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r2016103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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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생애를 다룬 드라마에 대해서는 다산 정약용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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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若鏞, 1762(영조 38년)~1836(헌종 2).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은 아껴쓰는 데 있고, 아껴쓰는 근본은 검소하게 말하는 데 있다. 검소한 연후에나 능히 청렴할 수 있고, 청렴한 연후에나 능히 자애로울 수 있으니, 검소한 자가 되는 그 자체가 백성을 다스리는 수장의 의무다.

이 편지가 번화가에 떨어져 나의 원수가 펴보더라도 내가 죄를 얻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써야 하고, 또 이 편지가 수백 년 동안 전해져서 안목 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더라도 조롱받지 않을 만한 편지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름
정약용
출생
1762년(영조 38년) 음력 6월 16일, 양력 8월 5일
사망
1836년(헌종 2년) 2월 22일
출생지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現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1])
사망지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 본가
아호
다산(茶山)
종교
유교(성리학), 실학
분야
과학, 실학
주요활동
과학기술, 학문연구
1. 개요
2. 생애
3. 사상과 문학
4. 저서
4.1. 천주교 신자
5. 가족
6. 기타


1. 개요


정치학, 철학, 통치학부터 과학, 실용학까지 '높은 수준'으로 '다양한 것들'에 몰두했던 조선 역사상 손꼽히는 천재
조선문신(文臣)이자 학자. 1762년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現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나주.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籜翁)·태수(苔叟)·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등이 있다.
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는 문도(文度). 경술국치 9일 전인 융희 4년(1910) 8월 20일에 내려지면서 조선 왕조의 거의 마지막 시호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조선 후기 최고의 유학자 중 한 명으로, 원효대사와 함께 한국철학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와는 다르게 생애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풍석 서유구는 듣보잡 취급. 기존의 성리학을 답습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학자로 분류된다. 유배당했을 때 쓴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가 대표작. 현재는 그의 학문체계를 그냥 다산학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는 다산학 (Journal of TASAN Studies) 이라는 저널을 6개월에 한번 정기적으로 발행해오고 있다.
한국에서는 한 개인과 관련되어 가장 많은 논문이 발표된 인물이며, 그런 상황이지만 아직도 해석이 분분한 (심지어는 극단적으로 갈리는) 면모를 가지고 있는 인물. 참고로 윗동네에서는 조선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꼽는다고 한다. 여전제가 공동경작 공동분배를 기초로 하기 때문에. 정작 그의 저작물인 목민심서는 금서지만
좌우간 경세제민을 널리 실현코자 한 당대 최고의 휴머니스트다.
당시 남인들이 가톨릭을 자체적으로 수용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정약용도 가톨릭을 깊게 이해했으나, 나중에는 철저히 거부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해서는 아래 문단 참조.

2. 생애


1762년, 즉 임오화변이 일어나던 해에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現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4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1783년 회시에 합격, 1784년 이벽 세례자 요한에게서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성균관 유생 시절부터 정조의 눈에 들어 예쁨을 받았으나 최종 시험인 대과에는 계속 미끄러진다. 그것도 공부를 못 해서가 아니라 성균관 시험에서는 툭하면 1등을 먹는데 대과만 보면 떨어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1년 내내 모의고사 만점 받다가 갑자기 수능날 망치는 케이스.
이를 남인인 그를 견제한 노론의 입김으로 보는 음모론도 있는데, 남인 영수인 채제공이 주재한 시험에서 정약용이 합격한 것이 이 음모론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이보다는 그냥 정약용이 실전에 약한 타입이었고 단지 채제공이 시험감독관의 권한으로 봐준 수준에 가까운게 더 합리적이다. 하도 대과에 못 붙으니까 정조가 그를 불러서 한탄했고 정약용이 울면서 어전을 물러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와 다른 입장도 있다. kbs역사저널 그날이란 프로그램 71회에서 정약용에 대해 다루는데 단국대 사학과 김문식교수는 남인계열인 정약용이 갑자기 출세하거나 급제하면 노론의 공격을 받게될까 우려해 정조가 일부러 천천히 급제시켰다라는 식의 발언을 한다. 그리고 프로그램 자막으로 사암연보에 관한 기록을 보여주며 방송차원에서 이 사실을 입증한다. 당시 자리에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인 신병주 교수와 ebs강사이자 대광고 한국사 교사인 최태성 교사도 동석했는데 따로 이의제기하거나 첨언이 없는걸로봐서(평소에 다른 견지를 가지면 에둘러서 짚고 넘어가는 분들이다) 이 두 사람도 같은 입장인 것 같은데 전문가들의 말을 가지고 입증하려는건 논리학 입장으로 보면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일 수 있겠지만 위키편집자들과 대학교수 둘 그리고 역사교사를 놓고 비교하면 후자쪽에 신뢰가 가는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혹 이 부분에 대해 제대로 아는 분이 있으면 차후에 수정 바랍니다..

