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조선) (r20160728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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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국왕
19대 숙종 이순

20대 경종 이윤

21대 영조 이금

우승우 화백의 상상 어진.[1]
묘호
경종(景宗)
시호


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
(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

각공(恪恭)
능묘
의릉(懿陵)

윤(昀)

휘서(輝瑞)
출생
한성 창경궁 취선당
사망장소
한성 창경궁 환취정
배우자
단의왕후(端懿王后), 선의왕후(宣懿王后)
아버지
조선 숙종
어머니
옥산부대빈 장씨(玉山府大嬪 張氏)
생몰
기간
음력
1688년 10월 28일 ~ 1724년 8월 25일
양력
1688년 11월 20일 ~ 1724년 10월 11일(35년 10개월 21일, 1만 3108일.)
재위
기간
음력
1720년 6월 13일 ~ 1724년 8월 25일
양력
1720년 7월 17일 ~ 1724년 10월 11일(4년 2개월 25일, 154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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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어필. 심약하다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글씨체에서 그런 게 느껴지는가?
1. 개요
2. 출생과 성장
3. 대리청정기
4. 재위
5. 경종은 불임이었나?
6. 연잉군과의 관계
7. 독살설
8. 왕비
9. 능
10.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조선의 20대 왕으로 숙종희빈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숙종영조 사이에 낀 임금인데다 재위기간이 짧다보니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지도가 바닥을 기는 왕이다. 하지만 동시에 기나긴 영조 시대를 설명하는데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게) 빼놓을 수 없는 왕이기도 하다.

2. 출생과 성장


숙종의 첫 아들이었던 까닭에 태어난지 100일도 안되어 원자 책봉을 받았다. 무엇보다 당시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희빈 장씨의 소생이었고, 연잉군과 연령군 같은 다른 왕자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왕자가 경종과 숙빈 최씨 소생의 요절한 아들 밖에 없었기에 그는 숙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장희빈과 이를 배경으로 하는 남인들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던 까닭에 유년기에는 비교적 평탄한 세자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숙종은 알다시피 무수한 환국을 일으키며 신하들을 찍어눌렀고, 어머니가 후궁으로 낮추어지고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그도 인현왕후의 아들이 된다. 어찌보면 어머니의 원수지만 그래도 인현왕후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14세가 되던 해에는 결국 생모 희빈 장씨까지 사약을 받는 사태가 터졌다. 이 때 세자였던 경종은 대신들에게 찾아가 어머니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했지만 "이게 다 세자 저하를 위한 것"이라 둘러대면서 세자의 요청을 쌩깠다. 야사에서는 이 사건 이후로 경종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고 한다.
거기다 생모가 사약을 받는 와중에도 법률상 어머니인 인현왕후의 빈소를 상주로서 지켜야했으니, 마음 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후 1716년의 병신처분으로 2년전 죽은 윤증이 추탈되면서 상황은 그로기로 몰렸다.

3. 대리청정기


숙종 말년에는 부왕이 지병으로 누워 대리청정을 맡게 된다. 이는 노론의 이이명이 직접 독대하여 청한 것 숙종과 독대한 후에 청한 것으로서(정유독대)[2], 주도자에서 보듯 경종의 실수를 통해 세자를 교체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경종의 대리는 내리는 비답이 "아뢴대로 하라", "따르지 않겠다", "유의 하겠다"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극도로 조심스러웠다. 기록에 보면 김창집을 비롯한 노론계 신하들이 유의하겠다 유의하겠다고만 하지 말고 가끔은 모르면 물어보고 의견도 내어보시라고 간했는데 경종의 답변은 "유의하겠다"였다. 아오 싫다고
다만 딱 한번 큰소리를 내며 노발대발한 적은 있다. 승지 유숭이 늦게 입시하자 '당장 여기서 물러나라. 사관들도 물러가라! 신하가 되서 너희들이 이렇게 날 기다리게 할 수 있느냐? 여섯 승지들을 모조리 나문해라!' 하며 폭발적으로 화를 낸것. 돌발 상황에 대신들도 당황해서 어쩔줄을 몰라 했고, 공포에 질린 승지 및 사관들은 데꿀멍하여 세자 앞에서 물러나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를 푼 세자는 지나쳤음을 인정하며 승지들에게 다시 입시를 하라 했다. 아마도 억누른 감정이 작은 일에 터져나온 것으로 보인다. 물론 며칠 뒤에 신하들이 이 일을 지적할 때의 대답은 "유의하겠다"가 전부였다.[3]
어머니가 사약을 받아서 자신도 아버지에게 미운털이 박힌 상태고 연령군, 연잉군이 숙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는데다가 자신도 정궁의 소생이 아니었기 때문에[4] 언제든지 갈릴수 있었기 때문에 신중하게 행동한 듯하다. 정궁인 인현왕후의 폐서인과 복위, 어머니의 사사를 보면서 부왕(숙종)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숙종은 세자교체를 내심 고려했는데 당시 청나라 강희제의 태자가 교체되었고[5], 연약하고 강하지 못한 경종을 못 미더워하는 점이 실록에도 간간히 보인다.
노론에서는 이런 왕의 의도를 알고 연잉군을 밀어주려 안간힘을 썼고, 숙종의 의중을 어떻게든 활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세자를 지지하던 소론 측 인사들이 격렬하게 반발했고, 숙종이 앓아서 누워있는데다 대리청정을 그럭저럭 잘하고 있는 세자를 함부로 바꾸자고 나오기 어려웠다. 당시의 정황을 보면 숙종이 "내가 아파서 왕노릇을 못해먹겠는데 세자에게 대리청정 좀 시키는게 어떠냐?"라고 하자 영의정 김창집을 비롯한 노론 대신들이 즉각 찬동하면서 세자의 능력을 칭찬했는데 그동안 反세자임이 분명했던 노론이 이러는 것이 너무 냄새가 나서 소론 대신 영부사 윤지완 등이 도끼상소를 하는 등 한동안 분위기가 험악했다. 어쨌거나 꿀리는 것이 있었는지 숙종은 "말 좀 가려하지..."라면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예 노론에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 큰 실책을 저지르길 기다렸다가 이를 빌미로 공격하려 했는데 세자가 큰 사고없이 무난히 정국을 이끌어나가다 보니 "어? 어? 이게 아닌데?!" 하고 있다가 실패했던 셈이다.
어쨌든 아슬아슬하게 세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경종은 1720년 숙종이 승하하면서 간신히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6]

