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과이 (r20180326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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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샌드위치
제도
(영국)


파라과이 공화국
República del Paraguay
Tetã Paraguái


국기(앞면)

파일:파라과이 국기(뒷면).png 이미지 표시중


국기(뒷면)[1]

파일:파라과이 국장.png 이미지 표시중

파일:파라과이 국장(뒷면).png 이미지 표시중


국장(앞면)        국장(뒷면)
국호
파라과이 공화국
República del Paraguay
Tetã Paraguái
수도
아순시온
공용어
스페인어, 과라니어
정치체제
대통령제(5년 단임제)
대통령
오라시오 카르테스
임기
2013년 8월 15일 ~ 2018년 8월 15일 (예정)
부통령
후안 아파라
면적
406,750km²
인구
7,003,406명[2]
명목 GDP
309억 달러
명목 1인당 GDP
4,900달러
민족구성
메스티소(85%), 기타 백인, 동양인
종교 분포
가톨릭(80%), 개신교(15%)
여행경보
여행유의 [3]
여행자제 [4]
위치


스페인어: República del Paraguay
과라니어: Tetã Paraguái
1. 개요
2. 역사
2.1. 3국 동맹 전쟁(Guerra de la Triple Alianza) (1864~1870)[5]
2.2. 그 후
3. 경제
4. 정치
4.1. 대통령 연임 개헌안 통과
5. 스포츠
6. 문화
6.1. 음식
7. 외교관계
8. 나무위키에 문서가 만들어진 파라과이 국적 인물
9. 가는 법
10. 이야깃거리
10.1. 나무위키와 파라과이
11. 외부 링크


1. 개요


남아메리카 중앙에 있는 나라. 공식 명칭은 파라과이 공화국(República del Paraguay)이다. 국명은 국토를 관통해서 흐르는 파라과이 강에서 유래한다. 수도는 아순시온(Asunción). 국토 면적은 40만 7,000㎢로 내륙국에다 큰 나라들에 둘러싸여서 크기가 작아 보이지만 일본보다도 큰 면적이다. 인구는 2015년 CIA 기준 6,783,272명. 남아메리카 대륙 남부의 대평원인 그란차코(Gran Chaco)가 국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원 국가다. 공용어는 과라니어스페인어다. 화폐 이름도 과라니. 종교는 기독교가 절대다수(96%)이며 2013년 기준으로 대부분(88%)이 가톨릭을 믿고 있다.[6]
파라과이 국기는 잘 보면 네덜란드 국기 가운데에다가 문장을 새겨놓은 듯한 모양인데, 국기 가운데 문장의 앞뒷면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앞뒤를 구별해서 걸어줘야 한다.
나무위키 서버가 있다 카더라[7]

2. 역사


파라과이 사람들은 자신들을 과라니족의 후손이라 하여 과라니라고 부르고 있으며 과라니어를 사용하면 물건값을 깎아주기도 한다나. 하지만 진짜 과라니족은 전체 인구에서 극소수이고 인구의 대부분은 백인과 메스티소인데도 국민의 90%가 과라니어를 할 줄 안다고 한다.
대부분의 남미 지역이 그렇듯 식민화 이전에 뭐하고 살았는지 모르지만, 1536년경부터 스페인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1607년, 과라니족 원주민들의 계속된 반란에 지친 스페인 정부는 가톨릭 수도회예수회에 파라과이의 통치를 맡겼다.
예수회는 1609년 가톨릭으로 개종해 정착한 원주민들의 마을인 '레두시온(reduccion)'을 세우고, 원주민들의 강제 노역과 노예 제도를 폐지했다. 콩키스타도르와 노예무역 상인들의 반대를 극복한 뒤, 예수회의 레두시온은 강력한 원주민 민병대의 비호를 받으며 마테(우려내서 마시는 찻잎)의 수출로 국제무역의 강호로 떠올랐다. 흠좀무.
이런 파라과이 경제의 번영은 차츰 지역의 독립성 강화로 이어졌고, 이런 경향이 달가울 리 없었던 스페인 정부는 1750년 레두시온 제도를 금지했다. 이에 과라니족이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심지어 예수회까지 이에 동조하자, 스페인 정부 역시 무력진압으로 맞서 1756년까지 피로 점철된 전쟁을 치러야만 했고, 끝내 스페인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8]
비록 짓밟히긴 했지만 예수회에 의한 17~18세기의 레두시온 체제는 신앙을 통해 토착민족인 과라니족을 보호하고 생존하고, 심지어 국제무역체제에서 한 몫을 챙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토착민이 노예나 마찬가지였던 스페인의 다른 식민지 상황을 생각해 보면 매우 극적이며, 스페인 식민 역사상 매우 드문 예에 속한다.[9] 그래서 원주민 언어인 과라니어가 아직도 널리 쓰인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식민지 생활이 계속되던 중, 1811년 5월 14일 파라과이는 스페인에 대해 독립을 선언했다.

