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3세 (r20190312판)

 

1. 영국
1.1. 소개
1.2. 즉위 이전
1.3. 찬탈
1.4. 사망
1.5. 유골 발견
1.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2. 셰익스피어의 희곡
3. 1995년도 영화
3.1. 개요
3.2. 특징
3.3. 자잘한 얘기들


1. 영국


영국 국왕
요크 왕조

튜더 왕조
에드워드 5세

리처드 3세
헨리 7세

[image]
난 친구 같은 거 없어[1][2]
왕호
리처드 3세
(Richard III)
출생
1452년 10월 2일
노샘프턴셔 파서링게이 성
사망
1485년 8월 22일 (32세)
레스터셔 보즈워스 필드
장례식
2015년 3월 26일
레스터셔 성당
재위
잉글랜드 왕국의 왕
1483년 6월 26일 ~ 1485년 8월 22일
배우자
앤 네빌 (1472년 결혼 / 1485년 사망)
자녀
에드워드, 존, 캐서린
아버지
제 3대 요크 공작 리처드
어머니
세실리 네빌
형제
앤, 에드워드 4세, 에드문드, 엘리자베스, 마가렛, 조지
서명
[image]
[image]
리처드 3세의 문장


1.1. 소개


장미전쟁 당시 영국의 국왕으로 재위기간은 겨우 2년에 불과했다. 에드워드 4세의 동생으로 조카들이었던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 리처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섭정(Lord Protector)[3]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후 돌변해서 조카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됐다.

1.2. 즉위 이전


1452년 10월 2일 포더링헤이(Fotheringhay) 성에서 요크 공작 리처드와 세실리 네빌의 13남매 중 12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웬즐리데일에 있는 미들햄(Middleham) 성에서 보냈는데, 그 성은 사촌형이기도 한 워릭 백작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의 소유였다. 그곳에서 리처드는 워릭의 딸들 이사벨과 앤, 그리고 워릭의 피후견인 프랜시스 러블과 친하게 지냈고 이후 그 친구 관계는 평생 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1460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아버지와 둘째 형 에드먼드가 죽자 어머니가 바로 윗형 조지와 함께 저지대 국가들로 보내어 1년간 피난 생활을 했다. 그 뒤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에드워드 4세로 즉위한 큰형으로부터 글로스터 공작위를 받았다. 다만 아직 나이가 어려 어린 시절 살던 미들햄 성으로 보내져 12살까지 기사 훈련을 받았다.
사춘기를 겪는 동안 리처드는 선천성 척추측만증으로 고통받았다는 것이 유골 검사 결과 밝혀졌다. 그리고 이 시기에 사생아 2명(내지 3명)을 낳았는데 그들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비슷한 시기 에드워드 4세와 옹립공신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을 계기로 반목하고 있었다. 사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신분도 낮았고[4] 결혼도 미모와 재산에 반해 즉흥적으로 비밀리에 진행되었기에 대부분 귀족들은 물론 추밀원까지 반대했고 여론도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명예를 크게 실추당한 워릭 백작의 불만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당초에 프랑스 공주와 에드워드 4세의 결혼을 추진하고 있던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의 갑작스런 결혼으로 부랴부랴 혼인동맹을 수습하느라 대외적으로 망신을 당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의 첫째 남동생 앤서니는 별다른 능력 없이 오로지 누나의 후광만으로, 짧은 기간에 그와 맞먹는 힘을 지녔기 때문에 워릭 백작은 개인적인 자존심까지 상처입었다.
결국 1470년 10월, 리처드는 형인 클러렌스 공작 조지와 함께 랭커스터파로 전향하여 헨리 6세와 앙주의 마거릿에게 갔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켜 순식간에 런던을 점령하였고 에드워드 4세는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때 리처드 워릭 백작이 형인 클러렌스 공작을 왕으로 밀고 리처드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하자 다시 뒷통수를 치고 이중첩자 노릇을 하다가 에드워드 4세 진형에 합류하여 함께 있었는데,
서둘러 잉글랜드를 빠져나오느라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에드워드가 자신의 모피 외투로 뱃삯을 지불하려고 하자, 상륙지의 토지 관리인에게 서둘러 달려가서 3파운드를 빌려와 뱃삯을 내 주었다. 형제는 누이 마거릿이 시집가 있던 부르고뉴에서 망명 생활을 했는데, 부르고뉴 공 샤를(샤를 용담공)은 처남들의 망명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노발대발했지만 나중에는 군사 1200명과 배 36척을 지급해서 에드워드의 귀환을 도와주었다.
1471년 3월 11일 부르고뉴를 출발한 에드워드와 리처드는 요크 파에 동정적인 동앵글리아에 상륙하려 했으나 폭풍 때문에 3월 14일, 홀더네스 지역에 상륙했다. 그 지역은 처음에는 그들의 진입을 거부했지만 에드워드가 '왕위가 아닌 그저 요크 공작령만 돌려받으러 왔다.'고 주장하여 겨우 문을 열어주었다.[5] 형제는 조지의 지지를 되찾았고, 1471년 4월 14일 바넷 전투에서 리처드는 17살의 나이에 군대의 선봉에 섰다.
이 전투의 승리에 그가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논란이 있지만, 같은 해 5월 4일 튜크스베리 전투에서는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 확실하다. 리처드는 두 전투 모두에서 선봉에 섰지만, 튜크스베리 전투가 끝난 뒤에는 마셜 백작(이후 노퍽 공작) 존 하워드와 함께 포로로 잡힌 랭커스터 파 주요 인물들을 재판했기 때문이다. 형인 클러렌스 공작은 에드워드 4세에 반역죄로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다가 처형되었는데 훗날 리처드가 포도주 통에 넣어서 살해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에드워드 4세는 1472년 북부 지역에 대한 정부의 통치력을 높이고 경제적, 행정적으로 낙후한 북부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북부자문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리처드에게 잉글랜드 북부의 통치권을 주어 자신의 대리로서 그곳을 다스리게 했다. 리처드는 그때부터 1483년까지 북부를 다스렸는데, 요크 시를 중심으로 북부 전역에서 인기가 높았는데, 북부자문위원회의 최고 민사법원장으로 일하면서 공정한 법 집행을 했기 때문이다. 북부자문위원회는 요크셔와 북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주로 토지 분쟁을 해결하고 왕의 평화를 지켰으며 범법자를 처벌했다. 그 결과 북부의 치안은 이전에 비해 크게 좋아졌고 경제적으로도 점차 나아졌다.
하지만 1470년대 중반부터 스코틀랜드의 잦은 침입이 문제되었고, 1480년에는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기에 전쟁을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에게 위아래에서 협공당하는 막장 상황이 도래할 것이었다. 이에 리처드는 그해 5월 12일 북부 군대 사령관이 되어 노섬벌랜드 백작과 함께 맹렬한 반격을 했고 11월 왕과 자문위원회가 공식 선전포고를 하자 본격적 공격에 돌입하... 려고 했지만 왕이 제때 군대를 이끌고 도착하지 못했고 스코틀랜드 역시 지도부의 분열로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여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1482년 8월 초까지 간헐적인 접전만 계속해야 했다.
8월 초, 리처드는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 들어가 스코틀랜드 왕의 남동생 올버니 공작이 화해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공격을 늦추지 않아서 수백 년 동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서 주인이 바뀌어 왔던 버윅-어펀-트위드(Berwick-upon-Tweed)를 8월 25일 비로소 손에 넣었다. 리처드의 점령 이후 다시는 버윅의 주인이 바뀌는 일이 없었고, 바로 그날 에드워드 4세로마 가톨릭 교황 식스토 4세에게 리처드가 에든버러와 버윅의 시민들을 모두 살려주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다.

