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 협정 (r2019031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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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앞줄 왼쪽부터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 프랑스 제3공화국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
나치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 이탈리아 왕국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무솔리니의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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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 뭐? 내 의자는 없다고?[1]

영국 총리가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Peace for our time)라고 믿습니다.[2]

- 네빌 체임벌린

우리들은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패배를 보았다.[3]

- 윈스턴 처칠

영국과 프랑스는 불명예전쟁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그들은 불명예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을 겪을 것이다.[4]

[5]

- 윈스턴 처칠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1938년 9월 이전
3.2. 9월
4. 뮌헨 회담
5. 영국과 프랑스는 왜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렸을까?
6. 결과
7. 여담
9. 관련 문서


1. 개요


뮌헨 協定
영어
Munich Conference
독일어
Münchner Abkommen
프랑스어
Accords de Munich
이탈리아어
Conferenza e accordo di Monaco
체코어
Mnichovská dohoda
슬로바키아어
Mníchovská dohoda
1938년 9월 30일 독일 뮌헨에서 체결된 협정. 뮌헨 회담으로도 부르나 이는 4국 정상 간의 회담 만을 뜻하며, 그 결과물이 뮌헨 협정이다.
제2차 세계 대전부정적인 의미에서 1년 늦춘[6] 들 간의 야합으로, 일명 서구의 배신(Western Betrayal)이라고도 부른다.
어떻게 보면 제2차 세계 대전은 사실상 이 협정 때문에 근본적으로나, 결정적으로나 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2. 배경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민족자결주의베르사유 조약 사이의 모순에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 및 슬로바키아인들이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확립한 이후로[7] 역사상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최초의 독립 국가였다.[8]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민족자결주의에 의거, 체코 및 슬로바키아인들도 독립과 함께 국가를 건설하게 된 것인데 사실 이렇게만 보면 당연한 일이자 다행이었다.
그런데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나라를 독립시키자니 국경선이나 영토 문제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졸지에 다민족 국가가 되었다. 국가의 핵심인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은 천 년 동안 서로 다른 역사를 지녀 온 사실상 다른 민족[9]으로, 남슬로바키아와 루테니아 지방의 헝가리인과 톄신 지방의 폴란드인(본래는 폴란드 영토였으나 1919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삥 뜯으면서 체코 영토가 되었다), 동부 끝자락의 우크라이나인 등이 소수민족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국가 내 최대 소수민족은 바로 300만에 달하는 수데테란트[10]독일인이었다.
중앙유럽은 오랜 기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제국 내부의 행정구역상 구분만 있었지 국가 및 민족 간의 확고한 경계선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리고 연합군은 의도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를 해체하고 독일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 주변국을 좀 크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것이 다민족 국가 체코슬로바키아의 탄생이었고, 이는 베르사유 체제가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3. 전개



3.1. 1938년 9월 이전


1938년 3월,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논리로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이 국민 투표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여 양국이 하나가 되자, 게르만 민족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대두했다. 폴란드[11], 리투아니아[12],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등에 나뉘어진 게르만인들은 강력한 하나된 독일이라는 히틀러의 구호에 열광하며 독일로의 합류를 강력히 희망했다.
이 중 이탈리아쥐트티롤[13] 지방은 베니토 무솔리니가 오스트리아 병합을 묵인하는 대가로 쥐트티롤 지방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하지 말 것을 히틀러에게 요구했고, 히틀러는 이를 수용했기 때문에 독일의 병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14] 하지만 쥐트티롤을 제외한 지역들에 대해 히틀러는 실제로 병합하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우선시되는 곳은 독일인 인구가 가장 많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티(Sudety) 지방, 즉 수데테란트였다.
히틀러가 수데테란트를 노리고, 그곳의 독일인들이 소요를 일으키자 당장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 정부 간에 상호 비방이 잇달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5월 20일 예비군을 소집하고 국경 지대에 병력을 배치했다. 그리고 2개의 군사 동맹국 프랑스소련 중 훨씬 믿음직한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 문제는 양국만이 아니라 전 유럽의 주목을 받는 문제로 비화되었다. 프랑스는 로카르노 조약상 군사 동맹국으로서 유사시 참전할 의무가 있었고 이에 따라 3월 14일 프랑스 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 대사에게 조약 준수를 약속하는 한편 이후 영국의 입장을 캐물었으나, 영국은 조약 준수만을 확인할 뿐 정작 참전 문제에는 미적지근했다. 애당초 프랑스는 영국없이 단독으로 독일과 싸우는 상황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영국이 시원하게 뒤통수를 치자 불리한 입장이 되면서 이후 외교적으로 영국의 뒷꽁무니만 따라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3.2. 9월