4. 재위


즉위 후 노론의 우려와는 달리 피의 복수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즉위했다고 해도 다수파인 노론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경종도 하루가 멀다하고 자리보전하고 눕기 일쑤였으니 치적을 세울만한 환경은 못됐다.
이런 상황에서 노론은 연잉군세제 책봉을 관철시켰고, 심지어 대리까지 주장했다.(;;) 이 대리는 이뤄지지 않았으나 김일경이 이를 근거로 노론의 숙청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면서 피바람이 분다. 또 다음해인 1722년, 목호룡이 노론이 경종을 살해하고 이이명[7]을 옹립하려 한다라고 고변하는 사태(삼수의 옥)가 발생했다. 이렇게 신축년, 임인년 두번에 걸쳐 대숙청인 신임옥사가 일어난다. 이 과정이 경종의 태도변화와 맞물려 매우 드라마틱 하므로 항목 참조. 일부[8]에서는 경종이 처음부터 노리고 있었다는 해석을 택하고 있고, 알려진 해석들은 병약한 경종이 소론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다는 것인데 실록의 기록을 보면 전자의 가능성이 상당하다. 뭘 보고 자랐겠어요 경종이 노론의 변명에 태도를 돌변하여 "결탁이니 교통이니 따위의 말은 심히 무엄하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라고 일갈을 날려버렸다든지...
대리청정 논란으로 유배되어있던 노론 4대신(이이명, 김창집, 조태채, 이건명)이 유배지에서 사약으로 사사되고, 노론측 인사들이 대거 숙청된 뒤 경종 말년까지 소론 강경파들이 집권하며 노론의 씨를 말리는 피의 나날들이 이어졌다.

이때 이후로도 경종은 한번 제대로 분노를 폭발시킨 적이 있다. 노론이 초토화되자 소론 측에서는 얼씨구나 하고 노론 씨말리기에 더불어 영조의 세제 추탈에도 앞장섰는데 그 와중에 너무 경종이 소극적이라는 식의 주장이 나왔다. 그 말에 경종은 전에 없이 크게 분노하여 '늬들 내가 호구로 보이냐 다들 사표쓰고 꺼져!'라며 일갈을 토해냈다. 이번에도 버럭왕 아버지에게 받은건 사라지지 않았다
당황한 소론은 싹싹 빈 끝에 겨우 경종의 화를 가라앉혔고, '우리도 너무 나대나가 노론처럼 싹 갈리는거 아냐?' 하는 불안감에 노론에 대한 공격 수위를 낮추기 시작했다. 바로 그 상황에서 소론 강경파(준론 - 김일경 등)와 온건파(완론)의 분당이 일어났다.
과소평가 받는 면이 없지 않지만 보는 바와 같이 얌전해 보이면서도 신하들을 쥐어잡을 때에는 확실히 쥐어잡았다. 주변에서 끊임없이 이간질 하고 실제로 개인적으로 앙심을 품을 수 있음에도 왕실의 리더로서 똘똘하고 자신 다음의 정통성을 갖춘 동생 연잉군을 지켜줘서 아들이 없었음에도 왕위 계승이 차질 없이 이루어질 수 있게 했다. 어머니 문제, 자신의 좋지 못한 건강, 경쟁자라고 볼 수도 있었던 동생, 갈라져 있던 조정의 분위기등 여러 난제가 산적해 있었지만 숙종과 영조 사이에서 자신의 역할은 충실히 다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노론과 소론의 격렬한 정쟁 속에서 치이다가 결국 즉위 4년, 37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세자 대리청정시절 노론 대신들을 찍어누르고 양전사업을 강행해서 완성시켰던 기록 등이 있는 걸 보면 뒷배경만 안정적이었으면 국정을 잘 이끌어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설도 있다.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밝혀 놓은 남구만의 《약천집》이 발간되었고, 서양의 것을 모방한 소화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9] 와문진종(시계)을 들여온 것도 이때.

5. 경종은 불임이었나?