1.3. 찬탈


1483년 4월 9일, 에드워드 4세낚시 여행을 떠났다가 뇌졸중으로 나이 40살에 급사하고 말았다. 원래 그는 즉위 전부터 여색을 극도로 밝혔는데, 나이가 들고서도 거듭된 폭식과 폭음으로 건강이 망가진 다음에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조카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은 에드워드 4세의 유언장이 남동생을 섭정으로 지명해놔서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이 되었다.
하지만 왕비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이는 물론 왕의 죽음조차(!) 리처드에게 알리지 않고 자기 남동생인 리버스 백작 앤서니에게 무장한 군사 2천 명을 주어 왕세자를 런던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알려지지 않은 경로로 이 소식을 접한 리처드는 버킹엄 공작을 비롯한 신사 6백 명과 함께 약간의 호위병력만 대동하고 내려갔는데, 런던 근교에서 무장한 앤서니의 군대와 마주쳤다.
이때 군사적 교전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리처드는 앤서니는 물론 그 동료 토머스 본, 엘리자베스가 전 결혼에서 낳은 아들 리처드 그레이를 체포하여 며칠 후 처형했다. 에드워드 왕세자와 함께 런던으로 들어간 뒤에 리처드는 섭정(호국경)이 되어 조카의 대관식을 준비했지만, 얼마 뒤 상황이 달라졌다. 어느 정도 소문이 퍼지고 난뒤 에드워드 5세와 그 남동생 요크 공작을 신변 보호를 무기로 런던탑에서 보호(?)하겠다며 본색을 드러냈고, 곧 사생아설을 정당화 하며 자신이 적법한 에드워드 4세의 계승자로 선언하고 왕위에 올랐다.
에드워드 4세가 네빌 일가를 견제하기 위해 우드빌가 형제들을 중용했고, 이들은 악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우드빌을 내쫓는건 큰 무리가 없었다. 앞서 에드워드 4세는 우드빌의 재산과 미모에 반해(?) 덜컥 결혼했고, 수많은 애첩들을 후렸는데, 호색한 에드워드 4세에게 잘 보이고자 자신의 아내나 딸들을 상납(?) 하는 경우도 잦았다. 특히나 우드빌 가문은 왕비의 빽을 믿고 많이 해쳐먹었고, 에드워드 4세는 런던시티의 상인들에게 독점권과 이권을 퍼주는 대가로 미녀들을 상납받아 후리고 다녔기에 악평을 들었다. 에드워드 4세와 우드빌의 결혼때 추밀원에서도 왕비의 혈통이 낮음을 근거로 우려를 표명하고 영국 주교단도 낮은 혈통에 대한 우려는 표명했지만 국왕의 바람이었기 때문에 적법 결혼이라 승인했고 에드워드 5세가 12살까지 아무 말이 없다가 에드워드 4세가 죽고 나서 사생아 타령을 하는 거 보면 어찌됐거나 정치적 이유라는 게 설득력이 있다.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인 리처드는 에드워드 4세의 음탕한 사생활에 대해 이야기꾼을 고용하여 6명의 사생아를 둔 것을 런던 도처에 선전했고 윤리와 도덕을 드높이고자(?) 에드워드 4세의 애첩과 애첩을 상납한 남편을 처형했고, 에드워드 5세가 사생아일지도 모른다는 썰을 열심히 퍼뜨렸다. 실제로 에드워드 4세는 6명의 사생아를 두기도 했기에 사생아설은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우선 사전 작업으로 에드워드 4세의 충신이었던 헤이스팅스경을 마법(?)으로 우드빌 왕대비와 자신을 저주했다는 구실로 체포하고 재판없이 반역죄로 참수했다. 우드빌 가문은 몇몇은 해외로 도망갔는데다가 악평이 높았기 때문에 쉽게 무너졌다. 6월 22일 세인트 폴 대성당 밖에서 자신의 고해신부 샤 박사(Dr. Sha)가 에드워드의 자녀들이 사생아이며 그가 적법한 왕이라는 내용의 설교를 했다. 런던 시민들은 리처드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고, 6월 26일 그는 받아들여 7월 6일 왕위에 올랐다. 이 조치의 근거는 바스와 웰즈의 주교 로버트 스틸링턴(Robert Stillington)의 증언 때문인데, 스틸링턴은 리처드에게 나아가 '에드워드 4세는 전에 엘리너 버틀러(탤벗) 부인과 결혼했고 나는 그 결혼의 주례를 섰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엘리자베스의 미모에 반해 엘리너 부인을 버리고 그녀와 결혼했다.'고 말했다. 비록 스틸링턴의 증언 당시에는 에드워드 4세와 엘리너 버틀러 모두가 죽었기에[6] 증언의 사실 여부는 검증되지 못했다.
리처드 3세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폐위된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작 리처드 형제를 런던탑에 두었다. 물론 나중에 찰스 2세때 런던탑 계단를 보수하다가 상자를 발견했는데 안에는 유골들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유골들의 사망 연대가 언제인지도 불분명하거니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어,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 유골들을 꺼내 정밀 검사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다만 2017년 1월 현재까지도 영국 국교회와 영국왕실의 수장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망자의 안식을 방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유골의 발굴과 정밀 검사를 허락하지 않았다.[7] 그런데 일부 역사가들의 주장이나 문제제기와 달리 리처드 3세가 에드워드 4세의 두 아들 에드워드 5세와 요크공을 죽인 건 거의 확실하다. 에드워드 5세 항목 영문 위키디아의 주석근거< Horrox, Rosemary. "Edward V of England". Oxford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Oxford University Press. Retrieved 25 August 2013>,는 물론이고 국내 발간된 서적 중에서도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앙드레 모르네의 영국사, 서울대 라종일 교수의 <영국의 역사>, 역시 서울대 박지향 교수의 <영국사>에서도 일부 학자들의 다른 주장도 있지만 리처드 3세가 두 조카를 죽였음이 확실하거나 그렇게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한다.
에드워드 4세도 헨리 6세 부자를 런던탑에 감금한 뒤 죽였지만, 에드워드 4세가 발표한 공식사인은 '극심한 우울증의 고통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당시 랭커스터 지지자들은 왕에 걸맞지 않은 대우를 받다가 구타당해 죽었다고 주장했고, 현재에도 헨리 6세는 에드워드 4세가 죽였다고들 보며 별다른 부정설도 없다. 리처드 3세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매우 부정적 인물로 묘사되었음에 반발로 500년이나 지난 사건을 현대 형사법상 증거 타령 운운하며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두 조카를 죽였음은 정황상 거의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리처드 3세는 에드워드 4세의 혈육 에드워드 5세-요크공 리처드만이 아니라 플랜태저넷 혈통 남계 후손 10명 중 8명을 죽였는데 5명은 미성년이었다.