2.1. 3국 동맹 전쟁(Guerra de la Triple Alianza) (1864~1870)[10]


독립 이후에는 과거 레두시온 체제의 저력(?) 때문인지 유럽 은행의 빚에 기대지 않는 정책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켜 남아메리카 최강 클래스의 국력을 갖췄다. 그러나 그 때문에 유럽 열강의 미움을 받았고 쇄국정책을 펴는 정신 나간 독재자의 국가라는 욕을 먹기도 했다.(…) 그 당시에 자국 기술로 증기선을 만들어 띄울 수 있었던 유일한 남미 국가이기도 했다. 영국 배를 한 척 사고 학생들을 유럽에 파견해 기술을 카피했다고 한다.
결국 자기네 빚을 얻어쓰지 않는 괘씸한 파라과이에 열 받은 영국의 부추김을 받은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 내전에서 반파라과이파를 밀면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지금까지 알려진 경우도 있었으나, 영국이 3국 동맹 전쟁을 일으켰다는 이론은 사실 90년대에 폐기되었다. 60년대와 70년대에 한창 좌파운동의 바람이 불 때 이런 이론을 주창한 남미의 좌파 지식인들이 많았지만, 실제로는 이 이론을 뒷받침할만한 증거 자체가 없다! 그냥 대충 심증을 가지고 한 추측이었던것. 그 심증이라는 것도 웃긴 게 당시 파라과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유럽 열강을 열받게 할만한 영향력은 전혀 없었고, 영국이 전쟁의 흑막이었다는 주장의 다른 '근거', 즉 영국이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로 초토화된 미국 남부대신 파라과이를 수탈해서 목화를 얻고자 했다는 것 역시 말이 안된다. 이미 이집트를 장악하여 이집트에서 목화를 신나게 탈탈 털고 있던 상황에 전쟁까지 할 필요는 전혀 없었던 것. 이렇게 미약한 주장이 머나먼 한국까지 퍼지게 된 이유는 다른게 아니라 브라질아르헨티나가 이런 식의 물타기로 전쟁에 대한 책임을 영국에 돌릴 수 있었기에 교과서에까지 실어올리며 대대적으로 밀어줬기 때문이다. 계속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전쟁에 대한 결과는 파라과이 대학살이나 다름없었다. 하여간 오늘날의 정설은 야심만만한 로페즈 대통령 치하에서 국력이 상승세에 있던 파라과이가 이웃 3국과 충돌했다는것. 실제로도 당시 국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가진 로페스 대통령은 내륙국 파라과이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 브라질 쪽으로 해안선을 차지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짜고 있었다.[11]
그러던 찰나 기회(?)가 찾아왔다. 현재의 우루과이지역이 브라질에게 반기를 들어 전쟁을 일으킨 것인데, 이 기회를 놓칠세라 파라과이가 국경선을 넘어온 것. 아르헨티나는 우루과이 측을 지지하여 브라질을 공격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그냥 강건너 불 구경하듯 손 놓고 있었지만 로페스가 자기네 의향을 무시한 채 아르헨티나 국경선까지 넘어오니까 괘씸해서 거들게 되었다.[12] 우루과이는 당시 막 독립을 성취한 직후인지라 그냥 아르헨티나를 도와서 거들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삼국이 동맹맺은 꼴이니 삼국동맹전쟁이라 부르게 되었다.
파라과이는 이 전쟁 초기에 3국 동맹군을 말 그대로 관광보냈다. 징병제 국가였던 파라과이의 병력은 10만가량으로 추정되나 이에 반해 3국은 기껏해야 2~3만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바로 얼마 전까지는 서로 으르렁거리던 관계였으니… 갑툭튀한 파라과이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체급 차이에서 오는 물량, 그리고 파라과이에게 숨구멍과도 같았던 라플라타 강 유역을 점령해버리면서 파라과이가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이때 로페스는 패배를 직감하며 온갖 외교적 수단을 써봤지만 3국의 분노를 잠재우는데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궁지에 몰리게 되니 아예 "조국과 같이 죽으리"라며 절대로 질 수 없다는 식의 대통령명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항복을 권하거나 전쟁을 피하려는 사람이 눈에 띄면 사형시키는 식이었다.
거인같은 두 나라를 상대하기엔 여전히 작은 파라과이인지라 장기전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구도였으나 있는거 없는거 다 끌어 모아다가 혹독한 훈련을 시켜 무조건 전쟁터로 내모는 바람에 남성 인구의 90%가 사망하거나 노예로 끌려가는 대참사를 당한 바 있다. 전후 남겨진 남성이 약 3만명이었다고 한다. 결국 1869년에 수도 아순시온이 점령, 이듬해 3월 대통령 로페스가 전사하면서 전쟁은 끝을 맺을 수 있었다. 결과는 브라질아르헨티나에게 영토를 왕창 빼앗기고 인구는 53만명에서 22만명으로 대폭 감소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으며, 이 상처는 100년이 훌쩍 넘긴 지금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여담으로 로페스 대통령은 파라과이 애국주의의 상징으로 파라과이 역사에 기록되어있다.

