청나라 황실의 조상이 된다. 아합출은 이만주의 할아버지고, 맹가첩목아는 누르하치의 6대조이며 이들의 후손이 15세기 말까지 건주3위를 지배했다. 만주왕 이성계의 위엄 여진족 주요 3부족 중 하나인 건주 야인이 이성계에게 복속된 것은 거의 확실하고 야인 여진은 확실하진 않지만 목단강과 동해 연안지역이 핵심 지역이 이성계에게 복종한 듯. 이렇게 이성계의 영향력이 매우 높았지만 조선의 건국 이후 명나라가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이성계가 죽기 전부터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명나라가 초기에 올량합, 건주야인 등에게 조공을 요구하자 이에 대한 대책회의가 조선에서 열렸다. 왜냐고? 이때 여진족은 아예 조선 속국 취급이었기 때문(...). 하지만 이성계 이후 여진족에 대한 조선왕실의 영향력은 사실상 사라져 조선은 명나라 와의 충돌을 거부하고 여진족 통제권을 사실상 포기하여 명나라에 넘긴다. 그리고 명나라는 관리 못 해서 중원을 청나라가 먹었다
조선 전기에는 여진족의 세력을 방치했다가 금나라가 세워져 안보에 위협을 받았던 고려시대의 교훈을 삼아서 빈번하게 명나라 조선에 침입해오는 여진족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조선은 지속적으로 예방전쟁을 펼쳤다. 특히 세종 이후 부터 본격적으로 토벌전을 펼쳐 세조 남이 장군의 활약으로 그야말로 건주여진을 중심으로 여진은 가루가 되도록 갈린다. 이후 여진에는 100년간 강력한 추장이 나타나지 못할정도.[26]
한국의 변경에 살던 여진족들을 한국 사람들이 계속 여진족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에게는 재가승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주로 함경도의 재가승촌에서 천민 신분으로 살았으며 분단 전까지도 함경도의 여진족 마을인 재가승촌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증언에 따르면 현대 북한에 여진족이 있었다고 한다.(#) 재가승 문서 참조. 북한 체제가 공고히되고 나서 북한에 동화된 듯 하다.[27] 허나 재가승이 확실히 여진족인지는 불확실한 상황.

4. 관련 문서



[1] 야인시대의 그 야인과 한자 철자가 같다. 다만 의미는 좀 다르다. 여기선 들판에 사는 사람들, 문명(중원)과는 동떨어진 사람들이라는 의미.[2] 링크에서 유사역사학 관련 자료를 언급하는데 알아서 거르자.[3]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이성계의 의형제인 이지란. 이 때문에 '이성계 여진족설'도 생겨났으나, 그냥 어거지로 조선 까는 수준이라(...).[4] 명과 조선이 몽골 제국 이후 모든 오랑캐에 대한 경계가 노이로제급이 된 이유도 있다.[5] 고구려나 발해 시절에 농사가 이루어졌고 현대에 와서는 석유도 발견되고 석탄도 매장되고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추웠던 데다가 지금보다 날씨가 추웠다고 추정되고 몽골군이 침입해오면서 이 일대의 인구를 개박살내서 황폐화된 여파도 있어서 농업생산량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여진족들이 농사만 지었던 게 아니라 수렵도 병행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고.[6] 給以田疇, 捐其賦入, 往來貿易, 關市皆不征[7] 有戰則用為前驅[8] 渤海兵馬土地, 盛於奚帳, 雖勉事契丹, 俱懷殺主破國之怨[9] 蓋遼東夙與女真, 渤海有讎, 轉戶則使從良, 庶幾效命敢戰[10] 遇渤海軍, 渤海軍向胡沙補且笑且言曰: 聞女直欲為亂, 汝輩是邪[11] 召渤海梁福, 斡答剌使之偽亡去, 招諭其鄉人曰: 女直, 渤海本同一家, 我興師伐罪, 不濫及無辜也[12] 閏月, 高永昌據東京, 使撻不野來求援[13] 未幾, 撻不野執永昌及鐸刺以獻, 皆殺之. 於是, 遼之南路系籍女直及東京州縣盡降. 以斡魯為南路都統, 迭勃極烈, 留烏蠢知東京事. 詔除遼法, 省賦稅, 置猛安謀克一如本朝之制.[14] 金人慮其難制, 頻年轉戍山東, 每徙不過數百家, 至辛酉歲盡驅以行。[15] 至辛酉歲, 盡驅以從, 其人大怨[16] 迨夫國勢浸盛, 則歸土地, 削位號, 罷遼東渤海, 漢人之襲猛安謀克者, 漸以兵柄歸其內族, 熙宗皇統五年, 又罷遼東漢人, 渤海猛安謀克承襲之制, 浸移兵柄於其國人, 凡漢人, 渤海人不得充猛安謀克戶。猛安謀克之奴婢免為良者, 止隸本部為正戶.[17] 天眷元年 六月 乙未, 詔百官誥命, 女直, 契丹, 漢人各用本字, 渤海同漢人[18] 迨夫國勢浸盛, 則歸土地, 削位號, 罷遼東渤海, 漢人之襲猛安謀克者, 漸以兵柄歸其內族, 熙宗皇統五年, 又罷遼東漢人, 渤海猛安謀克承襲之制, 浸移兵柄於其國人, 凡漢人, 渤海人不得充猛安謀克戶。猛安謀克之奴婢免為良者, 止隸本部為正戶.[19] 丙戌, 制漢人, 渤海兄弟之妻, 服闋歸宗, 以禮續婚者, 聽[20] 탐라인들은 고려에서 외국인으로 취급되어 예를 들어 과거 제도에서도 빈공과에 응시해야 했다. 