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증왕 (r20180326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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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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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과 기타 문헌에서 태조 성한왕, 이사지왕, 각절왕의 명칭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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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소지 마립간 김소지

22대 지증왕 김지대로

23대 법흥왕 김원종
시호
지증왕(智證王)
지증마립간

김(金)

지대로(智大路)
지도로(智度路)
지철로(智哲老)
왕비
연제부인
생몰년도
음력
437년 ~ 514년 7월 (76-77세)
재위년도
음력
500년 ~ 514년 7월 (14년)
1. 개요
2. 업적
3. 신체적 특징
4. 기타
5. 삼국사기 기록


1. 개요


신라의 제22대 임금. 무려 64세에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있다.[1] 승하한 나이가 78세로 당시 시대로는 장수했고 지금 시대 기준으로도 충분히 살았다. 이름인 지철로(智哲老)에서 한자 鐵의 원음은 / tiet / 에 가까워 "톗"에 가까운 발음이었으므로 지대로(智大路)와 그다지 차이가 없다 한편으로 같은 의미의 경상도 사투리로 '지절로'라는 발음이 있다.
선대 소지 마립간의 6촌 형제.[2] 내물 마립간증손으로 눌지 마립간의 동생인 갈문왕 복호의 손자이자 갈문왕 습보의 아들이다. 지증왕의 왕비는 연제부인.
법흥왕의 아버지로, 재위 도중에 칭호를 바꾸었기에 지증 마립간이라고도 한다. 법흥왕소지 마립간사위임을 감안하면 아들 덕에 왕 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오히려 업적 중 상당수도 고령의 지증왕 대신 젊은 아들 법흥왕이 태자로서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미리 진행했을 가능성도 높다.
지증왕 전까지 신라는 전성기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방어하느라 매년같이 전쟁이 일어났지만, 법흥왕의 재위기에는 갑자기 전쟁이 뚝 끊긴다. 왜 그런지 삼국사기에 추가적인 기록이 없어 명확히는 알 수 없지만,[3] 어쨌든 지증왕과 차기 법흥왕은 큰 전쟁이 거의 없었던 이 6세기 초반의 40여년간을 신라의 강도 높은 내정 개혁과 국력 증대, 왕권 강화, 주변 소국 흡수에 집중해 많은 업적을 쌓아 6세기 중후반 신라 전성기의 토대를 닦은 명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2. 업적


