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 (r20180326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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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영어의 queen
3. 대한민국의 경우
3.1. 고대
3.2. 고려시대
3.3. 조선시대
4. 나무위키에 항목이 개설된 왕비들
4.1. 실존 인물
4.1.1. 한국사
4.1.2. 세계사
4.2. 가공 인물


1. 개요


王妃
의 정실 부인을 말한다. 황제국에서는 황후(皇后). 일단 어떤 왕국에서 가장 높은 신분의 여성이기는 하지만, 여왕과는 다른 개념으로, 원칙적으로는 결혼에 의해 그 지위를 취득한 사람에게 사용한다. 반면 여왕(황제국에서는 여제)은 본인의 즉위에 의해 그 지위를 취득한 사람이다.
간혹 황후를 황비라고 부르는 경우가 발견되는데, 원래 황후와 황비는 같은 의미의 단어가 아니므로 오류이거나 혼동으로 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군주 부인의 급은 후(后)>비(妃)>빈(嬪) 순으로, 제국은 황후가 맞으므로. '가공 인물'의 황비의 각주 참조.
다만 일본 서브컬처계에서는 의도적으로 황후의 지위에 해당하는 여성을 황비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일본에 아직도 황(皇)의 한자를 사용하는 지위의 군주가 존재하기 때문으로, 일본의 덴노와 그 정실부인을 일컫는 '天皇/皇后'(좀 민감한 작가일 경우 '両陛下'까지)의 표기를 소위 불경죄 논란에 휘말리지 않도록 일부러 피하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일본의 서브컬처계, 특히 라노벨 작품에서는 남편이 황제/국왕폐하인데 그 정실부인은 엉뚱하게도 황비/왕비전하의 경칭을 쓰는 경우도 매우 자주 볼 수 있다.[1] 군주의 정처에게 후(后)를 쓰게 되면 현대의 왕실 경칭 표기 룰로는 자동적으로 ~후 폐하가 되고 부부를 통틀어 일컬을 때 두 분 폐하(両陛下)가 되어 실제 일본 왕실에 사용하는 경칭과 겹쳐버리기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오스만 제국에서는 16세기 초반까지 태후(Valide Sultan)는 있어도 왕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후계 구도가 하렘을 중심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송가이 제국 등 하렘을 둔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2] 이런 경향은 쉴레이만 1세휴렘 술탄과 정식으로 혼인하면서 바뀐다.
일단은 일부일처제였던 서양과 달리, 일부일처다첩제가 대부분이었던 동양에선 왕비와 들에 관한 일종의 위계질서 체제로 후궁 제도라는 게 있었다.
반대 개념으로 국서가 있으며, 이건 말 그대로 여왕의 남편을 뜻한다. 결혼과 더불어 공동 즉위한 남편에게는 쓰지 않는다(즉위하면 왕이 되니까).

2. 영어의 queen


queen은 여왕, 의 아내, 어머니 등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다. 왕의 아내는 queen consort, 여왕은 queen regnant, 왕모는 queen mother 라고 하는 것이 정식이지만 대체로 줄여서 queen이라고만 표시하기 때문에 오역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남자의 경우는 prince가 비슷한 위치이다. 일반적으로 (여)왕의 아들을 뜻하지만 여왕의 남편, 공국(principality)의 지배자[3]를 뜻하기도 한다.