1483년 10월 한때 리처드의 지지자였던 버킹엄 공작이 에드워드 5세 형제 살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진압되고 버킹엄은 참수했으나 민심 안정이 필요해졌다.
1484년 1월 23일, 리처드는 재위 기간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의회를 열어 27일 동안 사법 18개조, 공법 15개조를 통과시켰다. 18가지 사법들은 전년 10월 반란을 일으킨 버킹엄 공작 일당을 단죄하고 존 하워드를 노퍽공작으로 승진시키고 북부 지역의 유력 귀족인 스탠리 가문에 토지와 벼슬을 퍼주면서 왕권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특히 마지막 목적에서 만들어진 <Titulus Regius(왕의 권리)> 라는 문서는 상술한 에드워드 4세의 혼인 문제를 근거로 리처드 3세의 계승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정리했다. 이후 헨리 7세는 이 문서의 원본을 포함한 모든 사본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8], 크로일랜드 수도원에 한 부가 살아남아 현존한다. 15가지 공법들은 덕세를 폐지하는 등 사법 체계를 개혁하고 잉글랜드 상인과 소비자를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는 전반적으로 힘없는 평민들에게 유리한 개혁이었기에 프랜시스 베이컨 경을 포함한 후대 학자들에게 호평받는다. 아래는 15가지 공법의 구체적인 내용.
1조 - "이제부터 모든 토지 양도, 토지 선물과 그와 같은 행동들은 판매자와 그 자손이 아니라 구매자에게 유리한 조건이어야 한다."
2조 - "이 왕국의 백성들은 어떠한 덕세도 부담하지 않는다."
3조 - "모든 치안 판사는 죄수에게 조건부 석방 영장을 발부할 수 있다. 죄수가 사권을 박탈당할 때까지 어떤 공무원도 그의 재산을 빼앗을 수 없다."
4조 - "신용과 토지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주 장관의 순회 때에 배심원을 선정해야 한다."
5조 - "1조는 오랫동안 내려오던 규정을 바꾼 것이 아니며, 왕은 영지 수령권을 유용할 수 없다."
6조 - "모든 파이가루 법정에서 원고 혹은 그의 변호사는 반드시 선서해야만 한다."
7조 - "개인은 민사법원의 재판관들 앞에서 부과된 재산 양도 민사소송(fine)과 그 선언서를 이행할 의무가 있다."
8조 - "브로드[9]는 팔리기 전에 반드시 완전히 세탁되어야 하고 길이는 24야드, 너비는 2야드여야 한다. 직물 거래에 어떤 부정직한 일도 있어서는 안 되고, 하얀 직물에는 분필로 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
9조 - "이탈리아 상인들이 상품을 파는 방식에 어느 정도의 외국인 규제가 필요하다."
10조 - "비단 레이스, 리본, 가위, 방울, 못 따위의 수입을 금지한다."
11조 - "이탈리아 상인들은 포도주 1통당 10개의 좋은 활을 만들 막대를 가져와야 한다."
12조 - "이 왕국에 특정한 상품들을 들여오는 걸 금지한 이유는 그것들이 초래할 결과 때문이다."
13조 - "포도주와 기름은 양을 재기 전에는 용기에 담아 판매할 수 없다."
14조 - "성직자의 십일조(dismes)를 걷는 회계사는 재무부에서 진행되는 다른 사람의 소송에 증인으로 불려나오지 않는다."
15조 - "전임 잉글랜드 왕비 엘리자베스 그레이에게 국가에서 내려준 모든 것과 영지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이중 4조는 악용의 가능성이 많았고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개인의 돈이 많을수록 지닌 미덕도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작정 욕할 것이 아니라 의도는 좋았던 사례로 보아야 옳음 직하다.
그러나 이전 랭커스터 왕들이 부족한 정통성을 의회의 도움으로 통치하려던것과 달리 요크 가문 왕들은 의회를 무시하고 상속권으로만 통치하려 했던게 실책으로 보인다. 뒤늦은 조치와 달리 요크 가문의 통치는 의회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리처드 3세가 급속하게 민심을 잃고 몰락한 것도 이것과 영향이 있다. 물론 이 시절 의회는 지금과 달리 상하원을 막론하고 귀족과 젠트리들이 좌우했다.
그런데 리처드에게 큰 타격을 준 사건은, 1484년 후계자인 외아들의 죽음이었다. 리처드는 두 조카를 죽이고 나서도 뻔뻔했다. 리처드 3세의 유일한 적자 에드워드가 죽고나자 후계자가 없었고 일단 자신의 누이의 아들인 외조카 존 드 라 폴을 추정상속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왕비 안네 네빌이 아이를 못 낳자 '왕비가 2월까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며 소원을 빌고 다녔는데 왕비는 4월에 기적적(?)으로 사망했다. 에드워드 5세를 폐위할 때까진 그나마 괜찮았지만, 유일한 적자가 죽은 데다가 두 조카를 죽인 뒤에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리처드는 30살 넘고 후계자도 없는 데다가 장애인이었고, 조카들까지 쳐죽였기 때문에 후계자도 없어졌으므로 왕권의 지지기반이 흔들렸다. 요크 가문 지지자들은 두 조카를 죽인 것에 반발했고, 리처드도 민심을 수습하고자 사생아라고 격하한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녀 요크의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했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문제는 리처드와 에드워드 4세는 이복형제도 아닌 친형제고 엘리자베스는 친조카라는 점이다. 당연히 신하들과 성직자들은 '사촌이면 몰라도 친삼촌-조카는 개족보'라며 극렬반대했다. 리처드는 치욕스럽게도 스스로 이런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며 공개 해명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이 당시 엘리자베스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두 동생을 죽인 익명(?)의 범인은 극렬 저주하면서, 리처드를 열렬히 사랑한다고 공개 응수했는데 두 사람이 결혼설이 퍼지자 비밀리에 우드빌 왕비와 동맹을 맺었던 헨리 튜더가 급히 프랑스의 지원과 랭커스터 지지자와 요크 지지자들 중 리처드에 등돌린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상륙하자 전투에 나섰다.