신라 고유의 군주의 칭호마립간의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신라의 마지막 군주이다. 비공식적으로는 그 다음 군주인 법흥왕도 마립간의 칭호를 썼었다.[4]
중국식인 (王) 칭호를 사용한 신라 최초의 군주이며, 시호를 한국사 최초로 받기도 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노동력 확보를 위해 악습이었던 순장을 폐지(502년)[5], 시장 감독 기구인 동시전 설치, 우경법 실시(502년)[6], 신라 국호와 왕호 사용(503년)[7], 지방 조직인 군현제 정비(505년),[8] 이사부에게 명해 우산국(울릉도)를 정복한 것도 지증왕 재위 시기다(512년). 신라라는 국호 변경 전에는 신로(新盧)·사라(斯羅)·서나(徐那)·서야(徐耶)·서라(徐羅)·서벌(徐伐) 등으로 불렸다. 영일 냉수리 신라비에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때부터 쓰였던 신라의 옛 명칭인 '사로'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지증왕이 지도로 갈문왕(이란 칭호에 주목, 후술)이라고 되어 있다. 새로이 제정된 국명인 신라의 의미는 "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의 영역을 두루 망라한다(新者德業日 羅者網四方之義)."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마립간 대신 왕의 호칭을 쓰기 시작했다. 잘 보면 지증왕 이후로 왕의 이름이 중국식 시호로 확정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504년 음력 4월 상복법을 제정하고,[9] 음력 9월에 파리[10], 미실[11], 진덕, 골화 등 12성을 쌓는 등 고대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505년에 선박 이용의 제도를 정했다. 원래 신라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에 약했는데,[12] 지증왕 시대에 바닷길 개척을 함으로써 이사부가 수군을 이끌고 우산국을 정복한 것도 가능했고, 그 전 소지 마립간 시대까지 서라벌에 자주 쳐들어오던 왜군이 쳐들어오는 기록도 지증왕 시대부터 거의 사라진다. 적어도 동해안에 왜구가 상륙해서 수도 월성이 포위되는 상황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 외에 505년 11월 처음으로 담당 관청에 명하여 얼음을 저장했다.
지증왕 대에서 우경법 등으로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가하였으며 신라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지증왕 대까지 삼한 땅에 내려오던 인신공양순장을 전면 금지함으로서[13] 삼한 세계 전체에 이런 생각이 퍼져나가게 되었고, 인명 존중 사상이 상대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프랑스 대혁명의 인권 선언과 동일선상으로 볼 수는 없다. 이 당시의 인명 존중은 본격적인 삼국 간 회전력 싸움이 슬슬 시작되던 시기에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을 순장으로 소모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 활용하고 동시에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목적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게 맞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업적들을 자랑하지만 금석문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도 여전히 신라 왕실은 한 부의 지배자 정도로 머물러 있었다고 나온다. 그래서 해당 업적들 상당수가 지증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법흥왕이 태자 신분으로 일종의 대리청정을 하면서 국정을 주도하며 미리 손을 써 놓은 것이 아니냐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실제로 법흥왕은 즉위하자마자 엄청난 업적들을 순식간에 처리해버린다.

3. 신체적 특징


사실 지증왕은 이런 내용보다는 신체적인 특징과 관련한 기담 때문에 더 유명하다. 삼국사기에선 지증왕에 대해 '체격이 장대하고 담력이 월등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의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략)... 그의 음경의 길이는 무려 1자 5치[14]

였는데, 음경이 너무 큰 관계로 마땅한 신붓감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지증왕은 각 지방에 사자를 보내 자기의 음경을 능히 감당할 만한 처녀를 수소문하였다. 어느 날 지증왕이 보낸 한 사자가 모량부에 도착해 동로수(冬老樹) 아래에 쉬고 있는데, 큰 2마리가 북 만한 누런 똥[15]을 양쪽에서 물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이것을 본 사자는 쾌재를 부르며 마을로 내려가 그 커다란 똥덩이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한 소녀가 말했다.

"그것은 모량부 상공의 딸이 빨래를 하다 숲속에 숨어서 눈 똥입니다." 그걸 니가 어떻게 아는데. 근데 똥 크기랑 무슨 상관이지. 이거 말하는 거지

사자가 그 집을 찾아가 처녀를 보니 키가 7자 5치[16]

나 되었다. 사자는 급히 지증왕에게 그 처녀를 소개했고, 지증왕은 수레를 보내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 왕비로 삼았다.

지증왕의 왕비가 바로 연제부인. 그녀에 대한 내용은 연제부인 문서 참조.
ㅈㅈ 지증왕의 크고 아름다운 음경 1자 5치를 현대 수치로 계산해보면 과거 1자인 18cm라고 잡아도 27cm는 족히 되는 게 흠좀무. 이 길이로 따져도 길이가 9와 1/2인치(24.13cm)인 어느 미국인 게이보다 더 크다. 뒤에 나오는 처녀의 키를 생각하면 아마도 한 자 23cm를 적용해야 할 텐데 이러면 34.5cm(;;;). 물론 상징적인 설화니까 너무 따지지 말자.(거시기 얘기를 꺼내는 게 좀 거시기해서 그런지, 어느 어린이 역사 만화에서는 덩치가 너무 커서 장가를 못갔다고 변형하기도 했다.).[17]
처녀의 키 7자 5치 역시 어마어마하다. 30cm라고 볼 경우 약 225cm. 현대에도 거인증에 걸리지 않는 이상 이런 키는 나올 수가 없다. 그리고 1자를 18cm로 볼 경우 135cm. 이 경우는 아무리 과거라도 도저히 크다 볼 수는 없다. 23cm를 적용하면 172.5cm로 그럭저럭 사람이 가능한 키니까 이 기준이 맞을 듯. 현대 한국인 기준으로도 여자의 키로는 꽤 큰 키이니 지증왕 시대에는... 역시 이 큰 덩치도 농업 생산력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다.
이는 아마 실제로 대물이었다기보단(물론 당초에 덩치가 크면 아마 그것도 비례할 가능성이 높지만) 지증왕의 실제 외형을 기반으로 하되, 왕의 거대함 위대함을 신격화하기 위해 실제보다 과장해서 퍼뜨린 전설이라고 생각된다.
혹은 키가 크다(=덩치가 크다)는 묘사는 진평왕이나 진덕여왕 등 신라 역대 왕의 외모를 설명할 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계속 반복해서 나오기 때문에, 이 시절 경주 김씨 왕가의 유전일 수도 있겠다.