3. 대한민국의 경우


한국 역사에서는 왕후(王后)란 명칭이 많이 쓰였다. 원래 군주의 정실부인이 받을 수 있는 칭호는 후(后)뿐이다. 황제국의 정실부인은 황후이고 외왕내제국(자주국)의 정실부인은 왕후. 비(妃)와 빈(嬪)은 후궁에게 내리는 칭호였다. 비(妃) 작위를 받은 대표적인 후궁귀비 엄씨, 현비 권씨. 빈(嬪) 작위를 받은 대표적인 후궁은 경빈 박씨, 희빈 장씨.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后)와 비(妃)를 동급으로 여기는데, 이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려는 전체적으로 조선만큼 내명부 체계가 엄격하지 않았고 원나라 간섭기엔 아예 원나라의 제후국이 되면서 체계에 혼란이 생겼다. 그리고 조선은 명나라청나라의 제후국이었다.
제후국에서는 모든 칭호/관제에서 황제국보다 한 단계 아래 등급을 사용해야 했는데, 이 때문에 원 간섭기부터 황제(~조, ~종) → 왕(~왕), 왕태후→대비 등으로 강등되었다. 원나라 간섭기 이후부터 고려 왕의 정궁은 왕비로 격하되고, 후궁들은 ㅇ비(妃) 칭호를 받았다. 이때 고려에서 왕후나 왕비 칭호를 찾아보기 힘들고, 일부다처제 성격을 띠게 된다.
반면 비록 조선은 제후국이었으나 자주성을 암묵적으로 내세워 고려처럼 황제국 군주에게만 사후 '조/종' 묘호를 준 것처럼, 왕비(중전)에게도 사후 '왕후'라 격상 추존하는 형식을 택했다. 그래서 조선 왕비의 시호에는 왕비란 단어가 없고 왕후란 단어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광해군 일기의 기록을 보면 광해군이 자신의 생모인 공빈 김씨를 왕후로 추숭하려하자 신하들이 반대하면서 "왕후가 아니라 왕비로 추숭하자"고 주장한 기록이 존재한다.[4]

3.1. 고대


고구려백제, 가야, 발해 왕비들의 시호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신라의 왕비들은 왕후 대신 부인이라는 형식의 시호로 삼국사기 등에서 전해진다. 후술할 고려에서도 부인 칭호를 쓰기도 했지만 신라의 경우 정실부인도 부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단 여러 부분에서 나타나는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신라 등의 나라에서도 당대에는 왕태후, 때로는 '황후' 등의 중국식 미칭 역시 사용했던 것은 확인할 수 있다.