경종은 자식을 두지 못했고, 이미 연잉군을 왕세제로 지명해뒀기 때문에 연잉군이 그 뒤를 이었다. 이에 잘 알려진 경종의 불임설이 있다.
경종은 젊어서부터 병약했다. 어머니가 당쟁에 휘말려 죄인으로 죽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상황에서, 제2의 연산군이 되어 피바람이 몰아칠까봐 두려워한 노론 신하들이 틈만 나면 갈궈대고, 아버지 숙종도 희빈 장씨의 아들이란 이유로 허구헌날 갈궈대니 거기서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했을 것이다. 미치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하다는 평이 있긴 한데, 노론 측에서 남긴 기록을 보면 살짝 정신이 돌아버린 부분도 있었던 모양. 안 미치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
노론 강경파의 단암만록을 인용하자면 '세자는 때때로 벽을 향하고 앉아서 조그마한 소리로 중얼거려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했다. 또 한밤중에 계단과 뜰 사이를 방황하기도 했고 정신도 안정되지 못했으며 지각도 불분명했다. 숙종의 상에도 한 번도 곡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까닭없이 웃기까지 했다.' 노론의 기록이란 특성상 악의적인 표현일 가능성이 있으나 경종이 느낀 스트레스가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불임설도 여기에 나왔다.
경종이 자식을 두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가장 유명한 일화가 사약을 받기 전 희빈 장씨가 죽기 전에 세자를 보고 싶다고 애원했고, 이에 마음이 약해진 숙종이 세자를 데려오도록 했다. 하지만 희빈 장씨는 돌연 세자의 영 좋지 않은 곳을 꽉 붙잡고 당기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 때문에 경종이 기절했는데 이로 인해 자식을 둘 수 없는 성불구자가 됐고 병약해졌다는 것이다. 내가 고자라니! 이보시오 희빈양반![10]
하지만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만약에 장희빈이 정말로 그렇게 했다면 분명히 사사로 끝날 일이 아닐뿐 아니라 세자에게 했다는 말을 토대로 하면 장희빈은 명백한 대역죄인이 된다. 그렇게 되면 능지, 효수, 연좌 3 콤보 중 하나라도 해야 정상인데 그렇지 않았다는 건 앞에서 언급한 두 개의 말은 그저 창작에 불과하다는 소리가 된다.
또한 경종이 불임이 되어 자식을 못낳으면 당연히 세자 자리에서도 밀려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 당시에는 후사를 이을 수 없는 사람이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떄문이다. 후사를 이을수 없음은 세자에서 밀려나가고 세자에서 밀려나가지 못함은 왕이 될 수 없는것이며 더 나아가 죽음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남인복귀, 명예회복은 꿈조차도 꿀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장희빈이 당연히 모를 리가 없다.
애초에 경종을 세자 자리에 앉히려고 노력한게 장희빈임을 감안하고 더군다나 사약 먹을때는 금부도사를 비롯해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 앞에서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금부도사가 보고하지 않을 리가 없고 보고하면 즉시 기록으로 남겨지는데 정사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즉 야사는 야사일 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경종이 성불구였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며, 학자들은 대체로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생식능력 저하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결혼을 2번이나 했음에도 끝내 자손을 두지 못했고, 계비인 선의왕후와 함께 양자를 들이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왕실의 대전제, 대원칙인 효-현-숙 '삼종의 혈맥'을 고려하면 해당자는 연잉군의 아들(후에 진종소황제로까지 추숭되는 효장세자)뿐이었다. 그러나 즉위 당시 효장세자의 나이는 겨우 생후 16개월이었다. 무슨 수를 써도 연잉군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경종 연잉대원군 합하 납시오! 그게 아니라면 의외로 간단한 해법이 있는데 소현의 증손자 밀풍군이었다. 이인좌의 난에서 그들이 괜히 밀풍군을 옹립한 것이 아니다.[11]
세자/세제 책봉은 청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되는 일이었는데 청나라에서 "아니 왕이 아직 젊은데 왜 동생을 세제로 책봉하나?"라 의문을 제기하자 당시 책봉요청을 위해 갔던 노론의 이건명, 윤양래 등이 "왕이 발기불능[12]이라 자손을 둘 수 없다"고 보고했다.[13] 결국 청나라의 기록에도 남게 됐는데 그 때문에 경종이 성불구였다는 설이 퍼진 모양이다. 이래저래 안습.