2.2. 그 후


1932~1935년간 볼리비아와 그란 차코 지방[13] 일부인 차코 보레알 지방(25만 9,000㎢ 넓이로 한반도보다 더 크다)을 두고 차코전쟁(Guerra del Chaco)을 벌이게 된다. 이 전쟁 당시 국제적으론 볼리비아가 유리하다는 전망이 압도적이었다. 볼리비아는 인구도 3배가 더 많았으며 땅도 훨씬 넓고 미국의 강력한 지원 아래에 장비와 무기도 더 우수했으며 1차 세계 대전 및 여러 전투에서 경험이 많은 독일 장군 한스 폰 쿤트(1869~1939)가 군사고문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파라과이군 지휘관인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1880~1940)는 차코 보레알 지방에 석유가 많은 것 같으니 해외 석유 기업들의 자본 지원을 요청했고 바로 네덜란드 이 이 지역 석유개발권을 가진다는 조건으로 장비 자금을 제공했다. 미국도 질세라 록펠러 그룹의 스탠더드 오일은 볼리비아를 지원하면서 같은 조건을 요구해 이른바 정유업체 전쟁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에스티가리비아는 우선 저지대 늪지가 많은 차코 보레알 지방 특성을 이용하여 현지에서 대대로 살아온 이들을 군인으로 고용했으며 지리적 특성을 이용한 전술로 전투를 벌여 큰 효과를 거뒀다. 결국 3년이 넘는 전쟁 끝에 파라과이가 전술적 승리를 거둔다. 사실 볼리비아도 고전했지만 전쟁 말에는 반격에 성공하면서 전쟁이 더더욱 길어질 가능성이 컸는데 전쟁을 피하고자 차코 보레알 지역 난민이 아르헨티나로 계속 오는 통에 신경쓰던 아르헨티나가 전쟁에 끼어들기 시작한다. 아르헨티나는 겉으론 전쟁을 중재하겠다고 나서면서 만약 전쟁을 안 끝내면 아르헨티나도 전쟁에 끼어들어 두 나라 다 묵사발 내겠다고 으름짱을 내놓았는데 이 당시 아르헨티나는 남미 으뜸가는 경제 및 군사 최강국이기에 두 나라 모두 아르헨티나에 맞서 싸울 생각을 포기하고 휴전협정을 맺는다. 전쟁은 1935년에 끝내고 여러 회의 끝에 1938년에서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종전평화협정으로 완전히 끝난다. 파라과이는 차코 보레알의 3/4을 손에 넣었으며 볼리비아는 파라과이 강 유역 및 푸에르토카사도 지역을 얻어서 어느 정도 땅을 확보했지만 전쟁 피해가 훨씬 컸기에 전쟁 중에 대통령이 사임하고 사령관도 여럿 교체될 정도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전쟁이 끝나자 결국 전술적 승리및 이득은 파라과이가 더 컸기에 볼리비아는 전후 처리에 골치를 겪는다.