그러다가 위기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9월 13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수데테란트의 독일인들이 집단 봉기했으나 하루 만에 진압되었다. 히틀러는 군부의 절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지시했다.[15] 프랑스는 예비군 동원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영국군 또한 일제히 비상이 걸렸다.
이미 앞서서 프랑스는 독일군이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한 발자국이라도 넘을 경우 즉각 개입할 것임을 천명한 바 있었다. 전쟁이 터졌을 때 참전하겠다는 입장은 수데테란트 위기가 터진 이래로 프랑스가 고수했던 입장이었다. 만약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를 포기할 경우 지금까지 체결되었던 프랑스와 다른 여타 중앙유럽 국가들 간의 조약들은 사실상 의미를 상실하여 휴지조각으로 전락하는데, 이 경우 프랑스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는 이들 국가들이 자연히 근접한 강대국, 즉 독일과 이탈리아에 붙을 것이며 그러면 서구는 유럽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역으로 고립당하게 된다. 따라서 프랑스로서는 참전 이외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문제는 영국의 참전 여부였는데, 그 당시 독일의 전쟁 준비가 완료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던 프랑스에게 있어서 독일과 1:1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그야말로 최악의 수였고, 여기에 이탈리아도 독일 측으로 기울어 버린 상황이라 전쟁이 발발할 시 제2전선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앞선 3월에 프랑스 정부가 영국의 입장을 확인하려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영국은 영국대로 이 사정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전통적인 육군 강국 프랑스와는 달리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육군력도 없었고 또 한창 재군비를 하는 중이었으므로 당장은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로카르노 조약상으로도 참전 의무가 있었던 것은 프랑스뿐이고 영국은 그럴 의무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참전을 안 하자니 당장 영불동맹이 붕괴하고 프랑스가 패배하여 유럽의 균형이 무너질 것이 불보듯 뻔했다. 이 난처한 상황 속에서 영국이 참전도 안하고 프랑스와의 동맹도 유지하는 길이 있었으니, 바로 히틀러가 침공을 안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을 외교적으로 잘 다독일 필요가 있었는데, 이 당시 독일이 들고 나온 구실이 바로 민족자결주의이고 수데테란트에서 실제로 폭력 소요가 발생한 것 자체도 일단은 사실이라 명분이 독일 쪽에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이유로 영국은 체코슬로바키아에 동원령을 내리지 말라고 압력을 계속 넣었으며 한편으로는 수 차례 중재를 시도했다.
위기가 고조되던 9월 15일,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전격적으로 뮌헨을 방문하여 히틀러와 회담을 가졌다. 히틀러는 독일 주민이 과반수인 지역의 할양을 요구했으며, 체임벌린은 즉답을 하지 않고 영국으로 돌아가 9월 18일 프랑스의 양해를 구한 뒤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독일계 지역를 포기하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대신 체코슬로바키아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국가 자체의 독립을 보장받았다. 