마침내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등용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10일만에 풀려난다.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거중기를 개발하여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이었던 수원화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단순한 유학자를 넘어 당시로서는 매우 수준높은 기계공학자이기도 하다. 보통 산업혁명 이전시대의 철학자들이 공학자이기도 한 경우가 제법 많았다. 아리스토텔레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도 있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 연천 현감 김양직의 비리를 고발하여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허나 이 일은 후에 그의 발목이 잡히는 큰 계기가 된다. 서용보는 이 때 파직되었음에도 화려하게 부활하여 후에 44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즉, 삼정승)의 반열에까지 오른다. 순조정순왕후 김씨의 총애가 깊어 이를 기반으로 권세를 휘두른다고 당대 유생들에게 비난을 듣기도 했다. 훗날 정조의 실록을 편찬하는 편찬위원에까지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정약용을 괴롭힌다.
이후에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그의 두 형과 함께 장기에 유배되었다. 노론에서는 정 씨 형제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만 순교를 택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하여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유배지는 경상도 장기현(현재 포항시 장기면)이었다. 이후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일으킨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이 강진이 그의 외가가 있는 지역이었고, 외가의 장서량이 상당했기에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정약용의 외가는 해남 윤씨다. 해남에 있는 녹우당이 해남 윤씨의 종가로, 자체적으로 장서를 수집해 만권당이라는 장서각을 지어놓았다. 바로 이 집안이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종가다. 따라서 신위를 불태워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는 정약용과 먼 외가 친척사이가 된다.
처음에는 정치제도를 새롭게 수립하는 방례초본을 만들었으나, 자신의 처지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근본적 제도개혁은 포기하고 기존 제도의 개정을 논하는 <경세유표>를 썼다. 목민심서는 지방관이 부패하지 않도록 권고하기 위한 책이고, <흠흠신서>는 공정한 재판을 논한 책이다. 실학뿐만 아니라 조선의 유학 전체를 아우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1818년 8월에 귀양이 풀려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1836년 2월 22일한국 나이로 75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18년이라는 오랜 기간동안 유배되어 그동안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당연히 연구의 성과가 나타나는 유배 후반기에 탈고된 것이 많다. 그를 공격한 노론 벽파가 몰락했지만 당시 정국에는 한바탕 평지풍파가 일어났었기에 조정에서는 정약용의 유배를 잊어버리고 석방하지 않았다. 아들들이 가끔 석방을 위해 격쟁 즉, 왕의 행차에 꽹과리를 치면서 왕에게 억울함을 호소한 기록도 있고, 그의 죄안을 삭제하려다가 도리어 공격당하는 기록도 있다.