두차례 전쟁으로 인한 파라과이의 영토 변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에스티가리비아는 1939년 대통령 선거에 나와 당선되었지만 겨우 1년만에 영토 순방 도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파라과이에선 자국 화폐에 그의 얼굴을 넣으며 그를 기렸다. 그런데 웃기게도 전쟁이 끝나서 가장 좋아라하던 이들 중 하나인 쉘은 얼른 차코 보레알 지방에서 석유 탐사를 시작했지만 끝내 석유는 전혀 없던 게 드러나버리면서 실망해야 했다.
그러던 중 1940년에 파라과이의 이히니오 모리니고 대통령은 당시 전세계를 휩쓸고 있던 파시즘 또는 나치즘식 독재정치를 추구하여 자신과 여당의 집권을 위해서 헌법을 정지하고 야당의 정당활동을 금지시켰다. 이이 모리니고 대통령의 독재에 저항하는 총파업과 학생들의 폭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에 모리니고 대통령은 완화책으로 1946년 정치활동을 합법화하여 야당인 2월당과 여당인 콜로라도당으로 구성된 내각을 조직했다. 하지만 2월 당원은 1947년 초에 모리니고에 반발하면서 연립내각을 파기했고, 그러자 이에 격노한 모리니고 대통령은 콜로라도당만을 지지하면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게 되었다.
이에 2월 당원은 자유당 및 파라과이 공산당과 공동전선을 체결하여 라파엘 프랑코를 반란군으로 하는 내전을 일으켰는데 이를 파라과이 내전이라고 불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전부터 대통령에게 충성하던 군대도, 해군의 거의 전체와 육군 일부가 반란에 가담했다. 모리니고는 육군사령관이던 알프레드 스트로에스네르가 콜로라도당을 지원하면서 반격에 나섰고, 결국 압도적으로 1947년 8월에 반란군을 해산시키며 승리했다.
그렇게 파라과이 내전은 끝나고, 콜로라도당의 집권체제가 이어졌는데 당시 최고 지휘자였던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는 1954년에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페데리코 차베스 대통령을 축출하고 콜로라도 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는 파라과이의 경제개발을 추진함과 동시에 반대자에 대한 인권탄압과 권력기반 유지를 위한 막대한 비용지출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후안 페론[14]소모사와 친하게 지냈으며 아나스타시오 소모사가 니카라과에서 축출되고 미국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했을때 받아들이기도 했고 197-80년대 더러운 전쟁이 펼쳐졌을 당시에 미국 CIA와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했다. 특히 농지 문제에 있어서는 말로는 토지개혁을 한다해놓고 사실상 지지계층에게 차별적으로 농지를 나눠주다시피해서 빈농들과 원주민들을 외지로 쫓겨나게 만든 결과를 낳았으며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렇게 미국이 애써 모른체 하면서 35년간 장기집권하였고 1980년대 남미 전역에서 민주화 열풍이 불었을때 지배계층이 1988년에 8번째 대통령직에 오른 스트로에스네르는 1989년에 오른팔 안드레스 로드리게스에 의한 쿠데타로 축출되어 브라질로 망명했다. 2006년에 브라질에서 사망한 그의 시체는 파라과이 정부가 인도를 거부하여 지금도 브라질의 공동묘지에 있다. 그러나 스에로에스네르의 유산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파라과이의 대표적인 문제점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소수지배계층이 토지를 거의 독차지하는 문제도 스트로에스네르와 관련이 있고, 민주화 이후로도 해결이 전혀되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로도 장기집권한 콜로라도당의 의원들 상당수가 이러한 토지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해결하기가 힘들것이라고 보여진다.

3. 경제


산업은 목화와 콩, 동물 사료 생산 등 대부분 1차 산업에 치중되어 있는 후진국이다. 브라질 못지않게 과일같은 것도 굉장히 많이 나는 편이고 계절도 4계절[15]이라고는 하지만 대체로 날씨가 화창한 편인데다 땅도 비옥해서 조금의 자본만 있으면 겨울에도 망고를 먹을 수 있을 법도 한데, 일단 기본 농업이라는게 제대로 깔려있지 않으니 제철이 아닌 이상 비싼 돈주고 수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앞으로 남미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여건을 잘 살리면 대륙의 물류 허브가 될 지도 모르겠다. 주변에 위치한 접경국도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이고 앞의 두 나라는 특히 남미 경제의 양대 축이니까. 그렇지만 1차 산업면에서 소수의 대지주들이 토지를 독차지하다시피하는 바람에 소작농들이 빈곤하게 살고있어서 사회적인 문제점으로 손꼽히고 있다.
GDP $308억, 1인당 GDP $4,383, 인구 702만명, 남미에서도 상당한 후진국으로 1인당 국민소득중국의 절반에 불과하다. 하지만 의외로 공식 최저임금 수준은 남미 기준으로는 나쁘지 않은 수준인데 1인당 GDP가 1000달러 이상 높은 에콰도르와 비슷하고, 1인당 GDP가 1만 달러 중반수준에 달해서 나름대로 선진국 소리를 듣는 칠레와 우루과이와 비교해도 차이가 별로 크지 않다. 물론 이는 브라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페루의 최저임금 수준이 2015년 이후의 화폐가치 하락으로 떨어진 영향도 크다. 그러나 공식최저임금 수준과는 별개로 1인당 GDP 수준이 남미에서도 낮은건 여전해서 실제로 농민들이나 빈민층의 경우에는 최저임금도 못받고 일하는 경우가 많아서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최근 2~3년간에는 한국과의 경제협력이 급속도로 증진되고 있는 나라 중 하나다. 원래부터 한인교포의 세가 다른 남미국가보다 강한 면도 있지만, 최근 파라과이 정부는 각종 사회인프라 확충(특히 교통분야) 사업을 적극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파라과이 현지 기업들 입장에서는 인프라 쪽 핵심기술이 부족한 면이 있기에 경제 파트너를 적극적으로 찾고 있고, 한국이 상대적으로 잘 맞는 파트너인 것. 포털에서 파라과이라고 검색해 보면 한국의 각종 정 관계 단체나 지자체와 업무협약을 맺은 사례가 쏟아지고 있다. 말인 즉슨, 나무위키가 파라과이 법인에 인수된 게 완전히 뜬금포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4. 정치