4. 기타


1989년에 발견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2009년 5월에 발견된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지증왕 대의 작품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링크 삼국사기 등 사서의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당시 사회를 아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지증왕 때 한국사 최초로 석빙고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2017년 5월 국내 최초로 성벽의 기초층에서 인신공양으로 추정되는 인골 2구가 발굴됐다. 6세기 지증왕 때까지 순장을 했으니 인신공양 문화 자체는 충분히 예상 가능했지만, 실제 근거가 밝혀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5. 삼국사기 기록


一年 지증 마립간이 즉위하다
三年春二月 순장을 금지하다[18]
三年 신궁에 제사지내다
三年春三月 농사를 권장하고 를 부려서 논밭을 갈다
四年冬十月 나라 이름의 칭호를 정하다
五年夏四月 상복에 관한 을 제정하여 시행하다
五年秋九月 인부를 징발하여 12성을 쌓다
六年春二月 나라 안의 주·군·현을 정하다
六年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삼다
六年冬十一月 얼음을 저장하고 선박 이용의 제도를 정하다
七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다
十年春一月 서울에 동시를 설치하다
六年春三月 함정을 설치하여 맹수의 피해를 없애다
六年秋七月 서리가 내려 콩이 죽다
十一年夏五月 지진이 일어나 사람이 죽다
十一年冬十月 천둥이 치다
十三年夏六月 우산국을 정벌하다
十五年春一月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하다
十五年秋七月 6부와 지방 사람들을 옮기다
十五年 왕이 죽다
기록 자체는 소략한 편에 속하지만, 매우 중요한 업적들이 다 적혀있다. 무엇보다도 우산국 정벌 기사는 현재에 와서도 상당히 중요하다.
지증왕부터 삼국사기 4권이 시작된다.