3.2. 고려시대


초기 고려에서는 왕후(王后)와 부인(夫人)으로 나눠 전자를 정실로, 후자를 후궁으로 삼았다. 호족과 결혼할 때는 '지역+(궁/원)부인'이었다. 왕건후궁들이 호족의 여식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이 부인들의 칭호 대다수가 출신 지역의 이름을 따서 '지역+(원)부인'이라고 불렸다. 예를 들면 광주지역의 대호족 왕규의 딸들은 각각 광주원부인, 소광주원부인이라는 칭호가 내려졌다. 성종 대까지 고려시대의 후궁제도는 비교적 단순하게 나뉘고 정리가 되지 않은 것이 보통이었다.
한국사상 가장 많은 후궁을 둔 태조 왕건의 경우도 왕후가 6명이고 부인은 24명이었다. 그런데 정처인 신혜왕후가 하동군부인이라고 불린 적이 있고, 대부분의 다른 부인들이 ~부인으로 불린 것으로 보아, 왕후들도 생전에는 왕후로 칭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광종 이후 족내혼을 하면서 '건물 이름+전/궁/원부인' 형태로 불렀다. 왕태후>왕후(왕의 정처, 어머니, 조모, 외조모)>궁부인>원부인>궁인 순으로 보인다.
성종 이후 문물정비가 이뤄짐에 따라 왕후 이하 내명부의 품계가 정해졌는데 전해지는 것은 정1품에 관한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왕후는 내명부 품계를 초월한 수장이며, 정1품으로 비(妃)가 있었으며 4개의 미칭(美稱)인 귀비(貴妃), 현비(賢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중 하나가 주어졌다. 이는 당나라의 내명부 제도를 본 딴 것으로 고려황제국이었다는 뉘앙스를 슬슬 풍기는 근거 중 하나가 되는데 사실 정실부인을 후(后)로, 후궁을 비(妃)로 두는 것은 황제국에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제후국 즉, 조선의 경우에는 내명부 수장인 중궁의 품계가 왕비이니 사실 제후국의 수장은 황제국 최고 등급의 후궁과 동급이 된 것이다.
왕후의 경우, 대체로 왕의 정처였던 사람, 왕의 어머니, 할머니, 외할머니를 왕후로 추존한 걸로 보인다. 외할머니까지 왕후로 추존된 이유는 고려 초기 근친혼 때문에 왕이 된 이들의 외할머니가 선대의 비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덧붙여 고려 전반에 걸쳐서, 추존 왕후든 아니든 왕태후가 된 인물들은 대체로 왕태후가 될 때 살아있었지만 간혹 고인(故人)을 왕태후로 추존하는 경우가 발견된다. 이것은 정통성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로 보인다.
예외적으로 성종의 2비 문화왕후는 현종 때 왕태후가 아니라 대비가 되었고 사후에 왕후로 추존되었다. 그녀는 왕의 외할머니도 아니었으나 궁에서 성종의 조카 목종과 현종을 양육했고 그녀의 딸 원정왕후가 현종의 1비가 되었으므로 자신의 양어머니나 마찬가지였기에 현종이 대비의 존호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5]
보통 중후기는 왕태후>전주[6]>궁주(궁비)>원주(원비)[7]>궁인 혹은 택주[8]순이었다.
고려 중기[9]에는 왕비와 후궁에게 보통 건물을 하사하고 그 건물의 이름을 따라 ㅇㅇ궁주(宮主)(혹은 전주) ㅇㅇ원주[10] 등으로 불렀으며, 이는 고려 초기의 ㅇㅇ궁부인,ㅇㅇ원부인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별개로 왕태후(왕의 어머니이거나 할머니)-왕후,왕비[11]-ㅇ비(귀비,덕비,현비,숙비)[12] 순으로 봉작을 내렸고[13] 왕후 ㅇㅇ궁주 귀비 ㅇㅇ원주, 덕비 ㅇㅇ궁주, 왕비 ㅇㅇ 전주 등으로 봉작되었다. 실생활에서는 궁주(전주)나 원주로 많이 불리었는데 이 탓인지 후기까지 간혹 '궁주'이면서 동시에 비(妃)인 경우도 있다. 생전 왕후와 왕비는 보통 1명씩이었으며 칭호가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전 왕후의 경우 몇 명 없고 기록이 미비하며 왕후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생전 왕후는 현종의 왕후인 원정왕후(元貞王后), 덕종의 왕후인 경성왕후(敬成王后), 명종의 왕후 의정왕후(義靜王后) 등이 있다. 초기 고려를 제외하면 이들은 왕의 딸이거나 왕족이었다. 반면 왕비의 경우 칭호가 기록에서 다수 발견되고 왕족이나 귀족출신이 되었다.
그리고 생전에 왕비의 자리에 올랐던 자, 왕의 딸 혹은 왕족 출신은 대체로 사후에 왕후로 추증되었다. 왕비의 경우 귀족 출신 혹은 소생이 없어도 자리에 올랐다면 추존하였다. 왕을 낳았으면 태후가 되거나 고인인 경우에 남편이 왕후로 추숭을 하고, 아들이 즉위하면 한 단계 높은 태후로 다시 추존했다. 그러나 원 간섭기에 왕의 정비(正妃)가 원나라 공주로 정해지면서 이 규칙은 사라진다.[14]
궁주가 원주보다 높았고, 전주가 궁주와 비슷하나 격이 조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주인 후궁이 후궁인 궁주로 승진하거나[15] 궁주는 선왕의 후궁[16], 왕비, 높은 후궁 등을 가르켰고 공주 역시 궁주(전주)로 봉작했다.[17] 전주는 후궁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칭호이며 좀 더 높은 신분이었다. 왕태후는 전주였고[18] 왕후, 왕비, 가끔 공주의 칭호에서 보인다.
다만 궁주나 원주는 왕족이나 귀족 출신 여인이었고, 일반적인 승은을 입은 경우에는 궁주와 원주가 되지 못하고 궁인으로 불리었다. 고려시대 때는 신분의 차이가 엄격해 이런 궁인의 딸은 봉작을 받지도 못했다. 궁주(전주)는 고려 족내혼의 전통을 따라[19] 왕의 왕후가 되거나 종친에게 시집갔는데 신분 때문에 신하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출가해 승려가 되어야 했다.