6. 연잉군과의 관계


노론과 소론의 정쟁 속에서 이복동생 연잉군이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이었으나 형제 간에 우애는 각별했다고 한다. 소론의 공격으로부터 연잉군을 필사적으로 보호했고, 동생이 찾아오면 환대하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등 평소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경종이 병색이 완연해져 자리보전을 하고 있을 때 연잉군이 병문안을 들었다. 그러자 아픈 와중에도 경종이 "창문을 열어라, 세제가 덥겠구나"라고 말했다고 할 정도.
박시백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박상검이 일으킨 역모사건 이후 경종이 속으로는 연잉군을 매우 불신했으나, 세제에 대한 의혹들을 차단하고 보호함으로서 좋든 싫든 연잉군이 자신의 하나뿐인 후계자임을 인정했다고 주장한다. 법적으로 문제없는 계승자는 연잉군뿐이었다. 소현세자의 후계인 밀풍군은 너무 멀고 자칫 잘못하면 효종의 정통성을 건드릴 수도 있었다. 그의 시각에 따르면 영조는 이후 "황형"이라며 경종의 우애를 강조했으나 이것은 정치적인 쇼맨십이었을 뿐이며, 진정한 대계를 생각한 경종이 더욱 우애를 표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마디로 줄이면 애증.[14]
경종과 연잉군의 정치적 대립이 극에 달했을 때는 경종이 연잉군에게 직접 폭언을 한 적이 있다. 신축환국 직후 정치적 위협을 느낀 연잉군이 '환관과 궁녀 중 나를 해치려 하는 자가 있다'며 조사해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하자 경종은 이를 거부했다. 연잉군이 거듭 요구하자 경종은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린 것. 임금이 직접 욕을 했을 경우 실록에서는 이런 식으로 적절히 필터링을 하는 편이다. 이봐 난 왜 필터링 안해준건데? 연잉군의 의도는 내관 및 궁녀 집단에 있는 자신의 반대 세력을 탄압함으로서 세제로서의 위치를 강화하고자 한 것인데, 이를 간파한 경종은 지나친 부탁에 분노한 나머지 연잉군에게 폭언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연잉군이 '주상께서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시니 차라리 세제 자리를 내놓겠다!'는 폭탄 선언을 거듭해서 했고, 당황한 조정 대신들이 수사를 속개해[15] 실제로 연잉군을 해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내시 박상검과 문유도, 궁녀 석렬과 필정을 잡아들여서 자백을 받아낸 후 사형을 집행했다.[16] 이로 인해서 영조의 위치는 제법 견고해졌다.
그러다가 목호룡의 고변으로 신임옥사가 터지자 영조는 졸지에 역적 수괴로 몰릴 판국이 되었고 거적을 펼치고 그위에 엎드려 '나같은 죄인이 어찌 세제가 됩니까?' 라고 울며불며 고할 정도였다. 하지만 경종은 노론이 세운 세제임에도 불구하고 영조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왕에게 독을 먹인 김씨 성의 궁인을 찾아야 한다는 상소에도 김씨가 한둘이 아니라 못 찾겠다고 거부하여 옥사의 확대를 막았다.
서로의 속마음이야 어쨌든 경종은 영조를 소론 준론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었고, 영조 역시 죽을 때까지 이복 형 경종에 대해 자주 회상하고 그리워하는 말을 자주 했다. 특히 영조 재위 초반기 영조가 내세운 탕평책의 중심인물들은 바로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 온건파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소론 강경파들은 끝내 영조를 거부했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노론의 지지를 받은 세제 영조가 소론 정권 아래서 무사히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고 나아가 영조의 탕평책에 힘을 실어준 셈이니 영조 입장에서 경종은 분명한 생명의 은인이자 자신의 정책에 힘이 된 신하들까지 내려 준 '어진 황형'이다. 영조가 경종에 대한 우애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면도 있지만, 자기 권력이 막강해져서 꼭 이런 정치적 제스처를 취할 필요가 없는 말년까지도 형을 그리워한 행적을 보면 영조가 경종을 그리워한 것은 완전히 정치적 제스처였다거나 가식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심지어는 죽기 6년 전인(경종이 죽은지 약 46년 후) 77세 때 손자 정조와 함께 존현각에 올라서는 "이 건물이 우리 황형께서 세자 시절 공부하시던 곳이다. 오늘 할아비와 손주가 함께 앉으니 황형에 대한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는구나"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근데 자기 아들한테는 왜 그 모양[17] 오죽하면 영조가 죽고 16년이 지난 정조 16년에는 윤구종이 혜릉 (경종의 왕비인 단의왕후 심씨의 무덤) 앞에서 "이 무덤에서도 말에서 내려야 하나?"라는 발언을 한적이 있다는 혐의로 붙잡아 국문하니 '의릉(懿陵)에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려 했다(='경종에게는 신하로서 충성하고 싶지 않았다'는 뜻)'하자 정조가 "아니 선왕의 효성과 우애는 모두가 알아주는데 어찌 이럴수 있냐?"라고 한 적이 있다. '이게 무슨 흉악한 발언이며. 천지간의 사람으로서 어찌 이처럼 극악한 말을 할 수 있는가'라며 경악한 것은 덤.
이후 영조는 경종을 모셨던 친소론 상궁과 내관들로 하여금 사도세자를 모시게 하여 사도세자의 권위를 높여주려 했는데 이게 나중에 사도세자가 소론이 아니냐는 다 썩은 떡밥을 남긴다. 유의해두자. 사도세자가 친소론이란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7. 독살설