1989년 민주화 이후로도 콜로라도당이 일당 독주하는 전형적인 일당우위체제였지만 해방신학에 몸담았던 신부 출신의 페르난도 루고2008년, 61년간 지속된 우파 콜로라도당(赤黨) 집권을 종식시키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 뒤 루고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여성들이 아기까지 데리고 자꾸 나타나 입방아에 많이 올랐다. 여하튼 이후로 토지개혁 문제에 여러모로 신경을 썼지만 애초에 정권자체가 좌파정당들과 중도파 자유당과의 연립정권이었기 때문에 여당내에서도 내분이 일어났고, 2012년 6월 15일 경찰과 빈농들 간의 충돌로 최소 17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하자, 루고의 탄핵안을 발의했고, 6월 22일 탄핵안 통과로 루고는 사임했다. 탄핵안 통과 당시 의사당에서는 수천 명이 항의시위를 벌이다 해산되었고, 중남미 좌파 진영은 "의회 쿠데타"라며 탄핵을 비난하기도. 사실 이 문제는 파라과이의 토지개혁안이 통과될것을 염려한 보수야권에서 토지개혁이 이루워지면 재산을 잃을게 뻔한 우파 콜로라도당 의원들이 유혈사태가 벌어지자 제대로 기회를 잡아서 일을 벌였고 평소에 루고에게 불만을 품었던 자유당도 이에 동참해서 벌어진 일이라는것이 중론이다. 여하튼 이후로 반발시위가 벌어졌기는 했지만 루고는 복귀하지 못하고 탄핵 이후로 치러진 대선에서 기존의 여당이었던 자유당과 좌파정당들이 깊은 앙금속에 따로 후보를 내면서 콜로라도당이 집권정당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루고는 탄핵 이후로 출마가 금지되었기는 했지만 지지율이나 호감도가 높기때문에, 재출마할수있다면 안정적으로 당선될수있을것이라는 예상이 있지만 다른사람을 내세워서 총리직에 취임한다해도 정작 좌파정당들의 조직력이 타 남미국가에 비해서 너무나 약하기 때문에 제대로 일을 할수있을지 의문이라는 얘기가 많이 나돈다. 루고의 인기자체는 높지만 좌파정당들이 얻는 득표율은 막상 타 남미 국가에 비해 크게 낮다(...). 여하튼 대통령 연임개헌안이 빠구를 먹으면서 결국 대통령 재선은 좌절되었기는 했지만 개헌안으로 콜로라도당이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상원의장직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콜로라도당의 재집권을 막기 위해서 자유당과의 후보연대를 낼수있다는 입장도 보이며 자유당과의 관계도 개선되고 있다. 사실 자유당 입장에서도 루고탄핵에 동참하기는 했다만 막상 여론의 지지를 별로 얻지 못해서 정권을 콜로라도당에게 힘없이 내주고 4년만에 야당으로 전락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삽질을 한꼴이나 마찬가지가 되었기 때문이다.[16] 더군다나 콜로라도당 재집권 이후로 루고의 인기도 다시 고공행진을 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지지자 차원에서의 앙금은 여전히 깊다.
위키릭스미국이 대선에 개입하려 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 난리가 나기도 했다. 이거?

4.1. 대통령 연임 개헌안 통과


호사리오 카르테의 콜로라도당이 막강한 조직력과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경제를 바탕으로 정권을 연장할 수 있다고 보면서 대통령의 재선을 허용하는 헌법수정안을 발의하였다. 야당인 자유당이나 좌파연합도 은근히 자기들에게 이득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해 큰 반대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재정권의 악몽 때문에 개헌에 대한 반대여론이 강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법안을 밀어붙이다가 2017년 3월 31일 밤에 시위대에 의해 의회 건물이 불타는 일이 벌어졌다.
파라과이를 독재 시대로 되돌릴 수 없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 시위를 벌였으며 그 결과 한 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당했으며 수백명이 체포되었다.
"독재로 돌아갈 수 없다"…파라과이 '개헌 반대' 시위
결국 헌법재판소에서 패소판결이 나면서 사태는 마무리 되었지만 카르테 대통령이 큰 타격을 입으며 콜로라도당이 재집권 하기 힘들다는 말이 나온다.