고려사에서 가끔 원비(元妃)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보통 이 단어는 정비(正妃)와 같은 뜻으로 쓰이나 고려 시대 때는 왕의 정실부인이 1명이 아니며 정실부인과 후궁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았기에 왕이 처음 맞은 아내를 일컫는 말로 쓰였다. 고려는 위계 체계가 엄격하지 않아 왕이 처음으로 맞은 아내면 품계나 서열이 낮아도 원비라고 불렸다. 헌종의 모후인 사숙왕후의 신위를 종묘에 모시려고 했을 때 그녀는 선종의 정비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선종의 원비는 아니라는 이유로 예종이 "적서의 예를 고려해야 한다"며 미루는 모습을 보인다.[20]
이때 유력 문벌귀족들의 딸들을 자매 단위로 들이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한꺼번에 많은 비들을 뽑은 뒤에 왕후나 왕비가 죽을 때마다 자리가 비면 정식 왕후로 봉했다. 이러다보니 고려 왕들의 정실부인 숫자들은 조선에 비해 많았고 왕의 부인들끼리는 살아 있는 동안에 동일한 반열의 자리에 있는 경우도 존재했다. 이 탓인지, 대체로 품계가 높으면 서열도 높지만 덕종의 2비 경목현비처럼 서열은 높은데 품계는 아랫서열의 비보다 낮아 이 사람이 정실부인인지 후궁인지 판단하기 힘든 경우도 간혹 발견된다. 다만 왕과 함께 묻히거나 기록되는 순서에서 우대사항이 존재하기는 했다. 정비(正妃)라면 서열과 품계가 가장 높은 게 일반적이므로 대체로 1비로 기록되는 비가 정비(正妃)에 해당하나, 고려의 왕비들의 서열엔 신분이나 들인 순서, 정치적인 것 등이 종합적으로 적용되었기에 1비로 기록되지 않은 이가 정비격인 경우도 있다.
후반기부터는 태후[21]>대비[22] >왕비=원나라 공주>궁주, 비(妃)[23]>옹주[24]>택주[25] 순이었다.
원 간섭기 이후에는 이는 왕실 관제가 상당수 격하되고 내명부의 수장과 그 구성원 일부가 원나라 공주가 되면서 내명부 관제가 사실상 무너졌다. 이를테면 법제상 내명부의 수장이 제후국의 왕후로서 비(妃)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후궁들의 최고 품계는 제후국 군주의 첩인 빈(嬪)이 아니라 여전히 황제국의 첩인 비(妃)인 상태가 계속되었다. 사실 원나라고려의 관제와 왕실용어들을 격하시키기는 했지만 이 격하는 사실 눈에 띄는 주요부서들에게 주로 행해진 것이며 고려의 관제 모두를 속속들이 격하시킨 것이 아니었다. 3성이 죄다 격하되었어도 그 안에 있는 관제들이 격하되지 않아 고려 행정의 위계성에 황제급과 제후급이 섞여 혼란이 생긴 것이다. 후궁제도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당시로선 무조건 원나라 공주가 정비(正妃)가 되었다. 반드시 공주 출신이 아니었어도 원나라 출신이면 정비로 대우받았다. 국왕의 정비는 원나라의 공주로 정해졌지만 여전히 국왕은 여러 부인을 둘 수 있었다. 이때 여성들은 ㅇ비(妃) 형태로 책봉되었다. 당시 기록상으로는 비(妃)가 붙은 이들은 모두 국왕의 왕비나 왕비에 가까운 후궁으로 간주했다. 미칭의 종류는 이때 더욱 다양해져 의비, 정비, 신비, 혜비, 순비 등 붙일 수 있는 칭호들은 대부분 붙여졌다. 그 이외에는 궁주나 옹주로 불렀다. 제후국 군주의 왕녀를 가리키는 옹주(翁主)라는 칭호가 후궁에게 처음 사용되기도 했다.[26] 몽골 공주가 황제로부터 고려왕비 책봉을 받았으나 이후 고려에서 왕후나 왕비 칭호를 찾아보기 힘들고 일부다처제 성격을 띄게 된다.
한편 충혜왕이나 우왕 때는 출신이 귀족 미만인 후궁은 품계를 받을 수 없다는 관습을 깨고 기생이나 사노비, 관비 등이 품계를 받은 사례가 있다. 충혜왕 후궁 은천옹주와 우왕의 여러 후궁이다. 우왕의 후궁들은 대부분 노비나 천민, 기생이어서 ㅇ비(妃)와 옹주로 책봉되자 백성들이 놀랐다는 기사가 고려사에 나온다. 그러나 고려 왕실에서 모계의 혈통이 중요하고 신분의 벽이 높아서 은천옹주의 아들은 왕위계승권은커녕 신분 때문에 얄짤없이 출가했다. 예외로 우왕이 있지만 이는 우왕이 공민왕의 하나뿐인 아들이고 당시 공민왕의 형제 중 살아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으로, 그런데도 불안했는지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공민왕의 모후 공원왕후가 손자 우왕 대신 혈통이 온전한 종친을 왕위에 세우려 했다. 이만큼 고려에서 신분와 혈통의 벽은 높았다.
조선시대에 비해 고려는 적서 차별[27]이나 남녀 차별이 느슨했다. 호칭상이나 명예상에서 약간의 서열이 존재하기는 해도 동등한 왕의 여자라는 점 때문에 왕비와 후궁의 구별이 조선보다 엄격하지 않았고, 이는 왕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였다. 혜종 때 왕실을 뒤흔들었던 왕규의 난만 봐도 이 내명부 서열이라는 게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조선이었다면 현재의 국왕이 선왕의 장남이고, 위로 선왕의 왕자들이 바글바글한데 선왕의 16번째 부인 소생인 광주원군을 왕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 나올 수는 없었다.[28] 조선시대 같으면 감히 상상도 못할 일로, 서자인데다 서열이 높지 않은 왕자를 왕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은 고려 당시 적서차별이 거의 없었음을 반증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성종 이전에는 원래 왕위계승자들만을 위한 칭호인 '태자'가 남용되어 왕의 아들이라면 개나 소나 태자 칭호를 받게 되어 새로 맏아들이라는 뜻의 '정윤(正胤)'이라는 칭호가 만들어지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으니 내명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간혹가다 과부도 후궁이나 왕후가 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성종의 제1비인 문덕왕후와 충렬왕, 충선왕의 후궁인 숙창원비, 충선왕의 후궁인 순비 허씨(順妃 許氏)[29]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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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조선시대