아암 스님에게서 다도를 배워서 다산이라는 호가 생겼다는 설도 있고, 목민심서에서는 자신이 유배당한 장소의 됫산이 다산이라서 호를 다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초의 스님이나 추사 김정희 등과도 서신 왕래를 하는 등의 교류를 했다. 그리고 이들 중 1811년에 죽은 아암 스님을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친교를 유지했다.
주요 서술로는 여유당전서 500여권에 포함되어 있는 사서 육경에 관한 저작들, 경세유표, 목민심서, 3론, 흠흠신서, 마과회통, 아방강역고, 아언각비, 아학편 등이 있다. 500여권의 전서중 연구 및 번역이 이루어진 것은 그 반 정도. 워낙 학문 분야가 광범위해서 고르게 연구가 되지 않았다는 평도 있다. 그래서 아예 다산학이라고 따로 분류할 정도다.
결론적으로 유학자 겸 실학자 겸 정치가 겸 법과 형사재판, 그리고 법의학에도 일가견이 있으며 지리학과 의학에도 손을 댔으며 언어학자, 아동교육학자, 필력 좋은 작가 겸 시인, 건축가, 이하 다수라고 할수 있겠다. 그야말로 프로페셔널.
평소 법의학에 관한 저서를 저술하기도 했고 본인도 영민한 인물이라는 점이 반영되었다. 흠흠신서에선 조선시대 벌어진 살인사건들에 대하여 상세한 사건 내역과 해결, 범인들에 대한 이야기 및 미지의 사건으로 끝난 살인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까지 싣고 있다.
그런데 그 사건 가운데에선 인체발화 사건까지 들어가있다. 1808년 두 남녀가 타죽었는데 옷은 멀쩡하고 사람만 재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방화라고 하기에는 방바닥조차 탄 잿자국 빼곤 깨끗해서 당시 포도청들 사건 기록도 미해결로 끝났는데 정약용도 이 사건을 미해결로 처리한다.
현대법학의 측면에서 본다면 정약용의 방법론은 상당히 고전적이고 보수적인 측면이 강하다 할 수 있다. 흠흠신서에서 고을 수령이 괜히 자비를 배푼답시고 강력 범죄자의 처벌을 가벼이 하는 것은 쉽게 재범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니 일벌백계가 옳다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법학의 사상적 바탕이 되는 여러 학문들과는 전혀 다른 학문적 배경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에 정약용의 방법론에 대한 현대 법학적 관찰에는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
그래서인지 <영원한 제국>, <원행> 등의 정조의 시대를 다룬 소설 등에서는 정적의 행동을 사전에 간파하는 기민한 탐정의 역할을 맡는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조선추리활극 정약용>이라는 퓨전사극도 방영된 바 있다.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의 명탐정이 정조 시대라 및 나머지 사항(죄다 스포일러다. 해당 문서 참조.)을 미루어볼때 정약용을 기반으로 한 캐릭터인 듯하다. 심지어 가제도 조선명탐정-정약용이었다고 한다.
탐정 역할로 나오지 않더라도 영민하고 다재다능하고 실학에 밝았던 선구자라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강해, 이산, 성균관 스캔들 등 사극에서도 지혜롭고 선한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산에서는 극 후반에 등장하여 활약상이 많지는 않으나 홍국영 퇴장 후 그를 대신하는 정조의 에이스로 활약한다. 학식이 뛰어난 먼치킨이나 과거 대과에는 번번히 낙방하고 있었으며, 성균관 담을 넘어다니다가(...) 평복 차림으로 미행중이던 정조 이산과 만나게 된다. 자기를 떠보는 정조의 말을 믿지 않고 '네가 왕이면 나는 영의정이다'라고 비웃지만... 기존의 정약용 이미지대로 온갖 첨단 과학지식을 활용하여 위기를 극복하거나,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백성들을 돕는 등 진보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인의 모습이 강조된다.
성균관 스캔들에서는 안내상씨 특유의 개그 연기가 잘 녹아 들어가 더욱 개성있는 캐릭터로 탈바꿈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어린 정약용이 나왔으며 에필로그에서 성인이 되어 과거에 급제하여 정조 앞에 나아가는 장면이 나왔다. 이후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안내상씨가 정약용으로 다시 열연했다. 전작과는 달리 노년의 모습.