죽기 직전 연잉군의 독살 시도가 있었다고도 한다. 경종은 말엽에 병환으로 기운을 잃고 잘 먹지 못했는데 게장과 생감을 올리자 웬일로 맛있다고 잘 먹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극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렸고 독살설 이전에 못먹던 사람이 갑자기 그런 거한 음식을 먹었으니 당연히 속이... 그 후 다시 건강 상태가 악화된다. 경종의 상태가 오늘내일하자 세제 연잉군이 우왕좌왕하면서 뚜렷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던 이공윤을 중심으로 한 어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삼과 부자를 들게 했고 경종은 연잉군의 처방 후 잠시 기운을 되찾는 듯 했으나[18] 얼마 안가 다시 건강 상태가 다시 악화되어 회복하지 못하고 승하했기 때문. 그 때문에 신임옥사 때 주모자들이 경종을 독살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는 점과 이들이 세제와 가까운 사람들이였다는 정황 증거 때문에 소론을 중심으로 경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독살설은 근거가 부족하다. 왜냐면 게장을 같이 먹으면 몸에 안 좋기는 한데[19], 죽을 정도는 절대 아니고 어의가 처방한 약과 연잉군이 올린 인삼차가 상극이기는 했지만, 어의가 믿을 놈이 못 되었다. 툭하면 이 약 처방했다가 다른 약 처방했다가 하는 어의를 믿을 수 있겠는가.[20] 하지만 영조 본인도 어느 정도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이 비전문가이면서 어의의 처방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상극인 처방을 강행한 점이다. 심지어 이러면서 한 말이 "내가 의술은 몰라도 인삼과 부자가 호랑이 힘 기운켈로그 콘푸로스트냐...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라고(...). 이 말을 하고 얼마 안 지나 새벽에 바로 경종은 사망했다. 그렇지만 독살설을 제기하기는 조금 무리가 있다.[21]
더군다나 정치적 입장에서도 연잉군으로서는 경종이 죽어봤자 득 될 일이 없다는 주장 또한 존재한다.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기반 세력이 탄탄하다면 모를까, 소론이 득세하고 있는 와중에 자신을 끝까지 보호해준 형을 스스로 죽여가면서까지 왕위에 올라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사방이 정적들로 둘러싸인 와중에 어의의 의견을 비난하면서까지 인삼차를 처방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연잉군이 경종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세제가 처방한 약을 먹고서도 임금이 끝내 절명했다면, 바로 이와 같이 세제에 의한 독살설이 떠도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더군다나 자신을 옹호해줄 세력이 미미한 상황이라면 자칫 이를 빌미로 쿠데타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인데,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바득바득 인삼차를 권한 것은 그만큼 경종이 살아주길 바랐기 때문이라는 것. 한마디로 연잉군 입장에서는 독살이라는 위험한 도박을 저지르면서까지 정적들이 가득한 조정에서 왕노릇을 할 바에야 경종이 나름대로 오래 살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연스럽게 보위를 이어받는 편이 훨씬 안전하고 본인 입장에서도 편했던 것이다.
다만 독살설에 신빙성이 있느냐 없느냐와는 별개로, 위의 주장을 근거로 독살설을 부정하는 것은 무리라는 반론 또한 존재한다. 지지 기반이 탄탄하기는커녕 정적들이 바글대는 위태로운 정국에서 저런 도박을 할 수 없다는 위의 주장에 따르면 당장 계유정난은 일어날 수도 없었으며, 세조는 존재할 수 없었다.[22][23] 연잉군이었을 당시 영조는 정말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던 게 맞다. 걸핏하면 역적 모의에 자기 이름이 걸려 들었는데, 당시 임금이 경종이어서 망정이지 다른 시대였으면 애저녁에 몇 번이고 박살이 나서 뼈도 못 추려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비록 경종이 본인 생각이야 어쨌든 간에 죽을 당시까지 영조를 보호해준 덕에 죽는 일까지는 면했지만 당시 연잉군으로서는 참으로 뭣같은 상황이었고, 결코 안심할 수 없는 가시 방석 중의 가시 방석 위였으며, 경종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을 경우 주변 소론 대신들의 부추김에 따라 마음을 바꿨을 가능성 또한 상당하였다. 그야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니까. 그런 상황에서, 무슨 게임처럼 세이브 로드를 하면서 미래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영조가 인간으로서 느꼈을 감정을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인간은 결코 그렇게까지 계산적이지 않으며, 저렇게까지 궁지에 몰리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존재다. 오다 노부나가를 시해한 아케치 미쓰히데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 또한 좋은 참고가 된다. 사건 터진 뒤에 보기에는 "쟤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는 일들이지만, 그러한 일들은 역사 속에서 이미 몇 차례고 일어난 바 있다. 그리고 당시 영조의 상황은 그저 몸 사리며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기 보다는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어차피 죽을 것인데 이판사판으로 한 번 걸어 봐도 충분한 상황이었다.[24] 동기가 충분했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꽤나 충분했다. 게다가 경종을 독살함으로써[25] 영조에게 갈 이득이 없다는 주장은 사실 최소한 영조가 즉위를 하지 못했을 때에나 가능한 주장이지, 영조가 즉위를 한 마당에 가능한 주장은 아니다. 무슨 말이냐면, 위의 주장은 다름 아닌 영조 스스로가 즉위함으로써 모조리 다 개박살을 내버렸다는 것이다(...). 