5. 스포츠


여느 남미 국가답게 축구가 가장 인기 좋다. 국대에 관한 것은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문서 참조.
한국에서 나름 인지도가 있는 파라과이 사람으로는 다혈질에 골넣는 골키퍼로 유명한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18]미수다에 출연한 아비가일 등이 있다. 그리고 잘생긴 로케 산타 크루즈도 포함.
2010년 6월 29일, 11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월드컵 16강전 파라과이 vs 일본 경기 때[19]. 한, 일 양국 네티즌 사이의 키워 때문에 주한 파라과이 대사관 사이트가 다운되는 일이 발생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병림픽. 여담으로, 1999년코파 아메리카에 특별참가한 일본을 4-0으로 박살낸 적도 있다. 하지만 이 월드컵에선 승부차기로 간신히 승리.
그러나 2014년에서는 꼴등으로 지역예선 탈락했고, 2018년 월드컵도 영 신통하지가 않았다. 아르헨티나 이외의 모든 팀들에게 고전했다. 그나마도 아르헨티나전은 두 경기 모두 리오넬 메시 없을 때 치르는 행운이었다. 결국 7위를 기록하면서 러시아 월드컵도 본선 진출 실패 확정.

6. 문화


파라과이는 한국인 이민 1세대가 정착한 곳이라서 한국인들이 많다. 최근 건설업계쪽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장기간으로 근무하고있는 케이스도 꽤 늘고있다. 노래방도 흥행하고 있고(일본식 가라오케가 아니라 한국에서 운영되는 노래방과 같다) 전국노래자랑도 다녀갔을 정도이며 사시장에 가보면 한국인이 주인인 곳이 많다. 브라질과 칠레의 교민들이 매우 조용한 데 비하여, 파라과이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소 발전이 더딘 곳이라서 한국인 교민들이 쉽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기 때문. 교민들이 소주나 삼겹살, 한인 청년들의 주말 축구 등 한국문화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서 현지화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이다 보니 현지인들도 한국에서 만든 것이면 좋게 보는 경향이 강하다.
파라과이 역시 한때 강대국이였던만큼, 고유의 문화가 꽤 많이 남아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파티(fiesta)를 좋아하고 노래와 춤을 굉장히 좋아한다. 매주 금요일저녁부터 일요일저녁에는 항상 노랫소리가 동네동네마다 들린다. 새벽3시까지 틀어놓는경우도 적지않다. 또 월드컵에서 좋아하는 축구팀이 이기면 이동네 저동네 불꽃놀이를 쏘아대는 경우도 적지않다. 잘못 들으면 총소리같기도. 하지만 한국처럼 소음공해를 일으킨다고 논란이 된적은 없었다. 애초에 하나의 문화라 할 수 있을만큼 거의 모든 집이 파티다. 국민소득이 그리 높은 편이 아닌데도 너나할것없이 모두 그러는걸 보면(…) 학교에서도 여러가지 기념일마다 행사를 하는 경우가 드물다. 또 낀세아뇨(15año=15살)라고 하는 큰 파티도 있다.

6.1. 음식


대부분 남미권 나라들이 그렇듯 고기가 굉장히 싸다. 대체로 고기를 통채로 구워서 먹는데, 이것을 아사도(Asado)라고 한다. 처음 먹을 때는 마치 원시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든다... 하지만 모든 고기가 그렇듯 고기는 언제나 옳다. 주식은 만디오카(Mandioca)라고 불리는 감자 같은 채소인데, 이걸 밀가루처럼 가루로도 만들고 그냥 고구마처럼 쪄서 먹기도 한다.
그 외에도 전통 빵인 치파(chipa)가 있는데, 주 재료는 파라과이 치즈(queso paraguaya)와 만디오카 가루로 이것이 밀가루 반죽보다 빵을 더 쫄깃쫄깃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하며 집에서 만들어먹을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다. 그 밖에도 로미토(romito), 베주(mbeju) 등의 음식이 있다.
의외로 파라과이에서 한식이 붐을 일으키고 있다. 수도인 아순시온의 센트로에 자리잡은 한식당 restaurante seul은 관광객은 많이 없는 곳이라서 매일 현지인 손님이 이어지고 있는데 1인당 한화 1만원에 육박하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20] 줄 서서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메뉴는 갈비찜, 닭도리탕, 짬뽕, 불고기, 탕수육, 김밥[21] , 돈까스, 김치 등으로, 다소 한식이라기엔 애매한 것들이 많다. 몇몇 메뉴는 중국음식이나 일본음식이다. 심지어 김치는 우리나라의 짠 맛이 아니라 단 맛이 대단히 강하게 개량되었다. 현지인 입맛에 맞추어 로컬라이징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여하튼 파라과이에선 갈비찜[22]이나 불고기가 굉장히 유명하고 갈비찜은 항상 옳습니다. 높으신 분들은 그걸 몰라요 심지어 탕수육까지 이미 훌륭한 한식으로 알려져있어서 덕분에 한인파워가 남미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다. 현지인들도 몇몇 한국단어를 알 정도라고 한다. 한식이 알려진 정도가 어느 정도냐면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은 일식집과 중식집마저 파라과이에선 속수무책으로 당할 정도. 순수한 전통적인 한식을 고수하지 않는다면 한식의 세계화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