3. 사상과 문학


기본 베이스가 유학자인만큼 사서 육경에 관한 해석들이 있다.
  • 경세유표 : 정조를 성인으로 여기며, 그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에 대해 감사해했던 사람이 정약용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 책에서 규장각, 장용영, 초계문신의 존재를 모두 비판한다. 특히 초계문신의 경우에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학문과 정치의 자유로운 소통을 막는 제도라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이렇듯 그는 사사로운 인연에 얽매이지 않고, 성역없이 비판했다
국가 행정론, 목민심서는 지방 행정론으로 관리가 백성을 다스릴 때 취해야 할 자세를 적었다.
  • 마과회통 : 종두법에 대해 다룬 의학서다. 엄밀하게는 마과회통의 주 내용은 마진, 즉 홍역에 대한 연구를 다룬 의학서이며 이 책에 부록으로 박제가와 같이 연구했던 종두법이 수록되어 있다. 이 뒤에는 자식들을 천연두로 잃은 안타까움이 서려 있다. 정약용 본인부터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다가 당시 천연두 치료로 이름이 드높았던 이헌길의 치료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오른쪽 눈썹에 마마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 훗날 '삼미(三眉)'라 불리었고, 6남 3녀를 뒀는데 4남 2녀를 잃었다.

  • 타맥행(보리타작노래) : 국어 부문에서도 이름이 종종 보인다.
  • 3론 :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라는 주장도 펼쳤다. 현대에 와서 당연하지만 옛날로서는 조금 위험하다는 발언도 있는데 옛날부터 그랬다. 맹자의 역성혁명도 관계있다.
  • 흠흠신서 : 형조 계열의 작품으로 형리에게 공명정대한 판결을 위해선 뭘 해야하는가에 대해 조언하였다.
  • 아방강역고 : 지리서.
  • 아언각비 : 언어 계열 작품으로 출처가 모호하거나 와전된 언어 200여개를 정리한 것으로 거의 박물지 수준이라고 칭해진다.
  • 아학편 : 천자문이 어린이들한테는 어렵다 싶어서 쉽게 볼수 있는 사물 관련 어휘 2,000개를 상 하로 나누어서 만든 어린이용 한자단어책이다.
정약용은 유학자 중에서도 주자의 사서집주를 주체적으로 비판하기도 하여 보통 실학자로 분류된다. 그러나 성리학을 근본으로 부정한 인물은 아니다. 다산의 저서의 내용 자체가 성리학의 기본적인 전제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책도 안 읽어보고 지레짐작하지 말자. 참고로 다산이 가장 존경한 학자가 주자였다. 과거 역사학자들은 다산이 성리학을 깨부수고 자본주의적 사상을 세운 사람으로 평가했었는데, 지금은 부정되었다. (최익한 ,'실학파와 정다산', 청년사,1955)
현재 유학계에서는 정약용의 유학에 대한 관점을 주자에서 공자로의 회귀라고 보고 있다. 당대의 성리학자들은 주자의 해석을 따르고 감히 주자를 비판하지 못했다.
그런데 정약용은 주자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받아들여 '논어고금주'란 논어 주석본의 통합본을 펴내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오규 소라이와 같은 일본의 유학자들의 해석까지 참고한 것은 대단한 점. 그런데 '일본이 이렇게 유학이 발달했으니 이제 일본은 조선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란 생각을 한 건 빗나갔다. 일본은 서양 학문을 받아들였으니까.
그러한 점 등 이런저런 이유로 2000년대에 접어든 현재에도 유학과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유학자. 졸업 논문을 써오면 90%가 정약용에 대해 써 오는 신나는 일이 벌어진다.
애절양이라는 노래도 기록했다. 이는 백성들이 군역의 고통에 시달린 나머지 '이렇게 아이를 낳은 내 물건이 죄다'라는 의미에서 고자되기를 선택해버린 안타까움을 담고 있다. 시의 형식은 지키면서도 그 내용은 민중의 고통을 정면으로 다룬 것으로 시의 내용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것으로 유명하며, 시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시는 시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비판하였다. <애절양>은 한국 역사에 남은 사회비판 시가 중에서도 손가락 내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명시라서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되는 시다.
당시 폐단이 심했던 풍수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에 대해 비판한 적도 있다. <풍수집의>를 통해 풍수 자체를 학문적으로 분석한 적도 있지만, <풍수론>에서 '말라 비틀어진 뼈가 어떻게 산 사람에게 복을 내릴 수 있는가'라며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정약용 자신이 죽을 때도 유언으로 '괜히 명당 찾으려고 지관에게 물어보지 말고 그냥 고향 뒷산에 묻어 달라'고 할 정도였다. 유언대로 다산은 광주 마현의 고향집 뒷편 언덕에 묻혔다. 재미있는게, 현대의 풍수 전문가들 중에는 정작 정약용의 묘소가 훌륭한 명당이라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 행정구역이 변한 지금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속한다.
문학적으로도 굉장한 성과를 냈다. 여러 문학론을 전개하는 한편 시문학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중국의 것을 벗어나서 조선시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내용과 표현 면에서 독특한 작품들을 여럿 창작했다. 그러나 당대 사대부들의 문자가 한문이었기 때문인지 결국 한시만을 중점적으로 남기는 데 그치고 국문시가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소설문학 쪽에는 비판적이어서 당대에 흥미 위주로 유행하던 소설들을 모두 퇴출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는 북학파 쪽의 실학자이며 문학자로 유명한 박지원과는 대비되는 부분이다.
사상적 측면에서는 박지원 쪽이 더욱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웠던 반면 정약용은 냉철하고 꼼꼼한 면이 더 강하다. 소설을 배격한 것도 그 내용이 현실의 문제를 바르게 인식하고 바로잡기보다는 흥미 위주의 허무맹랑한 쪽으로 흘러가는 데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소설은 카타르시스적 역할도 하기 때문에 이런 작품들 또한 사회적 관점에서 충분히 효용성이 있지만 이건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얘기고. 유교적 전통으로는 희곡작가들 다 잡아족쳐야 한다는 플라톤식이 아무래도 대세.
아마 요즘 자기 자신을 소재로 한 소설이나 영화 등이 유행하는 걸 보면 뒷목 잡았을 듯.
또한 중농학파의 실학자로서 여전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여전론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정전론을 주장하여 토지제도의 개혁을 요구하였다.

4. 저서


자세한 내용은 정약용/저술 참고.