이 '개박살을 내버렸다'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경종의 죽음에 이어 즉위한 영조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노론과 더불어 조정을 장악하였다. 전세가 하루아침에 역전된 것이다. 하다 못해 경종이 생각을 바꿔서 말년의 선조처럼 후계 문제를 두고, 폐세제까지는 못 한다 쳐도 경종 본인이 명색이 왕인데도 그따위 취급을 받는 것을 두고 너무나도 빡이 치며 억울해진 나머지 밀풍군[26]이든 양자든 뭐라도 끼고 다른 말을 하기라도 했더라면 광해군이 그렇게 당했듯이 영조 또한 꽤나 큰 타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냥 멀리 갈 것도 없이 경종 본인이 바로 이런 이유로 노론으로부터 온갖 수모를 다 당했다.[27] 그런데 그런 말을 할 새도 없이 경종이 덜컥 골로 가버렸다. 사실 영조로서는 정말 좋은 타이밍이었다고 볼 여지도 충분한 것이다. 마음 바꾸기 전에 끝나버린 것. 이러한데 경종이 죽음으로써 정말 영조에게 이익이 없다고 볼 수 있는지는 좀 생각을 해봐야 한다. 그렇게 즉위하고 얼마 안 가 영조는 그 정적인 소론, 특히 준론을 향한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하였다. 물론 이인좌의 난을 비롯한 불미스러운 사건들도 더러 있긴 했지만 이괄의 난 때처럼 파천을 한다든가 하는 일도 없이 모두 무난하게 극복해 냈고, 괘서 사건이라든가 과거 시험장에서 빅엿 좀 먹은 일이라든가 같은 건 확실히 영조의 기분을 잡쳐버리는 데에는 충분했을지언정 영조의 조정까지 잡쳐버리는 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영조의 조정은 그냥저냥 10년쯤 해먹은 정도가 아니라 조선 왕조 500년 중 무려 10분의 1인 52년을 해먹으며 가장 오래도록 장수하였다. 정통성 문제로 어느 정도 시달린 건 사실이지만, 그게 그리 심각한 문제였다고 보기에는 영조 정권이 상당히 안정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러니 영조를 까는 사람들도 영조 시대 왕권이 약했다는 둥 정국이 불안했다는 둥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영조 입장에서 경종은 하여간 못해도 비교적 적당한 타이밍에 죽어줬다고 보는 게 옳다. 그뿐 아니라 영조는 조선 후기를 잘 이끌어 나간 명군 중의 한 명으로 역사에 그 이름이 남았고, 반면에 그 적이었던 소론은, 물론 상당 부분은 소론 스스로가 자초한 측면이 강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정말 씨가 말라버렸다. 말 그대로 개박살이 나버린 것.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정조 독살설만큼이나 당시에는 퍼져 있었던 이야기로 경종이 죽은지 31년이 지난 후에 영조가 친림하던 과거 시험장에서 영조를 찬탈자에 독살자라고 마구 욕한 내용을 써서 냈다가[28] 친국을 받던 죄인 중 하나인 신치운이 "신은 갑진년(영조 즉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이외다"라고 영조의 면전에서 대놓고 디스를 했다는 기사가 실록에도 나오며[29], 조선왕조 5백년에서는 궁녀 몇명이 어린 사도세자(최수종 분)에게 이 이야기를 자주 해주었고 이 궁녀들이 친국들 당하는 것을 사도세자가 훔쳐보다가(…) 사건의 진상을 아는 것으로 처리했다.[30]
그의 죽음과 경종이 죽기 직전에 벌어진 행동은 비주류로 몰린 소론과 남인 세력 등에게 큰 논란이 되었고 영조는 즉위 내내 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단순히 비난으로 끝난게 아니라 이인좌 등이 선왕의 원수를 갚자는 복수설치의 기치를 내세우고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의 난이 터지면서 소론, 남인의 음모론 신봉이 단순 뒷담이 아니라 국가를 흔들 수 있는 내전으로 번질수도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게다가 그 이후로도 무신년의 배반자인 전 전라감사 정사효 등이 역모를 꾸몄고 영조 31년에는 윤지의 나주괘서사건이 있었으며 심정연,신치운 등의 왕의 친림시험장 테러사건이 터진다. 덕분에 영조는 자신의 정통성에 거의 발악을 하면서 집착했고 노론 4대신은 물론 김용택을 비롯한 1급 반역자들까지 날 위해 한 것이다!란 명분으로 죄다 신원시켜주었다. 그리고 영조 31년(1751)에 이르면 천의소감의 저술을 지시하여 자신의 즉위 정당성을 대대적으로 알리는데 그 중 '내가 게장보낸게 아니라고 이놈들아!'라고 공개적으로 독살설을 부인하는 지경에 이른다. 즉위 후 30년이 넘도록 게장 독살설에 시달렸던 것이다. 어쨌거나 노론이 지지한 임금, 영조를 흔들려면 독살설을 신봉하여 영조를 찬탈자로 낙인찍어야 했던 소론 준론과 남인들은 계속해서 반역했고 결국 수백명의 소론 준론과 남인들이 처형되는 피바다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소론 완론과 온건한 남인들도 역당으로 낙인찍혀서 입지가 굉장히 좁아졌고 영조 31년 이후에는 "지난 날의 형벌이 너무 너그러웠다는 것이 입증되었다"는 논리로 조태구, 유봉휘 등이 역률로 추죄되고 이광좌도 직첩을 빼앗기는 등 공식 역당으로 낙인찍혀서 개발살나고 만다. 당연하지만 다른 당파들이 역적이 되어 내쫓긴 조정은 노론이 차지했고 즉위 초에 정호, 민진원, 유척기 등 의리에 불타오르는 노론 명문가들에게 지친 영조는 홍봉한이라는 한미한 관료를 대대적으로 밀어주게 되니 노론, 그 중에서도 일부 유력 가문 중심의 척신정치를 낳게 된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세간에는 게장과 감을 같이 먹으면 죽는다는 속설이 퍼지게 되었다(...).
몸이 안 좋은 것 자체는 사실이었던 듯하다. 자식도 없었던 점이며 마흔도 못되서 죽은 점이며... 심지어 경종 2년 6월 24일에는 삼수의 옥 문제를 논의하다가 신하들 앞에서 오줌을 싸기도 했다. 민망해진 대신들이 물러나길 청했으나 경종은 괘념치말고 남으라고 했다. 그런데 사헌부 지평인 이거원이 "군신간에도 예의가 있는데 말도 안하고 소피를 싸다니 예의에 어긋납니다"라고 왕을 비판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대중이 여기는 경종의 모습은 마른 체형에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비만 체형이었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는데, 26세 때인 1714년 기사에는 경종의 모습을 "비만태조(肥滿太早·아주 일찍부터 살이 찌다)"라고 했고 재위 2년 기사에는 "성체비만(成體肥滿·다 커서도 살이 쪘다)"으로 묘사돼 있다. 비만한 만큼 더위를 많이 느끼고 땀이 많이 나는 질환을 자주 앓았다.

