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도 (r20180326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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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의 지역구분
경기
호서
호남
영남
관동*
해서
관서
관북
*관동지방영서영동으로 나뉘는 경우가 있다.
제주특별자치도는 규모가 작은 특별자치단체.

平安道
1. 개요
2. 역사
3. 언어
4. 통일 후 전망


1. 개요


평양직할시, 평안남도, 평안북도, 자강도를 포함하는 지역. 관서(關西)라고도 한다. 관서는 관(철령)(鐵嶺關)의 서쪽이라는 뜻이다. 서북(西北)[1], 서토(西土) 등으로도 불렸다.
남북 평안도를 다 합친 넓이는 4만 3,400㎢, 인구는 1,060만 명 가량으로 추산된다. 특히 가장 큰 도시인 평양은 북부 지방 제1의 도시.
기원전에는 고조선의 땅이었다가 낙랑군, 다시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 고구려가 망하면서 극히 일부는 신라의 땅, 나머지는 당나라 땅이 됐다. 당나라 땅은 후에 발해가 차지했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평안도 쪽 영토는 변방이었다.[2]후삼국시대초 평남의 남부를 궁예가 편입하였고, 왕건이 발해유민을 받아들이며 평안남도 대부분을 수복하는 등 점차 되찾아나가 북계(北界)라는 이름이 붙었다. 원나라 간섭기에 북계가 최탄의 난으로 원나라에 넘어갔으나 결국 반환받았다. 조선의 성립 당시 중강진 을 중심으로 한 일부가 여진족의 땅이었는데 세종대왕4군 6진을 개척하면서 조선의 영토로 만들었다.
평안도라는 명칭의 어원인 평양안주는 둘 다 현재 평안남도에 속한다. 원래는 대동강, 청천강이 상류가 북쪽으로 뻗었기에 평안좌도, 우도로 구별했으며, 이 경우 대부분의 큰 도시들은 영변을 제외하고는 모두 좌도에 속하게 된다. 평안남북도는 1896년 이후의 구분이다.
방언은 서북 방언을 사용한다. 다만 동북쪽 끝인 후창군 지역은 동북 방언권에 가깝다.
관서 8경이라 함은 강계시의 인풍루(仁風樓), 의주군의 통군정(統軍亭), 선천군의 동림폭(東林瀑, 폭포), 안주시의 백상루(百祥樓), 평양직할시의 연광정(練光亭), 성천군의 강선루(降仙樓), 만포시의 세검정(洗劒亭), 영변군의 약산동대(藥山東臺)를 말한다.

2. 역사


비교적 인구가 적은 이북 지역에 속해 있지만, 이북 인구가 평안도에 집중된 영향으로, 평야 지역에 한해서는 삼남 지방보다 조금 덜했을 뿐 인구밀도가 높은 편에 속했다. 또한 면적이 42,000㎢에 달해, 18세기에는 경상도에 이어 2번째로 인구가 많은 곳이었다. 이는 비록 기후는 다소 춥지만 큰 강이 많아 식수와 농수를 얻기에 편리하고, 비옥한 평야 지대와 해안가를 갖추어 식량 생산 능력이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중국과 한반도를 잇는 요지에 위치했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교통과 상업 역시 크게 발전했다.
조선 시대에 서북 지방 사람은 차별을 심하게 받았다. 사실 이는 이성계가 내린 "서북 지방 사람들을 등용하지 말라"는 유시 때문이었는데 이 이유로 이 지역은 유학이 강하게 뿌리내리지 못하였다. 유학을 국시로 삼는 조선 입장에서는 더더욱 질시를 삼게 되는 이유가 되었고, 임란 시기에 큰 의병이 없었다고 하여 더더욱 강한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핵심 개국공신 중 하나이자 첫 영의정인 조준이 평양 출신이다. 무엇보다 서북 지방의 경우는 이전 묘청의 난의 경험도 있었고 허나 또 아이러니 한 것도 신진사대부들 중에서 묘청의 난을 말 그대로 반란으로 규정한 것도 핵심 공신이었던 조준이었다. 근데 조준은 평양출신이라는 것을 사대부들이 알았고 평양부원군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그의 고향이 평양 출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가면서 서북 지역의 경제 발전으로 인해, 과거시험을 준비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증가하였고 학문도 발전해서, 서울 다음으로 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했다.[3] 그러나 지역차별로 인해 이 지역 출신의 과거 급제자들은 당상관[4] 이상의 높은 관직이나 홍문관 등 요직에는 거의 진출하지 못했다.
따라서 양반들은 벼슬길보다는 경제 활동에 전념해 부유한 상인들이 많았고, 특히 의주임상옥거상으로 유명했다. 또 이들은 경제활동에 지장을 받지 않으려고 관리들과 결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도정치 시절에는 이들을 수탈하는 수령도 많았으며, 특히 평안감사가 정승 부럽지 않은 관직으로 유명했다. '평안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란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한번 제대로 긁어 모으면, 평생 놀고 먹어도 남을 만큼 재물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북 지방의 차별과 더불어 지방 향리들의 수탈도 가혹했고, 홍경래의 난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참고로 홍경래의 난 항목에 올라온 격문[5]을 참고하면 조선 후기 사회 전반에 평안도에 대한 괄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것은 대한민국/지역감정 항목을 참조. 홍경래의 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앙에서의 정치적 배제, 경제적 수탈로 기호 지방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는데, 이러한 적개심을 두려워하는 사료를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평안도 사람들은 다른 조선 사람들보다 더 굳세고 더 미개하고 더 사납다. 그들 중에는 양반은 매우 적고, 따라서 벼슬아치들도 매우 적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들을 왕정의 적이라고 믿고 있다. 정부는 그들을 조심히 다루면서도 엄중히 감시하고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노상 두려워하고 있는데, 반란이 일어나는 날에는 진압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샤를르 달레 신부 <조선 교회사>