7. 외교관계


한국과는 1962년에 외교를 맺었고 2002 한일월드컵 때 전 경기를 한국에서 경기를 한 사례가 있었다. 북한과는 미수교 상태다.
대만수교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가장 큰 나라다. 하지만 최근 들어 중국과의 수교 의사를 내비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대만에서는 긴장하고 있다. 파라과이는 도미니카 공화국, 바티칸과 더불어 대만의 수교국 중 그나마 제일 안정되고 존재감 있는 나라이기 때문.[23]
아순시온에 대사관이 있는 것 외에 시우다드델에스테에 총영사관이 있다. 이는 대만의 단 둘뿐인 총영사관 중 하나이다.[24]

8. 나무위키에 문서가 만들어진 파라과이 국적 인물


가나다 순

9. 가는 법


한국에서 직항으로 가는 항공편은 없으며 인천국제공항에서 LA를 거쳐 상파울루 구아룰류스 국제공항까지 비행기를 타고온 다음[26] 다시 TAM 항공의 아순시온행 비행기로 환승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2016년 9월 26일까지만 먹혔는데 이유는 대한항공이 9월 26일부터 상파울루편을 운휴했기 때문이다. 이 탓에 운휴 전까지는 인천-(미국 LA 중간기착)-상파울루-아순시온 식으로 환승하면 파라과이에 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인천-두바이-상파울루-아순시온 또는 인천(서울)-파리-상파울루-아순시온 이런 식으로 가야해서 시간도 그만큼 더 걸리게 되었다.

10. 이야깃거리


볼리비아와 벌인 차코 전쟁 당시, 상대적으로 고지대라 모기가 없는 지역에서 살던 볼리비아 병사들은 저지대인 파라과이로 내려왔다가 모기말라리아에 시달렸다. 그리고 파라과이가 반격을 가해 볼리비아로 진격한 뒤에는, 파라과이 병사들이 고산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파라과이 시간대PYT라고 불리며 평상시에는 UTC-04:00를 사용하며 일광 절약 시간제 때는 UTC-03:00을 사용한다.
파라과이 국경 모양이 이천시를 닯았다.
최수종 부모님이 학업 문제로 고등학생이던 최수종과 누나만 한국에 남겨놓고 전 가족이 파라과이로 이민가서 사업을 했다고 한다.[27]

10.1. 나무위키와 파라과이


나무위키의 운영사 umanle S.R.L.의 본사가 파라과이 수도인 아순시온에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한때 나무위키에서 파라과이가 유명세를 탄 적 있다. 리그베다 위키와의 소송, 법인세, 저작권, 명예 훼손 등의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이로인해 나무위키 토론 창 등에서 나무위키는 한국어 위키이지 한국위키가 아니므로 한국 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둥 실질적으로 한국 위키인 것을 눈 가리고 아웅하는 양상이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참고로 한국 법은 속인주의와 속지주의를 모두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든 파라과이에서든 한국 국적인 사람이 한국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하면 처벌되게 된다. 다만 서버가 파라과이에 있기(사실 실제로 그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때문에 개인을 특정하기 힘든것 뿐이지.
본사가 파라과이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지 크롬 모바일버전으로 나무위키에 접속하면 한국어로 되어있음에도 브라우저가 '해당 사이트는 스페인어로 되어있습니다. 번역하시겠습니까?'라는 팝업이 뜬다.