[1] 참고로 지증왕 보다 좀 더 고령으로 즉위했다고 알려진 왕으론 일성 이사금이 있으나, 확실하다고 보기 어려운 터라 신라의 왕으로선 지증왕이 사실상 최고령 즉위자라고 볼 수 있다.[2] 전왕 소지 마립간은 벽화부인 사이에서 아들이 1명 있었다고 하는데, 소지 마립간 문서를 참조. 그런데 삼국사기 기록치고는 좀 설화적인 느낌이 나는 일화인데다가, 기록상의 연대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유복자에 갓난아기라 너무 어리고, 아이의 어머니가 일개 지방 세력가의 딸이라 신분이 딸리기도 해 왕위를 잇지는 못했던 듯 하다.[3]고구려신라 공격이 갑자기 끊겼는지 추측하자면 고구려 장수왕, 문자명왕이 5세기까지는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공격해보다가 나제동맹에 계속 막히니 이래서는 아무도 못 잡겠다 생각하고 서기 500년쯤부터는 백제 공격에만 집중하고 신라와는 일종의 휴전을 맺었다던가.. 할 수도 있다. 신라 역시 소지 마립간 때까지는 고구려가 백제에 쳐들어가면 백제에 지원군을 파견하곤 했는데, 지증왕 때부터는 40여년간 지원군을 보내지 않는다. 물론 그 외에도 실제론 고구려가 계속 쳐들어왔는데 기록이 누락됐다거나..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4]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모즉지매금왕牟卽智 寐錦王'이란 이름이 등장하고 이는 법흥왕으로 비정되는데, 매금은 마립간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지배자의 호칭이므로 이 때까지는 마립간과 왕이 혼용된 것으로 보인다.[5] 그 전까지 신라는 왕이 죽으면 남녀 5명씩 같이 묻었다. 옆동네 대가야나 중국의 후덜덜한 규모의 순장에 비하면 소박하긴 하지만 악습은 악습이라.. 그리고 순장금지령은 지방 세력에게 이를 어길 경우 제재가 들어갈 수도 있다고 통보한 것과도 다름없으므로 순장금지령도 지방 통치 강화의 일환으로 보기도 한다.[6] 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것. 우경법 실시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6c가 될 때까지 신라 사람들이 농사짓는데에 소를 활용할 줄 몰랐었냐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 따라서 우경법이 시작됐다고 보기 보다는 우경법을 국가 차원에서 장려를 시작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7] 한화 정책의 일환. 이전에는 신라 국호의 한자 표기가 통일되지 않았던 상태로, 삼국지사로국(斯盧國), 포항 냉수리 신라비사라(斯羅) 등 여러가지 표기가 혼용됐다.[8] 통일 전 신라의 수도, 지방 행정 조직은 6부 5군 이었는데, 지증왕 때 최초로 실직주 군주(지금의 강원도 삼척시)로 이사부를 파견했다. 이때 이후 이사부는 우산국을 정벌한 것.[9] 장례는 가장 기초적인 문화고, 여기에 대해 국가가 주도적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국가의 지배력이 백성들의 가정 생활까지 영향을 미칠 만큼 강해졌음을 뜻한다.[10] 프랑스가 아니다! 자세한 정보 추가 바람 [11] 참고로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오고 선덕여왕(드라마)으로 유명해진 미실과는 한자가 다르다. 화랑세기 미실은 美室,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 지명 미실은 彌實. 단 이 시절 신라는 사람 이름이나 지명에 쓰는 한자가 고정돼있지 않고 음이 같거나 비슷하면 혼용하기도 하는데, 필사본 화랑세기가 만약 박창화의 창작물이라면 신라인스러운 이름을 만들기 위해 박창화가 삼국사기의 이런 부분에서 참고해 따 온 이름일 수도 있다.[12] 유례 이사금 시대 기록을 보면 '신라는 주변국보다 수전에 약하다'고 인정하고 있다.[13] 참고로 중국에서는 이후 천 년 가까이 지난 명나라 때까지도 순장을 했다. 선례를 남기는 게 이토록 중요한 것. 다만 중국의 순장은 기원전인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폐지되어 병기나 토우 등을 대신 묻었다. 그러나 유목민족의 유입에 따라 일시적으로 다시 실행되기도 했고, 명나라의 경우는 전대 원나라가 몽골의 풍습에 따라 순장을 했었기 대문에 그 유습이 내려왔던 것이다. 고대부터 일관적으로 수천년 동안 순장이 시행됐던 것은 아니다.[14] 당시 1척은 1척에 23cm이고 10치가 1척이므로 대략 35cm 정도다. 흠좀무[15] 농업 생산력의 강화를 의미한다는 해석 있음[16] 미터법으로 환산할 경우 172cm의 장신이다.[17] 물론 삼국사기에 덩치가 크다고 했었고 거시기가 크다는건 덩치가 크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변형은 아니고 좀 과장이나 순화일듯[18] 경주 월성에서 순장된 것으로 추정된 5 / 4세기 시신이 발견돼 삼국사기의 신빙성을 높혀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