조선에서는 태종이 내명부 체제를 개편하여 왕비가 1명만 있을 수 있었다. 사회 전반에도 적서차별을 두어 제사를 받들 정실부인인 처(妻)는 오로지 1명이고 그 외에 부인은 모두 첩(측실)로 제한했다. 태종이 처첩-적서차별을 강화한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고려시대 때 일부다처제의 용인으로 아버지 이성계가 고향(함경도)과 개경에 2명의 정실부인을 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후처였으나 엄연히 경처였던 강씨가 왕후가 되는데 무리가 없었고, 왕권의 라이벌로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무안대군의안대군이 늘었다. 결국 왕실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도 집안의 후계구도를 깔끔히 처리하겠다는 의도로 이어진 것. 자세한 과도기적 체제는 후궁 항목 참조.
왕비의 호칭은 사극을 통해 잘 알려진 중전. 왕비가 거처하는 중궁전(교태전)에서 따온 말로, 중궁, 내전, 곤전, 곤궁 등의 호칭 역시 사용되었고, 존칭은 중전마마.
조선 후기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고려 초중기와 같이 자주적인 의미를 강화해 생존시 칭호가 '왕비'에서 '왕후'로 다시 격상되었다. 국내에서는 '중전(중궁전) 마마'라는 호칭으로 일관했으나, 외국인사들은 왕비 '전하'로 호칭하다가 격상된 이후엔 왕후 '폐하'라고 호칭했다. 또한 '왕세자빈'도 다시 '왕태자비'로 격상되었다. 이후 조선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왕후의 호칭 역시 '황후'로 격상되었다. 하지만 추존 황후가 아닌 현직에서 황후 자리에 앉았던 사람은 순정효황후 한 사람, 그것도 단 4년 남짓 정도였다.