4.1. 천주교 신자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 중 하나라는 사실도 유명하다. 세례명요한.
이벽,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권철신, 이총억 등 남인 계열 학자들과 함께 천진암에서 천주교 서적들을 읽고 토의하곤 했는데 그들은 천주교를 신앙으로써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였던 천진암한국 천주교의 시발점으로서 성지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후 행적에 논란거리가 있으며 한국 천주교 입장에서는 X맨 같은 존재.
본래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였지만, 신해박해(1791년) 당시 조상의 제사를 불허하는 교황 비오 6세의 교서가 내려지자 대부분의 양반 신자들과 함께 배교하였다. 이후 신유박해(1801년) 때 권철신 암브로시오, 황사영 알렉시오 등 다른 교우를 고발했다.
나아가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를 추쇄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믿음이 약하고 사리분별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노비어린이를 중점적으로 심문하여, 천주교 신자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방법이었다. 어떻게 보면 심리적 심문의 한 방법이니 천재적 발상이긴 하다. 덕분에 북경 천주당에서 서양인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자 정약용의 매부이기도 했던 이승훈 베드로는 정약용에 대해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을 죽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분노했고, 다른 신도들에 대해서는 모두 입을 다문 반면 정약용은 자진해서 자신이 세례를 주었다고 자백할 정도였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후 행적. 과연 이후에 정약용이 배교자로 남았는지, 아니면 회개하고 천주교로 원복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정약용이 천주교를 믿었음을 후회하는 글을 여럿 남겼으며, 아무도 볼 위험이 없고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묘지명(자찬묘지명이라 부름)에서조차 천주교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이유로 정약용이 끝까지 배교자로 남았다고 간주하고 있다.
반면 샤를르 달레 신부의 <조선천주교회사>에는 약간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를 주요 참고문헌으로 작성했다고 하나 <조선복음전래사>가 실존하는 서적인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많다. 달레 신부는 이 책이 박해기간 중에 땅에 묻혀 유실되거나 가족들이 비본(秘本)으로 소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실재로 고종 때 정약용 문집이 <여유당 전서>로 출간되었을 때 공개되지 않은 저서가 일제강점기에 출간되기도 했는데, 거기에 <조선복음전래사>는 없었다. 허나 일제강점기에 공개된 비본 중 앞서 언급한 자찬묘지명과 신유박해 때 유배간 친지들 묘지명이 있었다. 이에 실제 <조선복음전래사>라는 책은 없고, 달레 신부가 정약용의 묘지명들을 그리 부른게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일단 이 <조선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정약용이 배교 행위에 대해 참회하였으며, 수시로 몸에 고통을 가하는 보속행위를 하였고, 죽기 전에는 마침 조선에 들어와 있던 중국인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2]에게 병자성사를 받았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동일한 얘기가 정약용의 집안에서 구전되고 있다고 한다. 기록이 없는 것은 천주교로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 상태니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원복했다는 기록을 남기긴 힘든 상황이기도 하고 실제로 삼남 정약종 집안은 나주 정씨 문중에서 축출되었다가 1961년 원복하였다.
결정적인 증거 중 하나로는 무덤을 이장하기 위해 발굴했을때 십자고상이 실제로 출토된 것으로, 현재 이 십자고상부산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사후에 천주교를 믿던 그의 친족들이 넣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상기했듯 정약용이 배교하여 다른 신자들을 체포하는데 적극 협력해서 천주교인들의 원수쯤으로 생각되고 있었는데 다른 신자가 십자가를 함께 묻어줬다는 건 다소 상상하기 어렵다. 확실한 건 정약용의 장을 치르고, 관에 유해를 넣을 때 다가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람이 천주교인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한 동네에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형수 유소사 체칠리아와 조카딸 정정혜 엘리사벳도 살고 있었다. 정약용의 직계 후손도 4대손부터 천주교로 분명하게 원복했고, 그 전에도 박해를 피해 대놓고 천주교 신자임을 드러내지는 않아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구전이 전해진다.[3]
일단 한국 천주교에서는 딱히 정약용을 교회의 위인으로 밀고 있지는 않다. 한국 천주교신유박해 당시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추진하였지만, 이 당시의 배교로 인하여 정약용 요한은 시복시성에서 제외되었다는 것만 봐도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에서 정약용을 위인으로 삼는 것과 시복시성은 약간 뉘앙스가 다른 문제다. 정약용은 일단 순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복시성이 추진되더라도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최양업 토마스 신부와 같이 '증거자'에 들어야 하는데 당연히 조건에 한참 미달한다. 정약전천주교 신자였던 것은 정황상 맞는데 세례명 자체가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일부 신자들이나 박물관을 중심으로 정약용을 천주교의 위인으로 밀고는 있다. 그 때문에 한문학과 한국철학 전공자들 사이에서는 천주교가 정약용의 사상적 공헌을 독점하려는 행위 아니냐는 비판을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다.[4] 다산학을 연구하는 한 한문학자는 정약용이 천주교인이었냐는 질문에 "아직도 그런 얘기가 돌고 있느냐??"며 분노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
이게 중요한 이슈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한국 철학사를 다시 쓸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정약용의 사상적 기반이 유신론에 있는지 무신론에 있는지를 가늠하는 단서라는 것이다. 물론 단적으로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 규정하기보다는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적어도 그가 천주교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말도 있고, 유신론에서도 동양의 옛 사상과 크로스하여 학문적 장치로서 활용했다는 연구도 있어 연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벙찌게 만들고는 한다. 확실한 건 정약용이 초기에는 확실히 천주교 신자였다는 것이다. 동시에 유학자기도 했고.