사실 평안도는 예로부터 북방 민족과의 투쟁이 잦은 지역이었고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만큼 함경도와 더불어 용맹한 지역성을 가진 지역으로 자주 인식되었다. 숲 속에서 나온 범이라는 뜻을 가진 맹호출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평안도는 인심이 순후하다고 쓰여져 있어 질실하다는 평을 들은 경상도와 더불어 호평이 적혀 있다.
구한말에 평안도는 과거 합격자를 가장 많이 배출했지만 정작 양반의 비율은 조선 8도 중에서 가장 적었다. 평남과 평북이 밑에서 1,2위를 차지해서 오히려 함경도보다도 양반이 더 없었다.[6]
해방 뒤에 월남해 국군에 입대한 인사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5.16 군사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내의 파벌 싸움에서 경상도 파벌 인사들에 의해 제거되었다. 평안도 출신 군 인사들은 '텍사스'라는 암호명으로 불렸다고 하는데, 해방 당시 미군제24군단이 한반도 8개 도 각각에 대해 붙인 작전암호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평안도가 지역이 넓고 인물도 많은 데다 싸움 잘하는 인간이 많다고 해서 마찬가지로 미국 내에서도 주먹 맵기로 유명한 텍사스에 비유한 것이라고.##
평안도는 관서 지방으로 분류되지만 북한에서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중심 지역이다. 1952년 평양 지진을 비공식적인 기록이 있으며 규모 6.5로 보면 된다. 만약 평양에 경주 지진이나 포항 지진과 같은 지표면에서 진도 7의 지진 진앙지가 지하 9km에 일어날 경우 포항보다 100배 더 심한 피해를 주며 가옥, 건물 등이 붕괴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되고 평양은 아수라장이 되고 황해도는 진도 5.5~6급의 지진을, 백령도2003년 당시 상황과 거의 유사한 규모로 나갈 수도 있다.

3. 언어


황해도와 더불어 서울 방언의 억양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지역
흔히 서북 방언을 쓴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북 방언의 억양을 놓고 보면 경기 방언이랑 흡사하다. 물론 어미발음, 단어 사용에서 경기 방언과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차이점을 이용해 옛 매체에서 평안도 사투리를 흉내냈다고 한다. 1980년대까지 한국의 방송 매체가 북한말처럼 들리는 이유가 경기 방언과 서북 방언이 원래는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어의 억양이 호남 이주민의 급증[7] 으로 호남화된것과 비교해 서북 방언은 상대적으로 타 지역의 영향을 덜 받다 보니 지금은 한국어와 서북 방언의 차이가 두드러지는 편.

4. 통일 후 전망


일단 평안도는 對 중국 무역의 중심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과 남한 사이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중간기착지로써 쓸모가 있는데다가, 인프라 건설비를 지원받기에도 수월하기 때문이다. 경의선 연선 지역(평양직할시~안주시~정주시~신의주시) 및 남포시, 강계시 지역은 물론 크게 발전하겠지만 나머지 산간 지역은 음....
국방 면에서는 중국에서 어느 정도 완충지대로 두기를 원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에서 대놓고 침략하겠다고 의지를 드러내지 않는 이상, 군인을 수십만씩 배치해서 긴장관계를 조성하면서까지 경제적으로 손해를 입으려고 자처할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수도권경상도에 이어 3번째로 인구가 많은 지역이라, 선거에서도 무시못할 지역으로 예상된다.
자강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강도는 평안북도에 흡수될 것이다.

[1] 고려 후기의 서북면(西北面), 해방 직후의 서북청년단도 여기에서 유래.[2] 북한의 국보 목록을 봐도 발해 관련 국보는 거의 없다. 발해의 중심지는 고구려보다 훨씬 북쪽이다.[3] 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사실상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과거합격자를 배출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당시 서울은 과거 응시에 가장 많은 인원을 배정받았기 때문에, 서울이 과거합격자가 가장 많은 것은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4] 정3품 이상. 현대로 치면 1급 공무원, 차관보에 해당함.[5] "…그러나 조정에서는 서토를 버림이 분토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 일컫는다."[6] 아이러니하게도 이북 지역에 한정해서 보면 함북 지역이 가장 양반이 많았다.[7] 흔히 호남 지역과 더불어 타 지역의 영향력도 적지 않았다는 식의 말을 하지만 수도권으로 인구 유출이 가장 심한 지역이 어디인지를 생각하면 호남 사투리의 영향이 타 지역에 비해 압도적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