1.4.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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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5년 헨리 7세는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2천 병력을 끌고 웨일스의 밀포드 헤이븐에 상륙했다. 튜더 가문은 웨일스 출신이었기 때문에 웨일스는 헨리 튜더를 전폭 지지하여 헨리의 군대에 합류했고, 리처드 3세도 진압군을 모아 진압에 나섰다. 3주 후 잉글랜드 중부 레스터 지방 보스워스에서 양군이 맞붙었다. 양측의 병력을 살펴보면 튜더가문의 병력이 많아야 5천을 넘지 않았고, 리처드의 병력도 많아야 1만 2천, 보통 1만 선으로 보는데 에드워드 4세가 1461년 타운턴 전투에서 3만 5천 병력을 이끌고 5만 병력의 랭커스터군을 격파하며 왕위를 얻었다는 점과 비교해 보자. 이때 리처드가 소집한 귀족들의 5명 중 4명이 소집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이미 권력 기반이 심각하게 흔들렸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잉글랜드 북부 스탠리가 변수였는데 스탠리가의 지지를 얻으려고 토지와 직위를 퍼주었어도 스탠리가는 헨리 튜더의 모친 마가릿 보퍼트와 결혼하여[10]으로 결합하여 언제든지 리처드에게 뒷통수 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리처드는 군대를 이끈 지휘경험이 있고 무예도 할줄아는 전사였지만, 헨리는 4살 연하였으나 도망다니던 신세였기에 군대 지휘 경력은 전혀 없어서 후방에서 대기했고 그의 삼촌이 실제로 지휘했다고 한다. 전투가 시작될 당시만 해도 리처드 3세의 군대는 언덕 위를 점하고 있었던 데다 머릿수도 헨리의 군대의 2배였다. 리처드는 노련한 장군 노퍽 공작이 맡고 있던 그의 오른쪽 날개를 먼저 출격시켜 언덕 아래 있던 헨리의 군대를 치도록 했다.
하지만 상대편 지휘를 맡고 있던 역시 노련한 장군 옥스퍼드 백작의 책략에 빠져, 노퍽 공작 존 하워드는 전사했고 먼저 출격한 오른쪽 날개는 진창에서 백병전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에 리처드는 왼쪽 날개를 맡고 있던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에게 노퍽 공작을 도우라고 명령했다.[11] 하지만 그는 명령에 불복종함으로서 사실상 배신했고, 어떤 사료에서는 심지어 헨리 7세에게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고까지 한다.[12]
게다가 소집병력들까지 전세가 불리해지자 전투에 매우 소극적이었기에 대놓고 이기는편 우리편이라며 관망분위기를 보이자 리처드 3세는 측근들의 후퇴 요구를 거부하고 왕인 자신이 직접 전투에 앞장 섰다. 특히 후방에 있던 헨리 7세는 전황을 지켜보기 위해 전선에 가까이 오기 시작했고 그의 깃발이 가까운 곳에 휘날리는 것을 보고 리처드 3세는 기사들만 최소 1백 명을 불러모아 함께 언덕 아래로 남자의 로망인 승부를 건 기병 돌격을 시도했다. 이 기병 돌격에서 리처드 3세는 랜스로 헨리 7세의 기수 윌리엄 브랜든을 찔러 죽이고 헨리 7세의 호위 기사들과 싸웠다. 예상 못한 돌격에 헨리 7세는 당황하여 호위 기사들이 교전을 벌이는 틈을 타 피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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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헨리 튜더의 친위 병력에 더해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스탠리 가문이[13] 개입했고, 결국 리처드는 몸소 앞에서 지휘하며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에게 적대적인 튜더 왕조의 사가들조차 '리처드 3세가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는 데에는 견해를 같이한다. 언덕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국왕군 병사들은 왕이 전사하자 겁에 질려 도망쳤고, 헨리의 군대는 그들을 추격하여 닥치는 대로 죽였다.
전투가 끝난 뒤 의붓아버지 스탠리가 리처드 3세의 왕관을 발견하고 헨리 튜더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튜더 왕조가 시작되었다. 정통성이 약했던 헨리 7세 이후 튜더 왕조에서는 리처드 3세를 찬탈자, 조카 살해자, 같은 음흉한 이미지로 퇴색했고 엘리자베스 시대 셰익스피어의 희곡으로 이런 이미지가 굳어졌다. 그러나 현대에 와선 유능한 행정가고 전투에선 용감한 사람이었고 즉위 전에도 잉글랜드 북부를 그럭저럭 잘 통치했다는 평을 받는다. 왕이 되고 나서 치세 2년으로 평가하기엔 좀 짦은 시간이다.
헨리 7세는 이미 규합한 요크 지지자들을 회유하고자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해서 정통성을 강화했다. 1499년 헨리 7세는 요크 왕가의 유일한 남계 후손이자 에드워드 4세의 동생 클라렌스 공작의 아들이었던 워릭 백작 에드워드를 처형하면서 요크 왕가는 단절되었다. 이미 리처드 3세의 외아들 미들헴의 에드워드는 1484년 11세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
헨리 7세의 어머니 마가렛은 에드워드 3세의 4남이며 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증손녀로 사실 헨리 7세는 왕가에서 매우 멀었다.[14] 다만 요크 가문이 찬탈하고서 헨리 6세와 그 왕세자는 살해당했고, 랭커스터 가문은 완전히 멸족했기 때문에 랭커스터 가문 지지자들은 헨리 6세의 이부동생 에드먼드 튜더의 아들이자 모계로 랭커스터 시조인 곤트의 존의 혈통을 물려받은 헨리 튜더를 랭커스터 가문의 후계자로 밀었다.
헨리 7세는 리처드 3세를 교훈 삼아 리처드가 적장자 에드워드가 사망하고 당분간 추정상속자로 남겨 놓은 존 드 라 폴과 리처드 3세의 조카 워릭 백작을 살려두었다. 11세의 워릭 백작은 런던탑에서 성년까지 살아남았으나 성년이 되어 간수들을 매수하고 탈옥하려다 적발되어 처형되었으며 존 드 라 폴은 1487년 반란군을 이끌고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헨리 7세가 반란으로 찬탈했다한들 어설프게나마 절멸한 랭커스터 혈족이고, 요크가의 에드워드 4세의 맏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정통성 시비는 있어도 에드워드 4세 시절 왕권의 위협이 된 헨리 6세와 그의 적장자 웨스터민스터의 에드워드와 같은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왕족은 거의 남지 않았다.
존 드 라 폴은 에드워드 4세와 리처드 3세의 누이의 아들일 뿐 왕족은 아니었고,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이며 리처드 3세의 형인 클라랜스 공작은 에드워드 4세에게 반역 혐의로 죽었기에 클라랜스 공작의 아들인 워릭 백작은 왕위 계승권 자체가 없었다. 설령 계승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1485년 런던탑에 투옥될 당시 겨우 11살로 너무 어린 나이였고, 이후 죽을 때까지 감옥 밖으로 나가지 못했기에 정신병까지 있어 왕위를 계승할 상태가 아니었다. 헨리 7세시절 반란은 가짜 워릭 백작이나 가짜 요크공들을 참칭한 야심가들이 판을 쳤지만 아주 큰 위협이 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존 드 라 폴은 헨리 7세가 석방해줬음에도 보스워스 전투가 끝나고 2년 뒤인 1487년, 퍼킨 워벡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스토크 평원 전투에서 전사했다. 1499년에는 가짜 워릭 백작을 주장한 반란들도 거의 분쇄되고 왕권이 안정되었다. 가짜 워릭 백작을 사로잡은 헨리 7세는 그가 가짜임을 입증하려고 런던탑에 갇힌 진짜 워릭 백작을 꺼내서 인증도 시켜줬으며, 가짜는 죽이지 않고 궁정에서 부엌데기로 삼아 부렸다. 진짜 워릭 백작은 헨리 7세의 왕권이 안정권에 들자 꼬투리를 잡아서 22세였던 그를 런던탑에서 꺼내 참수형에 처했다.
이 일은 역시 리처드 3세 처럼 당대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대표적으로 헨리 7세의 며느리 아라곤의 캐서린은 자신이 그토록 많은 유산과 사산을 거듭한 이유가 시아버지가 죄 없는 워릭 백작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워릭 백작의 죽음으로 요크 가문 남계혈통은 완전히 끊겼고 에드워드 4세의 외손인 아서와 헨리 8세가 태어남으로써 헨리 7세 이후 튜더가의 왕권은 강력해졌다.
그 당시로 치면 권력간의 다툼은 아버지-아들 남편-아내 끼리도 서로 죽였기에 조카들을 죽인건 크게 튀는 악행은 아니었으나, 장미 전쟁 이후 등장한 튜더 왕가가 등극하면서 정통성을 위해 깎아내려 흑역사가 되었다. 2의 작품에서 검은 머리의 꼽추이자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악인으로 묘사되면서 현재까지 폭군의 이미지로 남아있었다.