8. 왕비


그의 두 아내들은 꽤 팔자가 사나운 편이었다. 첫 아내 단의왕후 심씨는 요절했는데, 실록에 보면 정신질환이 있었다고 한다. 경종의 자식이 없는 이유는 단의왕후의 탓도 있다. 그녀의 집안은 후에 이인좌의 난에 참가하는 바람에 몰락했다.
2번째 아내 선의왕후 어씨는 일찍부터 영조를 경계했다. 선의왕후는 14세에 경종과 혼인했는데(...) 불과 2년 뒤 숙종이 사망했고, 뒤이어 경종이 사망했으므로 여러 모로 아이를 가지기 힘든 상황이기는 했다. 어씨와 그의 친족들은 다른 왕족을 양자로 들여 경종의 뒤를 잇게 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이 탓에 영조와 사이가 나빠서 영조가 즉위한 뒤에 둘이 서로를 무시하는 일이 잦아 난감한 일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이인좌의 난을 뒤에서 부추겼다는 말조차 있을 정도니(...) 그래서 그런지, 효장세자를 그녀가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효장세자 항목에 보면 나와 있듯이 효장세자는 일개 궁인에 의해 독살당했다.

9. 능


의릉 항목으로.

10.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사극에서는 주로 어린 시절이나 청소년기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왕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인 장희빈이 주역인 경우가 많다 보니 정작 경종이 왕이 된 이후의 이야기는 잘 다뤄지지 않는 편이기 때문. 왕이 된 이후 이야기를 다루려 해도 재위기간이 짧았으니 사극에서 다루기는 쉽지 않으며 이번에는 동생인 영조에게 밀리는 판. 37세에 사망했기에 '청년 임금'이라는 이미지는 완전히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사극 속 경종은 주로 청년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복 형은 청년 이미지인데 이복 동생은 할아버지 이미지
이강백이 지은 희곡 '진땀 흘리기'는 노론들에게 빨리 영조에게 양위하라는 괴롭힘을 당하는 경종의 심리적 고통을 다루고 있다.
SBS옥탑방 왕세자에 등장한 왕세자 이각의 모델이라는 설이 팬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친모가 폐위된 왕비이고, 경종 독살설의 증거로 꼽히는 게장과 감이 극에서도 소재로 등장하며, 경종은 세자 시절에 한번 세자빈[31]을 죽음으로 잃었기 때문.
MBC동이에서 왕세자로서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역사왜곡으로 태어날때부터 고자였다는 설정을 적용했다. 또한 연잉군(영조)와의 관계가 매우 우애가 깊게 묘사되어 있다.
SBS대박에서는 왕세자 시절부터 나오는데, 역을 맡은 배우는 현우. 근데 작가가 경종에게 무슨 악감정이 있는지 매번 연잉군에게 열폭을 해대는 찌질이로 나온다.