4. 나무위키에 항목이 개설된 왕비들



4.1. 실존 인물


황후, 왕후 포함.

4.1.1. 한국사



4.1.2. 세계사



4.2. 가공 인물


황후, 황비(皇妃)[33] 포함. 실존인물인지 아닌지 모호한 경우도 이곳에. 정실 부인이 아닌 경우에는 후궁 항목으로.

[1] 근대이전의 중국이 무대라면 이는 틀린 표기가 아니다. 자세한 사항은 폐하참고. 문제는 서양쪽 배경에서 이런다는 것.[2] 이슬람 문화권이라고 모두 왕비가 없었던건 아니다. 같은 시기 사파비 왕조무굴 제국 군주들 역시 하렘을 두긴 했지만 일부다처제 개념이긴 해도 베굼, 파드샤 베굼이라고 불리는 왕비, 황후와 결혼했다. 미천한 출신의 유럽 및 캅카스 여성이 대다수였던 오스만 제국 황제의 배우자들과 달리 베굼은 페르시아계 귀족 여성, 지방 토후 및 부족장의 딸, 황실의 황녀, 페르시아의 공주 등 고귀한 신분 출신들이었다.[3] 군주라는 것은 왕과 비슷하지만 왕보다는 일반적으로 낮은 지위를 갖고 있으며, prince가 지배하는 principality는 왕의 지배하는 kingdom에 속한다고 본다.[4] "(상략) 우리 나라에서는 생존하였을 때에는 비(妃)라 칭하고 별세하면 왕후라 칭하는 것은 이미 조종조에서 이루어 놓은 준례입니다만, 고전(古典)을 상고해 보건대 왕비를 왕후로 올렸다고 하였으니, 왕후와 왕비는 등급이 다소 다릅니다. 지금 마땅히 추존하여 왕비를 삼아 다소 높이는 분별을 보여 주고 휘호를 더하여 별묘(別廟)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 지극히 높이는 것입니다. (후략)" 광해군일기[중초본] 26권, 광해 2년 3월 23일 기해 2번째 기사의 일부에서.[5] 그녀의 사망년도는 기록에 없다. 일단 대비가 된 것은 1029년으로, 그 이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6] 궁주(宮主)보다는 약간 높다. 태후, 왕후, 왕비, 왕녀가 썼다. 일반 비에게서는 잘 볼 수 없다.[7] 궁주와 원주는 비 칭호를 주로 받았다. 그래서 고려 후기 비(妃)에 대입할 수 있다. 왕족 출신이나 귀족출신이었다.[8] 택주는 후궁칭호에는 잘 쓰이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널리 쓰여 왕족이 아닌 공신의 처, 왕비나 후궁의 어머니 등 왕실의 인척 여성이 쓰기도 했다. 목종 때 요석택궁인(邀石宅宮人)이라는 칭호가 보여 궁인의 칭호가 택주로 발전했을 가능성도 보인다. 또한 강종의 서녀가 정화택주(靜和宅主)의 칭호를 받았으므로 딸이 어머니의 작위를 따라갔던 궁주 등의 고려의 칭호로 미루어 볼 때 궁인의 칭호가 동시에 딸에게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9] 여기서는 보통 목종부터 원나라 간섭기 이전인 원종까지 일컫는다.[10] 궁비(宮妃)나 원비(院妃)가 사용되기도 한다.[11] 왕후나 왕비가 중궁(中宮)이기는 했지만 조선시대와 달리 ㅇ비(妃)와 엄격한 차이가 있지 않았다.[12] 주로 ㅇ비라고 봉작을 내리다가 죽은 뒤 귀비, 덕비, 현비, 숙비 등으로 추증하였다.[13] 정종의 왕후 용화왕후는 처음엔 혜비(惠妃)로 책봉됐고 후에 정신왕비(定信王妃)로 봉했다. 죽은 뒤 용신왕후라고 추증했다.[14] 정화궁주충선왕의 3비 정비(靜妃)는 본래 왕족 출신의 정비(正妃)였지만 밀려났고, 왕후로 추존받지 못했다. 공민왕의 3비 익비는 왕족 출신이지만 '정비 사후 들인 새로운 정비'가 되지 못했다.[15] 고려사 현종 후비 열전 "원성태후는 연경원주(延慶院主)라고 불리다가 아들을 낳자 원(院)을 고쳐 궁(宮)으로 고쳤다."[16] 고려사 현종 후비 열전 "흥성궁주와 경흥원주는 두 분 다 선왕의 비이니, 돌아가신 부모를 섬기는 예에 따라 두 분에 대한 예우가 달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70914&categoryId=49632&cid=49632 [17] 공주 역시 건물을 내려 그 건물의 이름을 따서 칭호를 정했다. 간혹 고려 초기 왕자나 왕족이 이렇게 불린 경우가 있다. 문원 대왕의 아들 천추전군(千秋殿君)이나 정종의 아들 흥화궁군(興化宮君)이 예이다.[18] 태후가 거주하는 곳의 건물 이름은 주로 ㅇㅇ전이었다.