1.5. 유골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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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색은 상단 이미지처럼 좀 더 밝은 갈색일 가능성이 꽤 높다.[15]
2012년 9월 영국의 레스터 시 시의회 주차장[16] 지하의 옛 교회터에서 리처드 3세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되었다. 오랜 연구와 검사를 거쳐 2013년 2월 DNA 검사[17]를 통해 리처드 3세의 유골임을 발표했다. 왼쪽 어깨 부분이 불룩 튀어나온 초상화[18]와 당대부터 지금까지 알려진 꼽추왕이라는 별명을 증명하듯이 리처드 3세의 유골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심각한 척추측만증을 앓았음이 확인되었다.
한편 리처드 3세가 최후를 맞이한 보즈워스 전투에서 그를 전사로 몰고 간 가장 큰 원인으로 낙마가 꼽혔다. 리처드 3세는 심한 척추측만증을 앓았지만 실험결과 척추층만증 환자도 플레이트 아머로 완전무장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중세의 안장이 오히려 현대의 안장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자연스럽게 승마할 수 있음이 밝혀졌고, 실제로 기사들을 이끌고 기병돌격을 했을 때에 리처드 3세가 직접 적을 수 명 베어 넘겼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말에서 하마해서 백병전을 치르면 척추측만증 때문에 지구력 저하[19]가 나타나는데, 이 때문에 리처드 3세가 금방 적들에게 둘러싸여 전사했을 거라는 것이다. 또한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는 투구 위에 왕관을 쓰고 다녔기 때문에[20], 기사들이 말을 타고 왕관을 쓴 왕을 자신들의 시야 안에 넣고 보호하기 더욱 쉬웠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21] 즉 그가 어떠한 이유에서든 낙마한 순간 그의 죽음은 예정되었다는 것. 자세한 내용은 그의 죽음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참조.
유골의 상태는 리처드 3세가 맞은 참혹한 죽음을 잘 보여주는데, 리처드 3세가 머리 쪽을 단검으로 강하게 찔리고 핼버드(미늘창)에 머리 뒷부분이 잘려나가 죽었다고 설명하는 사료와 거의 일치한다. 등에서 발견된 화살촉은 검사 결과 화살촉이 아닌 로마 제국 시대 이라, 리처드 3세와는 관계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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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DNA 분석 결과 리처드 3세는 부계쪽으로 요크 가의 핏줄을 이어받지 않았다고 한다. 누이들과는 DNA가 99.9% 일치했다고 하니 누이들도 마찬가지라고 봐야 하고, 형 에드워드 4세도 당대부터 요크 공작 리처드의 친자가 아니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기사 그런데 이 기사가 해석을 잘못한 것일 수도 있는데, 아래 웹툰에서도 나오듯이 검사결과가 알려주는 것은 현재 요크 왕가의 부계 후손이라고 알려진 이들이 리처드 3세와 부계 혈통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현재 요크 가문의 부계 혈통을 이었다는 이들이 진짜로 요크 가문의 혈통인지 증명할 과학적 근거가 전무하기 때문에 요크 가문의 진짜 부계혈통을 이은 사람이 리차드 3세인지, 아니면 현재 살아있는, 요크가의 부계혈통을 이었다고 알려진 이들 중 하나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정통성 언급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리처드 3세의 유골을 매장할 장소로 발견된 장소인 레스터와 가문의 출신지인 요크 사이에 법적 분쟁이 있었으나 레스터가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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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26일, 영국 왕실의 주도하에 사후 530년 만에 국장으로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기사 40억원 가량 소요된 장례식 비용 대부분은 레스터 시가 부담했다. 레스터가 리처드 3세로 벌어들이기 시작한 관광수익이 천문학적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왕의 예우를 갖춘 장례식을 통해 리처드 3세의 유해는 레스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며느리인 웨식스 백작부인 소피와 여왕의 사촌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여왕을 대신해 장례식에 참석했고, 리처드 3세의 후손인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영국 계관시인 캐롤 앤 더피의 시 '리처드'를 낭독했으며, 리처드 3세의 관은 연구에 도움을 준 후손인 캐나다의 가구제작자 마이클 입센이 오크 나무로 제작했다.
유골발견과 관련된 웹툰 1편 / 2편
그리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장례식이 끝나기 무섭게 이 지역의 축구팀은 왕의 은총을 받았는지, 유례없는 대기록을 세우는데...