5. 가족


정약용이 다른 형제들에 비해 월등하게 유명하긴 하지만, 사실 정약용의 형제는 모두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나다.
맏이인 정약현은 그나마 유명세가 없다. 그래도 어엿한 과거 합격자. 이 사람의 사위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조정의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를 불러온 황사영이다. 황사영의 아내 정 마리아[5]는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황사영과 정 마리아의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에서 자랐다.
둘째인 정약전흑산도 유배 이후 섬 주민들과 가깝게 지내며 책 하나를 쓴다. 그것이 그 유명한 자산어보. 정약용이 "사람들은 내가 뛰어나다고 하는데 사실 우리 약전이 형이 나보다 낫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셋째인 정약종은 한국 천주교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세례명아우구스티노. 본래 도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 그는 형제들 중에 가장 늦게 천주교를 받아들였으나,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회장이었고, 신유박해 당시 약전, 약용과 달리 끝까지 배교하지 않아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그 순교 과정이 흠좀무한데, 설화에 따르면 처형 때 하늘을 보고 죽겠다며 누워서(!) 망나니의 칼을 받았고, 첫 칼질이 잘못되어 목이 반만 잘리자 일어 앉아서 성호를 긋고 다시 칼을 받아 처형되었다고.[6] 124위 복자로 시복되어 있다.
정약종의 가족은 특히 신실한 집안이었는지 엄청난 피바람이 불었다. 차남 정하상 바오로는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기 위해 30년 동안 동정을 지켰지만,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며 한국 103위 순교성인으로 시성됐다. 약종의 장남인 정철상 가롤로도 순교자고, 약종의 후처 유조이 체칠리아[7]와 딸 정정혜 엘리사벳 역시 한국 103위 순교성인이다. 장남 정철상 가롤로도 124위 복자로 시복되었고, 시성 심사에 들어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정조대 명재상 채제공과 정약용 형제는 사돈어른과 사돈총각 관계이다. 정약용이 어머니를 여읜 후 정약용 형제를 키운 서모 김씨의 큰딸이 채제공의 유일한 혈육이자 서자인 채홍근과 결혼했다.
차남 정학유는 역사학적으로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농사 지침 가사', 농가월령가를 저술했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보건대 다산의 아버지인 정재원은 자식농사 하나는 대박을 쳤다고 볼 수 있겠다. 덤으로 윤지충 바오로 역시 정약용의 고종사촌.
여담으로 정약용은 외가쪽으로도 인연이 있는데, 정약용의 어머니인 윤씨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의 손녀이다. 즉 정약용은 윤두서의 외증손이며 해남 윤씨 가문은 정약용의 외가가 된다. 더 올라가면 윤선도가 윤두서의 증조부이므로 이쪽으로도 연결이 된다.

6. 기타


정조가 초계문신제를 통해 직접 키운 대단한 인재이고 그의 정치 활동은 사실상 정조가 죽은 뒤 끝나기 때문에 정조를 묘사할 때는 열에 아홉은 정약용이 언급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실록에서 정약용의 기록은 서학(천주교)과 관련하여 나온 게 전부다. 정약용이 활약했다던 화성건축에서도 그가 언급된 기록은 전무하다. 어쩌면 정조실록 편찬위원이었던 서용보가 의도적으로 검열삭제했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실록에서는 정약용의 약점인 서학에 관련된 기록만 돋보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실감나는 부분이다. 이후 순조실록에서는 효명세자와 순조가 죽기 직전에 정약용의 의학지식을 높이 사 그를 불렀던 기록이 있다. 하지만 둘다 너무 늦어서 미처 정약용이 도착하기 전에 사망하였다.
정약용은 을 잘 못했는데 정조는 애주가 중의 애주가라서 정조가 술 따라줄 때는 정약용 본인도 영 힘들었던 듯. 하필 정조의 술버릇이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간다는 주의였으니......소주를 필통에 따라줬다는데, 요즘으로 바꾸면 500cc 맥주잔에 보드카!!를 따라준 격, 아니 혹은 그 이상이다.[8] 이 때문인지 정약용은 자식들에게 편지로 교육하면서 술을 가급적 피하고, '원샷'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며 술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나는 태어난 이래 아직까지 크게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어, 나 자신의 주량을 알지 못한다. 포의(布衣)로 있을 때에 중희당(重熙堂)에서 삼중소주(三重燒酒)를 옥필통(玉筆筒)에 가득히 부어서 하사하시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마시면서 ‘나는 오늘 죽었구나.’ 라고 마음속에 혼자 생각했었는데, 몹시 취하지 않았었다. 또 춘당대(春塘臺)에서 임금님을 모시고 고권(考券)할 때에 맛있는 술을 큰 사발로 한 그릇 하사받았는데, 그때 여러 학사들은 크게 취하여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리하여 어떤 이는 남쪽으로 향하여 절을 올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연석(筵席)에 엎어지고 누워 있고 하였지만, 나는 시권(試券)을 다 읽고, 착오없이 과차(科次)도 정하고 물러날 때에야 약간 취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너희들은 내가 술을 반 잔 이상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참으로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는 것이다. 소가 물을 마시듯 마시는 저 사람들은 입술이나 혀는 적시지도 않고 곧바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무슨 맛이 있겠느냐. 술의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는 것이다. 저 얼굴빛이 주귀(朱鬼)와 같고 구토를 해대고 잠에 골아 떨어지는 자들이야 무슨 정취가 있겠느냐. 요컨대 술마시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대부분 폭사(暴死)하게 된다. 술독이 오장(五臟) 육부(六腑)에 스며들어 하루아침에 썩기 시작하면 온 몸이 무너지고 만다. 이것이 크게 두려워할 만한 점이다.