즉, 이제부터는 전쟁이 터지면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도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책임을 독박 썼던 프랑스가 물귀신 작전을 편 것인데, 이게 영국 입장에서는 엄청난 정책 전환이며 의미도 컸지만 막상 영토를 뺏기는 체코슬로바키아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몇몇 영토를 포기하는 것을 고려하고는 있었으나 독일계 지역 전체의 할양은 생각도 않고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영국이 전쟁이 터져도 영국은 참전하지 않는다며 체코슬로바키아에 입장을 전하고,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영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프랑스가 참전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식으로 얼렀다. 결국 9월 21일에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해당 영토를 포기하기로 결정했으며 이 책임을 지고 내각 전체가 사임했다.
그러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9월 22일, 체임벌린이 직접 히틀러를 찾아가 영국과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가 영토 포기에 동의한다며 앞서 15일 히틀러가 제시한 요구에 대한 답변을 전했는데, 처음부터 수데테란트 사태를 트집잡아 전쟁을 일으켜 체코슬로바키아의 완전 해체를 노렸던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정말로 독일계 지역을 포기해 버리자 이번에는 그 할양을 단계적으로가 아니라 즉각적이고 신속하게 할 것과 해당 지역을 독일군이 즉시 점령할 것,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와 영토분쟁이 있었던 폴란드와 헝가리의 영토 문제까지 조정할 것 등 고의적으로 조건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니 이제는 정말로 전쟁을 피하기 어렵다고 본 영국과 프랑스는 23일 오후 지금껏 막았던 체코슬로바키아의 동원령 선포에 동의했고 이를 접수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당일 밤 10시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다음날인 24일에는 프랑스도 동원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9월 26일, 히틀러는 대규모 군사행동을 예고하며 유럽은 전쟁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쟁이 닥쳐오는 이 와중에 영국과 프랑스는 어처구니없게도 "전쟁이 나면 너네는 어쩔 거냐? 참전할 거냐?" 고 서로 간만 보면서 눈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사실 당시 서방 연합국들의 처지에서 이는 당연한 처사이기도 했다. 당장 프랑스와 영국은 아직 세계 대공황의 타격을 전부 회복하지 못했으나, 독일은 이미 체계적으로 자리잡은 중공업에 군수산업을 접목시켜 빠른 경제회복을 이루어냈다. 게다가 영-불 양국은 독일의 성장세에 공포감을 느끼고, 영국+프랑스정도의 국력이 있어야만 독일과 동등할 것이라는 오판을 내렸다.[16] 그리고 영-불 양국이 "독일은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고 오판한 가장 큰 이유는 "그렇게 큰 전쟁을 겪고도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히틀러는 상식인이 아니었다. 또한 히틀러에 대한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도, 프랑스를 상회했던 국력도, 당시의 독일 행정체제까지도 군수산업에 기반을 둔 지라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 넘쳐나는 물자는 다시 칼끝을 돌려 독일에 엄청난 행정적, 경제적 마비를 불러올 것이었고, 공약을 지키지 않은 히틀러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은 자칫 정부 전복이라는 대위기를 불러올 것이었다.
그리고 9월 28일, 또 다른 열강 국가가 끼어들었다. 이탈리아 왕국베니토 무솔리니가 각국에 자제를 촉구하며 중재를 할 용의가 있음을 선포했으며, 히틀러가 이에 화답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동의하면서 뮌헨 회담이 개최되었다.