11. 외부 링크



[1] 양면이 다른 국기를 사용하는 세계 유일의 국가이다. 앞뒷면의 문장 모두 2013년에 새로 지정되었다. 하나만 써야 한다면 앞면을 쓴다. 그 외 오리건 주 주기도 양면이 다르며,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국기에 글이 들어가기에 실질적으로는 앞뒤가 다르다.[2] 2015년 어림[3] 황색경보 지정 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4] 산페드로주, 콘셉시온주, 아맘바이주[5] 파라과이 전쟁(Paraguayan War)이라고도 한다.[6] 다만 여타 중남미 국가들처럼 파라과이에서도 복음주의 성향 개신교의 성장세가 대단히 크다(8%).[7] 나무위키 서버는 파라과이가 아닌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 위치해있다.[8] 영화 미션이 이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9] <최초 인류의 후예들> 63~64쪽에서 인용.[10] 파라과이 전쟁(Paraguayan War)이라고도 한다.[11] 조선 기술을 얻으려고 한 것도 항구를 차지한 다음에 쓰기위함이 컸다고 볼 수 있다.[12] 브라질 군을 우루과이에서 완전히 밀어내겠다며 파라과이의 남쪽경로, 그러니 아르헨티나 영토를 열어달라고 요구한 것인데 길을 빌려 씨를 말릴 것이라 예측한 아르헨티나가 이를 거부하였다.[13] 그란 차코 지방을 모두 합치면 60만 ㎢ 가 넘는다. 차코 보레알을 빼면 나머진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땅이다.[14] 국내에서는 좌파 표퓰리스트라고 알려졌지만 그건 후안 페론이 공산주의자를 때려잡은 경력이나 1950년대 중반 축출 이후에 우파 정권이 집권한 국가에서 장기간 망명한 사실은 빼고 한 얘기로 후안 페론 1기 집권기 이후부터 1990년대 이전까지는 페론주의 정당이 집권한 기간이 의외로 길지 않다.[15] 애초에 한국처럼 영하로 떨어지지는 않고, 추운 것도 비가 한번 오면 조금 으스스할 뿐이다. 물론 난방시스템이 없으면 춥게 느껴질 수는 있다.[16] 여담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온두라스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자유당에서 별로 대응을 안해서 다음해 대선에서 정권을 뺐기고 현재까지도 야당으로 지내고 있다. 물론 그 때 자유당 소속으로 대통령을 역임했던 셀리야는 따로 정당을 차려서 자유당이 제2야당으로 전락당하기까지 하는 등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17]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18] 필드골을 넣는다는 건 아니고, 페널티킥프리킥으로 30~40골 정도를 득점했다. 90년대 후반[17]에 유명해진 선수다. 골 넣는 골키퍼인 것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파라과이 축구의 황금기를 열은 선수로써, 최후방 수비수 역할까지 하면서 맹활약했다. 그 1998년 프랑스 대표팀과 반코트 경기를 하면서도 로랑 블랑의 결승골이 터지기 전까지 전후반 90분, 연장전반까지 무실점으로 버티는 괴물같은 활약을 했다. 은퇴 후에는 정치에도 뛰어들기도 했고, 해설자로도 전업해서 2010년 6월 29일 vs 일본전을 해설하는 등 여러모로 활동 중.[19] #, #.[20] 참고로 파라과이에서 빅맥이 한화 1700원이다.[21] 특히 김밥은 파라과이주민들 사이에서도 먹는모습을 흔하게 볼수있다. 일반마트에서도 김밥을 만들수있는방법과 함께 포장된 김을 볼수있는데, 스시라고 적혀있다. 김밥 자체가 노리마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뭐라 하기도 그렇다.[22] 2002 월드컵 당시 한국에 온 칠라베르트는 갈비찜을 먹어보고 두 그릇이나 비웠다고 한다. 심지어 아욱국도 잘 먹었다고.#[23] 다른 나라는 세인트키츠 네비스,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세인트루시아, 벨리즈, 팔라우, 나우루, 투발루, 솔로몬 제도, 키리바시, 마셜 제도 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할 만큼 작고 존재감 없는 소국들이거나 아이티부르키나파소, 스와질란드, 니카라과 같이 영 상태가 좋지 않은 국가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나마 이들보다 낫다는 과테말라엘살바도르, 온두라스도 그다지 상황이 좋지는 않고.[24] 다른 하나는 온두라스 산페드로술라에 있는 총영사관.[25] '파라과이 응원녀' 리켈메, 상반신 노출사진 공개 http://www.diodeo.com/news/view/38868[26] 과거에는 중간에 LA에서 중간기착했었으나 해당 노선이 없어졌으므로 프랑스 파리 샤를 드 골 국제공항이나 중동 등지에서 중간기착한다.[27] http://goos.wiki/index.php?title=최수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