다만 어떨 때는 또 고려의 일부처럼 대하기도 하고 고려시대의 제주도 인식은 이랬다 저랬다 애매한 편이다.[21] 동북 9성은 '고려의 영토 확장'으로 이해하지만, 고려의 재정이 파탄나는 상황에서 선왕의 유지라고 해서 억지로 추진했다가 2년 만에 5~7만의 군사를 잃는 참패(갈라수 전투)와 재정 부족으로 정복한 영토와 함락되지 않은 성조차 모두 잃게 됬고 책임자인 윤관은 중앙에 복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끝내 파직당하는 등 국가 사업으로서는 완전한 실패였다. 즉 영토든 뭐든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는 것.[22] 하지만 아예 소득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여진은 이후 금나라로 발전하면서 요나라보다 더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며 중국대륙의 북쪽을 집어 삼키기까지 하는데도 고려를 단 한 차례도 침공하지 않았다. 2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금나라도 고려 군사력을 만만하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아예 근거가 없지는 않다.[23] 당장 여진족은 이전까지만 해도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부르며 윤관에게 패배한 이후에는 고려 쪽으로 기와 한 장 던지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였다.[24] 이만주 할아버지 아하추는 실록에는 아합출(阿哈出) 혹은 어허추(於虛出)로, 중국기록엔 아합출로 나오고 해당 목록의 두 번째이다.[25] 동북면 1도(道)는 원래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킨 땅으로서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한 지 오래 되어, 야인(野人)의 추장(酋長)이 먼 데서 오고, 이란 두만(移闌豆漫)도 모두 와서 태조를 섬기었으되, 언제나 활과 칼을 차고 잠저(潛邸)에 들어와서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었고, 동정(東征)·서벌(西伐)할 때에도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진(女眞)은 알타리 두만(斡朶里豆漫) 협온 맹가첩목아(夾溫猛哥帖木兒)·화아아 두만(火兒阿豆漫) 고론 아합출(古論阿哈出)·탁온 두만(托溫豆漫) 고복아알(高卜兒閼)·합란 도다루가치(哈闌都達魯花赤) 해탄가랑합(奚灘訶郞哈)·삼산 맹안(參散猛安) 고론두란첩목아(古論豆闌帖木兒)·이란 두만 맹안(移闌豆漫猛安) 보역막올아주(甫亦莫兀兒住)·해양 맹안(海洋猛安) 괄아아화실첩목아(括兒牙火失帖木兒)·아도가 맹안(阿都哥猛安) 오둔완자(奧屯完者)·실안춘 맹안(實眼春猛安) 해탄탑사(奚灘塔斯)·갑주 맹안(甲州猛安) 운강괄(雲剛括)·홍긍 맹안(洪肯猛安) 괄아아올난(括兒牙兀難)·해통 맹안(海通猛安) 주호귀동(朱胡貴洞)·독로올 맹안(禿魯兀猛安) 협온불화(夾溫不花)·간합 맹안(幹合猛安) 해탄설렬(奚灘薛列)·올아홀리 맹안(兀兒忽里猛安) 협온적올리(夾溫赤兀里)·아사 맹안(阿沙猛安) 주호인답홀(朱胡引答忽)·인출활실 맹안(紉出闊失猛安) 주호완자(朱胡完者), 오롱소 맹안(吾籠所猛安) 난독고로(暖禿古魯)·해탄발아(奚灘孛牙), 토문 맹안(土門猛安) 고론발리(古論孛里)·아목라(阿木刺) 당괄해탄고옥노(唐括奚灘古玉奴)이며, 올랑합(兀郞哈)은 토문(土門)의 괄아아팔아속(括兒牙八兒速)이며, 혐진 올적합(嫌眞兀狄哈)은 고주(古州)의 괄아아걸목나(括兒牙乞木那)·답비나(答比那)·가아답가(可兒答哥)이며, 남돌 올적합(南突兀狄哈)은 속평강(速平江)·남돌아라합백안(南突阿刺哈伯顔)이며, 활아간 올적합(闊兒看兀狄哈)은 안춘(眼春)·괄아아독성개(括兒牙禿成改) 등이 이것이다.[26] 당장 임진왜란 때 전사한 신립부터 니탕개 등 여진족을 아작낸 명장이다. 아마 조선 전기 때 당시 조선인들은 나중에 이 여진족이 반란으로 작살난 명나라를 접수하는 청나라까지 세울 정도로 성장 할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임진왜란, 이괄의 난, 이자성의 반란, 흉년 등 정말 천운스럽게 후금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던 것.[27] "멸족"이라는 말을 쓰면서, 김씨일가의 독재가 이들을 모두 학살했다는 뉘앙스로 읽히도록 기술을 하는데, 그냥 북한 체제에 편입되어서 일반 북한인과 다를 바 없이 되었다는 의미는 "동화"를 쓴다. 그리고 이런 집단이 북한이 아니라 남한에 남아 있었어도, 어차피 압도적인 인구 차이와 민족감정 때문에, 이들도 마찬가지로 흡수 동화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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