4. 뮌헨 회담


회담을 통해 다음과 같은 합의안이 도출되었다.
  • 수데테란트는 독일에게 양도된다.
  • 톄신 지방은 폴란드에게 양도된다.
  • 루테니아와 남슬로바키아는 헝가리에게 양도된다.[17]
  • 회담 참여국들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안전과 독립을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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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 이후의 국경선 변화.
여기서 영국과 프랑스가 받아낸 양보는 10월 1일 수데테란트를 모두 접수하겠다는 독일의 요구를 타국 참관 하에 10월 10일까지 하는 걸로 바꾼 것 뿐이다. 즉, 말이 좋아 양보지 정작 실제로 한 건 아무 것도 없다.
이 협상으로 명백한 독립 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는 버려졌다. 이 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자국의 의사는 단 한 줄도 반영하지 못하고 영토를 주변국들에게 강탈당했다. 더군다나 군사 동맹국이던 프랑스는 이 과정에서 돕긴커녕 오히려 폴란드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팔아먹는 데 협조했다.
이제 체코슬로바키아는 당장 독일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독일과의 국경 지대인 수데테란트가 병합당했고 그곳에 건설된 강력한 요새선이 독일의 손아귀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5. 영국과 프랑스는 왜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렸을까?


  • 여론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국민들이 가진 전쟁에 대한 공포였다. 이 시기 양국의 여론 주도층이라 할 수 있는 3~40대 남성들은 대부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였다. 끔찍하기 그지없는 참호전독가스를 경험했던 이들은 그런 악몽 같은 전쟁이 자기들의 살아생전에 다시 벌어지고, 아들 세대가 그것을 경험하기를 결코 원치 않았다. 민주주의 국가인 양국의 정치권은 그런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협정을 극렬히 반대한 처칠이 수상자리에 앉아 협정을 결렬시켰다 해도 전쟁을 극렬히 반대하는 여론에 의해 정권이 뒤바뀌는 상황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며 게다가 프랑스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의 경우 본인부터가 1차 대전 참전 용사였다.
  • 군사
일단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준비가 거의 안 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뮌헨 협정 1년 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도 전쟁준비가 불완전한 상태였다. 그래서 선전포고만 하고 약 8개월 간 전쟁 준비 겸 눈치도 볼 겸 가짜 전쟁 사건이 일어났다. 더군다나 당시 영프 양국은 세계 대공황의 늪에서 막 빠져나오던 참으로 군사력 정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영프 양국은 독일 측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이는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작품으로, 영프는 독일의 군사 열병식과 선전 영화 등에 통째로 낚여서 독일의 군사력을 실제 이상으로 보고 두려워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만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더욱이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군사 동맹의 의무를 지켜야 할 프랑스는 위의 문제로 영국의 참여가 없는 대독일 전쟁의 단독 개전을 두려워하고 있어 외교적으로 영국에 질질 끌려다니고 있었다. 여기에 폴란드헝가리도 이 기회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를 얻기 위해 독일에 동조했다. 특히 폴란드의 경우, 체코슬로바키아와 함께 프랑스의 군사동맹국으로서 유사시 동부전선에서 독일과 싸워야 하는 나라였으나 체코에게 빼앗긴 톄신[18]에 대한 영유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욕심에 체코슬로바키아 압박에 합류하여 프랑스의 전쟁 계획을 망가뜨렸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프랑스는 독일뿐만 아니라 막강한 폴란드군까지 상대해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19]
  • 외교
독일은 외교적 명분론에서도 민족자결주의를 등에 업고 있었다.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압박엔 반대하면서도 수데테란트 요구에 대해서는 같은 민족이니 당연하지라는 반응을 가진 영국-프랑스인들도 상당했다. 민족과 국가가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거기에 외교 협상을 주도한 영국은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이해 관계가 적었고,[20] 체코슬로바키아를 옹호해야 할 프랑스는 군사 문제 부분에서 설명하였듯 외교적으로 영국에 끌려다니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 독일의 요구를 수용해주고 총부리를 소련에 돌려 서방으로서는 골칫덩어리인 소련과 나치독일을 전쟁으로 맞붙게 하거나 또는 둘의 대립구도를 만들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이랬기 때문에, 뮌헨 협정 이후 독일과 폴란드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소련이 먼저 서방에 손을 내밀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을 굴욕적일 정도로 무시했고, 이에 격노한 스탈린이 영국과 프랑스를 믿지 못하면서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이어진다.
결국 이런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포기했다.