[19] 흔히 고려의 족내혼은 초기의 경우가 널리 알려졌지만, 고려는 멸망 때까지 왕실의 전통을 지켰다. 특히 공주의 경우 더 엄격해서, 족내혼을 하지 않은 경우가 손에 꼽힐 정도이다.[20] 고려의 적서 개념은 조선시대와 많이 달랐다. 고려시대 때는 장유유서 순으로 적서를 따졌다.[21] 대비를 추증[22] 원 간섭기 이후 왕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 왕대비는 왕태후의 격하된 버전이다. 국대비는 공양왕 이후 왕대비와 구분해 공양왕의 생모 복녕궁주를 국대비라고 불렀다.[23] 고려 중후기 궁주와 원주에 해당한다. 보통 왕족 혹은 귀족 출신 혹은 옹주에서 승격한 자.[24] 충선왕 때 공주와 후궁 창호인 궁주를 옹주로 고치며 처음으로 등장했다. 충선왕 때에는 궁주를 대체했지만 이후에는 과거 궁주가 왕의 딸이나 귀족 혹은 왕족 출신 후궁에게 쓰였던 반면에 정작 옹주 칭호는 기생, 노비 출신 후궁을 봉하고 왕실 여인들 사이에서 남발되었다.[25] 택주는 후궁 칭호에는 잘 쓰이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널리 쓰여 왕족이 아닌 공신의 처, 왕실의 인척 여성이 쓰기도 했다. 목종 때 요석택궁인(邀石宅宮人)이라는 칭호가 자주 보여 궁인의 칭호가 발전했을 가능성도 보인다.[26] 충선왕 때 궁주를 옹주로 고쳤으나... 정작 옹주는 궁주보다 낮게 사용되어 출신이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후궁 등에서 보인다. 그러다 공양왕 3년 왕자의 정비(正妃)와 왕의 유복(有服) 동성자매(同姓姉妹), 조카딸, 군(君)의 정처(正妻) 등에 한하여 사용하게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때 그대로 이어진다.[27] 고려는 적서 차별의 개념이 달랐다. 먼저 태어나거나 먼저 들어온 부인 순으로 적서를 따졌다. 장남은 태자가 됐고 대신 신분의 차별이 엄격해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 비나 비의 소생은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했다.[28] 단 광주원군을 보위로 올리려 했다는 부분은 진정성을 의심받고 왕규 측이 패배자이기에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많이 받는다. 정황상 왕식렴의 난이라고 봐야한다는 말도 있고, 왕식렴에게 왕규, 박술희 등의 혜종파가 학살당하고 왕식렴의 거사의 명분을 위해서 왕규가 누명을 뒤집어쓴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29] 심지어 이분은 전 남편과의 자녀가 8명이나 있었다.[30] 프랑스의 왕비로서[31] 스페인의 왕비로서[32] 본명은 마틸다이며 잉글랜드의 왕위를 두고 스티븐 왕과 오랫동안 분쟁을 벌였다.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하기 전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의 아내였으며 이때 제국신민들에게 불리우던 호칭이 모드 황후.[33] 여기는 황후 대신 황비를 사용한 경우만 해당(어느 비공사 시리즈처럼 일부러 이렇게 표기한 경우도 있지만, 보통 이런 경우는 고증 오류로 인한 것이다.). 보통 황비는 황후와 후궁을 통틀어 일컫는 명칭 중 하나로 사용되는데, 간혹 황후 바로 다음의 후궁인 황귀비의 줄임말로 쓰이기도 한다(보통 황귀비의 줄임말은 '귀비'.).[34] 필체를 읽기에 따라 하정. 일본판에서는 하정이라 번역되었다.[35] 원래는 황후의 곁붙이 노릇을 하던 후궁이었지만, 황후의 승하 후에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위험에 쳐하는 것을 보고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여 황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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