다산시문집 권21 <유아(遊兒)에게 부침>

상단 생애에 언급된 정약용과 차의 관계에 관련해서 더 첨언해 보자면 확실히 그는 차(茶)의 달인이다.
위에 기술되었다 시피 정약용은 한방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아암선사에게서 배우기 이전에도 본래부터 차에 관심이 많았으며 스스로 능히 독자적 연구와 제조마저 가능하였다. 다산초당에서 칩거할 당시 호구지책을 강구하는 와중에서도 차를 재배하였고 이를 일종의 약으로 이용하였다. 특히 한방의 구증구포(九蒸九泡)의 원리로 차를 달이고 농축해 장기간의 보존이 가능하도록 '떡차'를 주로 만들었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정약용과 한반도에만 전래되는 차의 제조방식이다. 다만 그는 차를 즐겨 음용하는건 한민족의 체질상 알맞지 않고 건강을 다스리는 일종의 약의 연장선으로 여긴 흔적이 명확하다.
고려시대 이후 조선조에 억불과 멸불정책의 반복된 시행과정과 성리학의 지배가 장기화되어 중국의 다예茶藝 일본의 다도茶道가 흥성하는 와중에도 유독 차의 위상이 조선에선 맥을 추지 못한다. 이렇게 한반도의 차茶 문화가 대다수 소실되는 와중에도 그 맥은 계속 이어져 갔는데, 초의선사는 오늘날 한국의 차 연구에서 선구적인 인물로 존재한다. 바로 이 초의선사에게 떡차를 비롯해 차를 가르친 이가 바로 정약용이리라 학자들은 짐작하고 있다.#
활쏘기, 말타기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학자임을 감안한다면 이상한 것도 아니지만. 여유당전서에 직접 써놓았는데 정약용 뿐 아니라 규장각 각신들은 하나같이 10순(50발)을 쏴서 4발도 못 맞췄다고 한다. 덕분에 자신을 비롯한 규장각의 각신들을 정조가 북영(북한산성)에 가둬두고 20순(100발) 중 최소 20발은 맞춰야 풀어주게 했다. 나중에는 5발 중 3발을 맞출 정도로 실력이 향상되었다고 적어놓았는데 그 와중에도 깨알같이 정약용 본인이 가장 으뜸이었다고 자랑한다. 정약용 본인도 선비의 육예 중 두 가지를 못 하는 것에 대해 자신 활쏘기 훈련 부족 뿐 아니라 무를 천시하는 세태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며 한탄했다.
고향이 현재 남양주시 영역이다. 엄밀히 말하면 고향은 남양주가 아니라 광주다. 현 남양주시 조안면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광주부 초부면이었다. 당시에는 남양주도 없었고 양주군)로 넘어온 것은 구한말인 1906년의 일이다. 현재 남양주시에서 마스코트로 활용하고 있다. 남양주 내 여러 학교들에서 우려먹고 있다.
서강대학교의 D관(다산관)은 그의 호를 딴 것이다. 그런데 서강대학교의 건물 이름은 가톨릭 관련 인물을 중심으로 정해지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배교 문제가 얽혀 있어서...
한국기술교육대학교에도 '다산정보관'이라는 이름의 도서관이 있다. 한기대의 이념인 '실사구시'에 꼭 어울리는 인물이라 따온것으로 보인다. 1층 내부에 영정과 업적이 기록되어 있고, 도서관 앞에는 '다산 선생께서 이 앞에서 담배피지 말라 하셨다!'라는 표지도 있다. 도서관의 외부 벽면과 엘리베이터가 전부 유리로 만들어져있어 상당히 멋진 외관을 자랑한다.
성균관대학교에도 다산 경제관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있다. 5층짜리인데, 강의실 보다는 학과 사무실, 교수 연구실, PC실...등등이 더 많다. 대부분의 경제학과 강의는 연결되어 있는 퇴계 인문관에서 진행된다. (이황의 호 퇴계 맞다.) 둘 모두 성균관 출신을 학교 건물에 쓴 예.
한편 호암관의 호암은 이병철의 호다. 호암관은 기업가였지만 인문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이병철 회장을 의도하여 지은 것...이라고 하면 꿰어 맞춘거고 그냥 재단 창립자이름 딴 것이다. 그래서 성대에서 학생운동이 고조에 이르던 시기에는 학생들이 호암관 명패를 떼버리고 현대 성균관대학교 창립자이자 유학자인 심산 김창숙의 이름을 따서 심산관이라고 고쳐버린 적도 있다.
성균관대 공대생들 사이에선 정약용을 우스갯소리로 시대를 앞서 나간 유학 + 경영 + 공돌이복수전공 대선배님으로 모시기도 한다.
강원대학교의 남자 기숙사 건물 중 하나의 이름도 다산관인데, 주변 기숙사(퇴계관, 율곡관)의 이름이 유학자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에 비추어 볼 때 그 전통을 지킨듯. 게다가 강원대학교의 교훈이 실사구시이기도 하다.
과거 서울산업대학교가 일반대 전환과 더불어 교명 변경을 추진 했을 때, 교명 후보 중 하나로 "다산대학교"가 들어가기도 했다. 이유는 실용학문을 중시하는 학풍과 정약용의 이미지가 맞는다는 것이었는데 출산장려 대학이냐는 지적에 결국 최종 후보에는 오르지 못했다. 이후 1순위였던 한국대학교가 교육부의 거부로 통과되지 못해서 결국 낙착된 이름이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대신 구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본관이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본관 건물이었으며 본관 신축 이전까지 서울산업대학교(現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본관이었던 시계탑 건물(등록문화재 제12호)이 다산관으로 명명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상태다. 학내 건물번호는 1번.