6.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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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연도
내용
1
1938년 10월
수데테란트가 독일에 흡수된다.
2
1938년 10월 2일
톄신이 폴란드에 합병된다.[21]
3
1938년 11월 2일
헝가리 민족이 거주하는 국토는 헝가리에 흡수된다.
4
1939년 3월
카르파티아 산맥에 존재하는 루테니아 지역은 따로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로 독립되었으나,
얼마 뒤 헝가리에 의해 무력으로 병합된다.
5
체코의 나머지 국토는 전부 독일의 직할 보호령이 된다.(보헤미아, 모라비아가 보호령으로 전락)
6
슬로바키아는 독립국으로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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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데테란트로 진군하는 독일군을 나치식 경례로 환영하는 수데테란트의 독일계 여성 주민들. 우는 듯한 세 번째 여인과 웃고 있는 첫 번째 여인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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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우리최대의 전쟁으로 부터 구하다!

1938년 8월 30일,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의 연설 소개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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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지켰다며 열렬한 환영을 받은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 들고 있는 종이는 "독일은 더 이상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히틀러 친필 서명이 담긴 서약서이다. 기자들 앞에서 이 종이를 흔들며 체임벌린은 "여기 우리 시대의 평화가 있습니다!" 라고 외쳤지만... 이로부터 6개월 후,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병탄하여 이 문서는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시킨 결과 유럽은 고작 6개월 동안 평화를 맛보았다. 6년도 아니고, 6개월이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을 협박해서 체코를 통째로 먹어 치우고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슬로바키아를 괴뢰국으로 만들었다. 서방 연합국으로부터 배신당한 충격에다가, 막강한 방어시설이 구축되어 있던 수데테란트, 300만에 달하는 인구를 잃은 체코슬로바키아는 저항할 의지조차 없었다. 게다가 수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아서, 체코가 독일의 직할 보호령으로 전락하고 슬로바키아가 괴뢰국이 된 직후 이웃에 있던 헝가리가 슬로바키아 동부를 침공하여 동부 국경 지대의 영토 일부를 추가로 빼앗기까지 했다.참고
이 사건은 소련의 외교 방침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는데, 소련은 당시 체코와 공동 방위 조약을 맺고 있었고, 막심 리트비노프 외무장관의 주도로 이를 확대하여 프랑스-영국-폴란드를 아우르는 4자 집단 안보 체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탈린은 영프의 방관 속에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중분해되는 것을 보자 영프를 믿지 못하게 되었고, 영프 쪽에서도 매우 소극적이었으며, 폴란드 역시 소련과 방위 조약을 맺는 것을 극력 거부해서 결국 히틀러와의 협상을 모색하게 되었다.[22] 히틀러도 양면전쟁을 피하기 위해 스탈린에게 접근했고, 이 결과가 바로 독소 불가침조약.이다. -이로 인해 폴란드는 양면전선이 형성되는데..-
당시에는 윈스턴 처칠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런 생각을 안 했으나, 1년 후에는 누구나 이 협정이 외교적 실패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1938년 3월의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묵인했던 영국-프랑스는 1년 후에도 히틀러에게 똑같은 수에 당했고, 체코를 포기함으로써 그를 달래보려고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여기에 만족하기는커녕 또 똑같은 수법으로 폴란드를 협박했고, 폴란드가 체코처럼 굴복하지 않자 무력으로 침공한다.
다만 영국과 프랑스가 이 조약으로 독일이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결단코 아니었는데, 체임벌린 부터가 앞에선 우리 시대의 평화를 외쳤으나 뒤에선 맹렬히 재무장을 시작했고 프랑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즉 영프를 위시한 연합국의 의도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해서 평화를 얻기 보다는,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먹어치우는 동안 군비를 비축하는 등 대비할 시간을 벌 목적이었다. 다만 애초에 벌 수 있으리라 보았던 2년은 커녕, 단 6개월도 못 벌었으니 완전한 외교적 실패라고 볼 수 있다.[23]
여담이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불똥이 튄 정도가 아니라 바가지로 거하게 받아먹은 제3의 피해자가 엉뚱하게 서쪽에 있는 스페인이었다. 이 당시 스페인 내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는데 내전 초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열강들이 모여 비동맹, 불간섭을 원칙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이탈리아는 대놓고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친파시스트 진영에게 돈과 무기, 병사를 다스로 퍼다주고 있었고, 소련도 반대쪽에서 공화파 진영에 지원을 주고 있었다. 이 와중에 좌파 인민 전선 출신의 레옹 블룸의 프랑스 정부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가까운 공화국에게 지원을 해주려고 했으나 동맹국인 영국의 강력한 반대로 인하여 좌초되었다. 결국 내전 내내 프랑스는 피레네 산맥 바로 아래에서 대대적인 이념 전쟁이 벌어지면서도 손가락만 빨고 있다가 공화국을 도와줘야 하지 않겠냐며 영국에게 불평 불만을 늘어놓고 있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뮌헨 회담에서 이미 프랑코 진영의 승세가 유력해지는 걸 본 영국 측에서 스페인에 대해서는 자신들은 손을 놓았다고 주장하면서 전쟁 내내 공화국이 추구하던 외교적 승리의 관에 못을 박아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를 예언하고 경고한 윈스턴 처칠은 영국 총리가 되어 히틀러에 맞서 싸운다.