1.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BBC에서 80년대 초에 방영한 로완 앳킨슨 주연의 역사 시트콤 블랙애더 시즌 1에서는 첫편부터 자신을 말도둑으로 오해한 애드문드의 칼에 맞아 목이 마미 잘려나간다(...).[22] 이후 유령이 되어 애드문드의 앞에 나타나 맨붕시키고 욕설을 퍼붓는다.
  • 조세핀 테이(Josephine Tey, 1896.7.25 - 1952.2.13)의 추리소설 《시간의 딸(The Daughter of Time)》[23]에서 중요한 소재로 다뤄진다. 이 소설은 수사 도중 맨홀에 빠지는 바람에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된 주인공 그랜트 형사가 병실에 걸린 리처드 3세의 초상화를 본 것을 계기로 런던탑에 갇혀 있던 에드워드 4세의 아들들(에드워드 5세 등)을 살해한 자가 그때까지 알려진 대로 리처드 3세인지 병실 안에서 지인의 도움을 받아 추리하는 내용의 소설이다.
  • 2013년부터 영국 BBC에서 셰익스피어 희곡들을 원작으로 방영하는 연작 시대극 <할로우 크라운>[24]의 후속작 장미전쟁 편에서 셜록(드라마)에서 셜록 홈즈로 출연했던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이 리처드 3세 역을 맡았다. 리처드 3세의 유골이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방영되는 것이라 어떻게 묘사될지 주목받았다. 덧붙여 셜록에서 짐 모리어티로 출연한 앤드류 스콧이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 역으로 출연했다.