강원도 횡성 소재 민족사관고등학교에도 다산관이란 건물이 있다. 이 건물과 충무공 이순신의 호를 딴 충무관 두 건물은 민족사관고를 상징하는 건물이자 쌍둥이 수업동이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다산콜센터가 바로 정약용의 호를 딴 것으로. 정약용처럼 실생활에 필요한 모든것을 알려준다는 취지로 전화한통으로 해결할수있는 좋은곳이다. 부동산, 예술, 교통, 길찾기, 정보검색등등 심지어 요리레시피까지 알려준다. 이쯤하면 콜센터계의 구글. 인간의 조건에서도 멤버들이 다산 콜센터를 이용해서 레시피를 문의하는 장면이 나왔다. 서울시에서만 가능하며 전화번호는 02-120. 최근 욕설과 음담패설, 장난전화를 수시로 걸었던 인간말종들이 검찰에 고발당하기도 한 사건이 있었다. 혹시라도 장난전화를 걸 생각은 하지말자. 그분들 무지 피곤하신 분들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5만원권 지폐 인물 후보로도 올라간 적이 있다. 크게 역사적 여성 인물, 강점기 독립운동가, 과학기술인의 세 범주로 나뉘어져 있던 후보군에서 맨 마지막에 속해 있었는데, 이 중 과학기술인 도안을 지지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정약용에 대한 지지가 꽤 많았다. 대외적으로 문제 될 일이 없으며, 사상이 실용적이며 미래지향적이었고, 인간적인 평가도 훌륭했던 점에서 꽤 괜찮은 후보로 평가받았다.
주역에 뛰어나 미래를 예측하는 데 뛰어났다고 한다.
정조 암살설 떡밥을 최초로 던진 인물이다. 정조 사후에 심환지가 정조를 독살했다고 직접 언급한 최초의 인물인 셈.
참고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2006년 TV쇼 진품명품에서 한 건물주가 폐지 줍는 할머니에게서 구매한 책을 가지고 나왔는데, 이 책이 정약용이 직접 아들들을 위해 작성했던 하피첩(霞帔帖)으로 밝혀졌다. 물품을 가져온 사람은 예상가를 15만원이라고 적었는데 평가위원은 손을 떨면서 1억원 찍어준다. 2012년 7월 15일에 방영된 TV쇼 진품명품에서 다산이 직접 작성한 처방전이 최초로 발견되었다.
헌종 2년 2월 22일에 타계하셨다.
젊을 적엔 도박을 즐겨서 투전골패를 연구했고 기생들이랑 저포(주사위) 노름하다가 3천 전을 날린 적도 있었으나, 훗날 자신의 저서에서 도박을 경계하는 글을 남겼다.
어린 시절에는 하도 씻기 싫어해서 형수인 큰형 정약현(정약용과는 11살 차이)의 아내가 붙잡고 박박 씻기는 행사가 매일 일어났다고 한다. 장을 담그는 것처럼 집안에 큰 일이 있을 때 함께 저포놀이를 하며 놀아 주는 등 이 형수가 정약용을 많이 챙겨줬다고.
유사역사학자들은 한사군 한반도설이 식민사관이라 주장하는데 사실은 정약용도 한사군 한반도설을 주장 했다.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 참고.
또한 유사역사학자들이 툭하면 주장하는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를 되찾자'라는 식의 주장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 적이 있다. 원문('여유당전서 시문집 12권 요동론') 요약하면, 조선의 힘으로는 요동을 차지해도 나라에 피해만 크다는 주장이다. 경세제민을 주장하던 정약용다운 생각.
고교 윤리와 사상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주된 적 중 하나다(...). 퇴계율곡의 4·7 논쟁에서 이미 질려버린 학생들은 설상가상으로 정약용마저 여기에 참전(...)하여 성기호설性嗜好說을 제창하는 꼴을 보고 죄다 광탈을 당한다.
KBS 1TV에서 정약용의 일대기를 그린 다산 정약용이 2017년부터 방송될 예정이다. 배우는 연정훈. 방영 취소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참조.

[1] 오늘날 이곳에는 마재성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천주교 의정부교구에서 관할하고 있다.[2] 1834년 조선에 입국했다. 한국 가톨릭에서 활동한 2번째 외국인 사제. 프랑스인 모방 나 베드로 신부 등이 조선에 입국한 후,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는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출국했다.[3] 현재 정약용 직계 7대손인 정호영 클레멘스가 정철상과 정하상의 순교로 대가 끊긴 정약종의 후손까지 대표하고 있다.[4] 사실 천주교 입장에서도 정약용은 배교자이고, 원복했다는 확증이 없기 때문에 찜찜한건 마찬가지이다.[5] '정명련'이라고도 하고, '정난주'라고도 한다.[6] 출처 잡지경향 1999년 3월호.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순교를 소재로 만들어진 생활성가도 있다.[7] 한국 천주교에서는 유소사 체칠리아로 부른다. 召史의 훈음과 독음의 차이.[8] 정약용은 이때 나는 죽었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