[1] 그러나 비대하였다는 경종 묘사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2] 취소한 부분과 수정한 부분의 차이는, 당시 독대의 내용이 직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숙종과 이이명이 비밀리에 세자의 대리청정을 합의했다고 확신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단지 그렇게 추정할 뿐인지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3] 여담으로 숙종은 비망기를 통해 지나친 행동이었다고 질책하였는데, 세자를 두둔하는 소론 신하들이 오히려 '주상께서 지나친 행동임. 비망기로 질책할 정도는 아닙니다'라고 말해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었다. 당시 숙종은 중병을 앓고 있는데다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세자의 권위를 깎아서는 안된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것 같다. 숙종은 "내가 세자 아빤데 부자간의 정리로 그런 말도 못하냐?"라고 투덜거렸으나 병세가 위중하여 화도 못내고 드러누워 버렸다. 하지만 이 양반의 작은 아들내미는 대리청정하는 자기 아들을 개같이 갈궜으니...[4] 따지고 보면 후궁 소생. 장희빈이 한때 중전까지 된 적은 있으나, 경종을 낳을 당시 장희빈의 신분은 중전이 아니었다.[5] 새 태자가 바로 경종 년간에 즉위한 옹정제이다.[6] 숙종이 조금만 더 건강했거나 오래 살았으면 왕에 못 올랐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조선시대 시스템 상 왕이 마음대로 세자를 팽개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무기력하긴 해도 실수도 하지 않는 경종을 내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님 뒷날에 신임옥사 때 보여준 성질머리가 발동해서 제 3차 왕자의 난이 터졌으려나?[7] 이이명이 부각된 것은 아들 이기지가 경종 살해에 참여한데다가 이이명이 전주 이씨로 왕실의 먼 친족이었기 때문이다. 실질적 이유는 노론 4대신의 필두였기 때문이지만...[8] 현대 저작물 중에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다루고 있다.[9] 불 끄는 소화기가 맞다. 수총기(水銃器), 즉 물대포였다. 경종 실록 3년 5월 25일에 보면 관상감의 허원이 청나라에서 들여왔다고 한다. 그러나 비용 문제로 각 군문에 수총기를 두라는 목표는 실현되지 못했다.[10] 어떤 야사에는 이때 장희빈이 세자의 국부를 움켜쥐며 내 이씨의 씨를 말리리라!!!라고 외쳤다고 전하기도 한다(...)[11] 하지만 밀풍군 영입이 살짝 힘든게 밀풍군은 경종과 촌수가 8촌이나 된다. 왕실에 자손이 없기로서니 정말 그렇게 되는 경우는 가까운 친척이 아얘 없을경우인데 연잉군이 있는 마당에 밀풍군 영입은 명분없는 행동이다.[12] 음위증(陰萎症)이라고도 한다.[13] 이는 모욕을 넘어서 능멸에 가까운 발언이다. 발언의 수위를 생각하면 당장 주살당해도 할 말이 없는 수준. 주살 수준이 아니라 경종 정도의 배짱이면 아예 이건명 집안 자체를 박살 내버릴수도 있고.우리 임금 고자임, ㅋㅋㅋ 경종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훗날 이건명이 사약을 받아 죽고 경종은 급속도로 쇠약해져 2년만에 죽는다.[14] 지금 세제를 내쳐버리면 종사는 어찌한단 말인가? 미우나 고우나 지금 왕실엔 세제와 나뿐이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5권中.[15] 노론은 물론이고 소론조차 세제를 편들었다. 반대 세력이긴 해도 어쨋든 확고한 왕위 후계자인 세제 대신 환관 및 궁녀들을 편들 수는 없었기 때문.[16] 다만 박상검의 경우 자복하지 않고 죽었고 석렬과 필정은 자살했으며 문유도만이 자복했다.[17] 영조는 이런 행동을 매우 자주하는 임금이기도 했다. 걸핏하면 부왕 숙종을 그리면서 울고, 생모인 숙빈 최씨를 그리면서 또 울고... 가뜩이나 눈물을 필살기로 장전한 임금이었는데 잔정도 많았던듯 하다.[18] 콧등이 따스해지고 눈빛이 안정되었다고 한다.[19] 식중독을 일으키기 쉬운데 여기에 감의 탄닌 성분으로 인해 소화불량이 일어나기 쉽다.[20] 당시 어의였던 이공윤은 강한 처방을 내리는 것으로 명성을 얻은 의원이었다. 당시 연잉군이 인삼과 부자를 올릴려고 하자 그러면 전하께서 기를 능히 돌리지 못하실 것이다 라고 반대했는데 기를 능히 돌리지 못한다는 건 사실상 그랬다간 죽으실 거다 라고 말한거나 다름없다.[21] 이 때문인지 노론에 의해 기록된 경종수정실록에는 어의 이공윤이 인삼차를 먹이면 안된다고 반대한 내용 자체를 삭제해버렸다. 문제는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인데다 경종실록의 내용이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의심만 더욱 증폭시키고 말았다.[22] 당시 수양대군이었던 세조계유정난 직전까지만 해도 조정에서 가장 약소한 파벌을 이끌며 수세에 몰려 있었고, 주변에는 변변한 인물이 없어서 시정잡배들까지도 부려야 했을 지경이었다. 이런 세조가 보위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본인이 잘나서라기 보다는 김종서를 비롯한 고명대신들과 조정이 바로 위의 주장을 근거로 마음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23] 한데 공교롭게도 세조 또한 왕자 시절에 형 문종이 가족이라고 잘 보살펴주었다. 하지만 세조는...[24] 하다 못해 수양대군도 역모 관련해서 이름이 오른 적은 없었고 거사 전까지는 최대한 몸 사리며 지냈는데 연잉군은 주변의 잘못에 더해 본인도 처신을 좀 이상하게 해서 잊을만하면 이름이 튀어 나왔으며, 경종이 승하할 당시에는 정말로 막다른 길에 내몰린 상태였다.[25]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독살설이 맞다는 가정 하의 이야기. 진상은 아무도 모른다.[26] 이게 아주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건 후에 이인좌의 난을 통해서 드러난다. 경종이 좀 더 오래 살면서 소론의 부추김을 받거나 경종 본인이 신임옥사 때처럼 빡이 확 돌거나(...) 아니면 연잉군 쪽에서 뭔가 또 꼬투리가 잡히는 식으로 일이 틀어진다면 밀풍군 또한 아주 불가능한 패까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말 그대로 죽을 위기에 놓인 채 가시밭길을 걷고 있던 영조로서는 이 또한 아주 무시하진 못했을 것은 자명하다.[27] 숙종이 죽기 전에 후계 문제를 흔들어버린 바람에 경종은 이들로부터 말 그대로 임금 취급도 받지를 못 하였으며, 그 적수는 물론 연잉군이었다.[28] 조선시대엔 이게 사실이건 거짓이건 간에 자기는 물론 친지들까지 죄다 찢어죽여달라고 애걸하는 수준이다.(...)[29] 이전에도 영조는 친국을 하면서 자신의 출생 루머나 독살설 운운하는 내용은 전부 기록하지 말도록 사관에게 엄포를 놓았다. 다만 이때 신치운의 진술만큼은 기록되었는데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실신 직전에 이르렀고, 때문에 사관에게 기록하지 말라고 지시하는 것을 깜빡 잊었기 때문이었다.[30] 동궁에서 자란 사도세자의 궁에는 경종시절부터 그들을 모셔온 밀려난 상궁, 내시들이 많았다는 것인데 이 시각을 따른 것이다.[31] 청송 심씨로, 이후 단의왕후로 추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