2. 셰익스피어의 희곡


셰익스피어 연극 중 가장 많이 상영되는 작품.
리처드 3세의 재위부터 그의 형인 에드워드 4세에 대한 질투, 조카 에드워드 5세를 죽이고 냉혹하게 권력을 추구했지만 결국 몰락하고 죽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주인공이 악인에 가깝다는 점과 권력을 추구한 끝에 몰락하는 것 등을 보아 맥베스와 비슷하다.
리처드 3세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기형이고, 미완성이고, 반도 만들어지지 않은채

너무 일찍이 이 생동하는 세계로 보내져

쩔뚝거리고 추한 나의 모습에

곁에만 지나가면 개들도 짖는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날을 즐기는

사랑하는 자가 될 수 없기에

나는 악인이 되기로 굳게 마음먹는다." -1막 1장.

And therefore, since I cannot prove a lover

To entertain these fair well-spoken days,

I am determined to prove a villain

And hate the idle pleasures of these days.

사실 원문 자체는 굉장히 길지만 중요한 것은 끝의 네 문장이므로 그 부분만 적는다. "악인이 되기로 굳게 마음먹는다.(I am determined to prove a villain.)" 하는 문장 자체가 알게 모르게 굉장히 많이 쓰인다.
그리고 또 자주 쓰이는 표현은 다음이다.

A horse, A horse, My Kingdom for a horse.

말을 다오, 말을 다오. 말을 가져오면 내 왕국을 주리라.

리처드 3세의 군대가 와해될 때 급한데 정작 탈 말이 없자 말을 가져오는 이에게 온 나라라도 주겠다고 하는 대목이다. 앞뒤 잘라먹고 말하면 도망치려는 것으로 보이지만 '말 한 필만 있다면 전장을 휘저어 승리로 이끌어 왕국 정도는 다시 세울수 있다.'는 리처드 3세의 용맹함을 살린 대사이다. 실제로 리처드 3세는 전장에서 많이 싸워본 무투파라는 점을 반영한 호전성과 야망을 담은 대사.[25] 영국에서는 '배보다 배꼽이 크다'나 이른바 멘붕과 유사한 의미로 쓰이는 듯하다. 문명5에서 horse riding기술을 개발하면 이 문장이 나온다. 미디블2: 토탈 워에서도 전투 대기 시 로딩 화면에 자주 뜬다.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서 이안 맥켈런 주연의 작품은 아래쪽 항목을 참조 바람. 그 외에 알 파치노가 연극을 준비하는 배우들과 연극 내용을 교차하는 구성으로 감독/주연한 '리처드를 찾아서'[26]라는 영화도 숨겨진 걸작이다.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 "I must be held a rancorous enemy"라는 대사가 처칠체임벌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을 때의 시가전 깡패 깽판장에서 나온다. 대략 '내가 벌집을 건드렸어.' 정도로 의역될 수 있을듯.
2018년 황정민[27]이 주연을 맡은 공연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3. 1995년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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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개요


2의 항목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서, 간달프매그니토로 유명해진 이안 맥켈런이 리차드 3세를 맡은 영화다.
한국내에는 우일을 통해 비디오로만 출시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보기가 힘들고, 그나마 출시된 영화도 자막이 원래 희곡의 맛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해서 아쉬운 편이다.

3.2. 특징


이 항목을 따로 작성하는 이유는 영화가 희곡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닌 1930년대로 배경을 바꿔 파시즘과 결합시킨 영화이기 때문. 그래서 영화에는 20세기의 문화와 무기[28]들이 등장한다. 사실 이건 의도적인 설정에 가깝다. 원작을 재해석한 사례 중에는 리처드 3세를 파시즘의 등장과 몰락으로 해석하는 예가 있고, 이를 주제로 한 것이 이 영화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후에 나온 같은 원작자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타이투스코리올라누스[30]의 선구자격인 영화라 할 수 있다.

3.3. 자잘한 얘기들


  • 이 기획의 최초 창안자는 이안 맥켈런 본인. 원래 TV용으로 기획했으나 시나리오를 써가면서 이야기가 꽤 커졌고, 직접 투자를 유치하게 되었다
  • 이안 맥켈런은 공연 투어를 다니는 중간에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직접 썼다. 말만 들으면 쉬울 것 같지만 무대에서 에너지를 쏟아내면서 그 중간에 뭔가 다른 일을 한다는 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인간이 아니신 건가…. 게다가 저 2개의 일을 하는 그 와중에 여러 배우들에게 이 영화에 출연해달라고 요청까지 하고 있었다.
  • 이 영화에서 리처드 3세와 그 일파들이 입고 나오는 군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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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히틀러 친위대 SS의 군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리처드의 군기도 나치 독일 깃발의 하켄크로이츠 자리에 멧돼지 머리 문장[31]이 들어간 것.
  • 이안 맥켈런은 자신이 조연으로 출연했던 영화 레스터레이션[32]의 주연이었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에게 거절당할 것을 각오하고서 작은 역할[33]을 하나 해줄 수 있냐고 제안했다. 아무리 당시에 사고를 치고 다녔어도 다우니 주니어는 꽤 유명한 스타였고, 바로 앞에 찍은 영화에선 주연을 맡았다. 그런 스타에게 대사는 3줄에 3분 출연하는 역할을 해달라고 한 거다. 그나마 2분은 배경에 있거나 주인공 옆에 서 있기만 한다…. -_-;;; 놀랍게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역할을 받아들이고 출연했다. 현대로 보자면 카메오에 가깝다. 그러므로 위에 올린 포스터는 사기에 가깝다.
  •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이 법적으로 무효인 이유를, 이 영화에서는 '우드빌이 미국인이기 때문'으로 설정했다.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한 사례를 참조한 것.
  • 비슷한 기획의 영화로 맥베스의 2010년판이 있다. 주연배우도 엑스맨에서 이안 맥켈런의 상대역으로 나왔던 패트릭 스튜어트이다. 여기서는 맥베스의 배경이 중세의 스코틀랜드에서 20세기 초의 소련으로 바뀌었다.

[1] 이 대사가 있는 짤방으로 유명한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실제 리처드 3세의 후손이다.[2] 또한 실제로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BBC의 사극 The Hollow Crown에서 리처드 3세의 배역를 맡아 연기하기도 했다.[3] 크롬웰이 호국경으로 번역되어서 호국경으로 쓰는 경우가 있는데 원래는 왕비왕세자 같은 직계 왕족이 아닌 섭정을 로드 프로텍터라고 한다. 직계 왕족의 경우 Regent라고 한다. 1811년에서 1820년 당시 프린스 오브 웨일스 조지 4세가 정신병이 발작한 조지 3세 섭정을 할 시기는 Regency(섭정시대)라 하기도 한다.[4] 완전 평민은 아니고 우드빌 가문은 기사계급이고, 외가는 신성로마제국 백작이 우드빌 왕비의 어머니의 미모에 반해 귀천상혼한 가문으로 완전 농부나 하층민 집안은 아니다.[5] 헨리 4세가 예전에 썼던 그 레퍼토리[6] 엘리너는 에드워드가 엘리자베스와 결혼한 얼마 뒤에 수녀원에 들어갔고, 얼마 안 있어 그곳에서 죽었다[7] 1900년에 영국에 유학온 일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가 자신의 런던탑 관광기를 단편소설화한 런던탑에서 두 왕자 형제가 갇혀있는 모습을 상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8] 헨리 7세는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했으므로, 만약 엘리자베스가 사생아라면 헨리 7세의 왕위 계승권도 큰 타격을 입는다[9] 폭이 넓은 셔츠드레스의 옷감[10] 법률상만 결혼이고 실제 부부 생활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가릿 보퍼트는 벌써 4번째 결혼[11] 이떄 헨리 퍼시는 4천명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다.[12] 다만 현대 대부분 학자들은 명령 불복종설을 지지한다.[13] 이 중 형인 토머스는 헨리 7세의 양아버지[14] 요크 가문의 시조는 에드워드 3세의 5남 랭글리의 에드먼드가 시조이고 랭커스터 가문의 시조는 에드워드 3세의 4남 곤트의 존이 시조이다. 가문 구별을 위해 랭커스터니 요크니 할 뿐이지 정작 두 세력은 자신들이 진정한 플랜태저넷이라고 주장했다.[15] DNA 조사 결과 리처드 3세는 어렸을 때 금발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금발을 유지했거나, 혹은 흔히 '더티 블론드'라고 부르는 밝은 갈색으로 변했을 것이라고 한다.관련웹툰 [16] 리처드 3세가 살았던 당시 수도원이 있었으나 헨리 8세가 해체했다. 수도원이 해체될 당시 리처드 3세의 유골을 강에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졌지만, 해당 전설과 달리 리처드 3세의 유해는 수도원 자리에 그대로 묻혀있었다.[17] 캐나다에 사는 가구 제작자 마이클 입센의 DNA로 그는 리처드 3세의 누이인 앤의 후손이다. 이는 모계쪽 후손을 미토콘드리아 분석을 통해서 찾은 것으로, 부계 쪽 후손이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의 상당수는 DNA가 일치하지 않았다.[18] 몸이 왼쪽으로 기울면서 생긴 현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연회에서 돋보이는 존재였다는 기술과 전쟁에 나섰다는 사실을 보면 일상생활에 큰 문제가 없었으리라 추정된다.[19] 척추가 크게 휘었기 때문에 갈비뼈의 모양도 기형이다. 즉 숨이 차서 숨을 크게 내쉴 때 폐가 정상인만큼 부풀어 오르지 못해서 산소의 공급이 상당히 제한된다.[20] 리처드 3세뿐만 아니라 중세 유럽의 군주들이 무장을 했을 때 진중에서 군주임을 알리기 위하여 흔히 이렇게 하고 다녔다.[21] 당시 영국 기사들이 착용한 고딕 양식 플레이트 아머는 시야가 매우 크게 제한된다.[22] 골 때리게도 목이 잘려 나갔을 때가 리처드 3세가 실제로 최후를 맞은 보즈워스 평원 전투이다. 즉 블랙애더에선 리처드 3세의 정확한 사망 원인을 팀킬(...)로 가정하는 것이다.[23] 요네자와 호노부의 추리소설 빙과의 부제가 The Niece of Time(시간의 조카딸)인데, 이 소설 제목을 패러디한 것이다.[24] 리처드 2세, 헨리 4세, 헨리 5세를 주인공으로 한 편들이 방영된 상태다. 덧붙여 헨리 4세로 제레미 아이언스가 출연했다.[25] 저 대사의 다음에 퇴각을 권고하는 개츠비에게 'I have set my life upon a cast, And I will stand the hazard of the die'라 말하며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을 내보인다.[26] 국내 개봉 제목은 '뉴욕 광시곡'. 이게 웬 해괴한 제목이냐.[27] 본래 연극 무대 출신이었던 데다 연기력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고, 게다가 무대를 떠나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비중이 많은데 모든 공연을 원캐스트로 진행했다.[28] T-34, T-55 전차, 프로펠러 전투기, MP40 기관단총 등[29] 족장이 제라드 버틀러다. 흠좀무.[30] 배우인 레이프 파인스가 직접 감독 및 주연을 맡은 영화로 2011년작. 고대 로마 공화국의 장군인 코리올라누스에 대한 영화로 배경을 21세기 현대로 바꾸어 놓았다. 그래서 현대 미군의 장비를 갖춘 로마군이 AK 소총으로 무장한 볼스키 족[29]과 교전을 벌이는 장면까지 나온다.[31] 1의 항목의 리처드 3세의 문장[32] 맥 라이언, 샘 닐, 휴 그랜트 등이 출연하는 미국/영국 합작 시대극. 개봉 당시의 평가는 좀 미지근했고, 흥행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국내에는 2001년이 되어서야 비디오로만 들어왔다.[33] 에드워드 4세의 왕비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오빠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