7. 여담


뮌헨 협정에 관련된 국가들과 인물들과 단체들의 말로는 모두 좋지 않았다. 사이좋게 야합에 참여한 대가를 치르지
  • 영국 : 폴란드와 군사 동맹을 맺으며 뒤늦게 독일 타도를 외쳤으나, 정작 군사력이 너무 부족해서 폴란드가 망할 땐 도와주지도 못했다. 그리고 체임벌린은 1940년 5월에 노르웨이 전역의 패전을 계기로 실각했다. 본토도 루프트바페에게 폭격당한 건 덤. 그나마 국가가 존속한 상태로 독일과 맞서 싸웠고, 본토가 전쟁에 크게 휘말리지도 않았으며, 결국 전쟁에서 이겼으니 그나마 사정이 나은 경우다. 그러나 뮌헨 야합과 이로 인한 2차 대전 자체의 결과 대영 제국의 해체라는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 프랑스 제3공화국 : 독일과의 전쟁에서 6년도 6개월도 아닌단 6주만에 패하여 수도 파리를 포함한 영토 북쪽 지역은 독일군에게 점령당하고, 남쪽 지역은 독일의 괴뢰 국가가 들어섰다. 뮌헨 회담에 참석했던 달라디에 총리는 정치범으로서 수용소에 끌려갔으며 프랑스 국민들은 독일의 인적·물적 자원 약탈로 지독한 물자난과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다. 다행히 독일이 전쟁에서 패한 덕택에 주권을 되찾았고 빠르게 복구하여 강대국의 대열에 들어서긴 했지만, 이후에도 이 당시의 패전에 따른 불명예는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큰 상처로 남았다. 물론 식민지는 다 독립시켜야 했다.

그나마 야합한 세력들 중 영국, 프랑스는 세계를 주름잡던 식민 제국에서 그럭저럭 옛날에 쌓아 올린 걸로 먹고 살면서 여전히 강대국의 지위는 유지하는 선에서 그쳤지만 아래 리스트는 아예 장기적으로 외국에 의한 점령, 인종 청소, 대학살, 스탈린주의, 독재 등을 겪으면서 제대로 피박 뒤집어 쓴 경우들이다.
  • 나치 독일 : 수없이 많은 LT vz. 38전차를 얻어서 소련침공까지 쓰다가 마개조를 하여 종전까지 썼다 수데테란트와 체코를 집어삼키고 슬로바키아를 괴뢰국으로 만든 뒤 세력 확장을 더 계속하고자 1939년 폴란드를 공격했으나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한 영국과 프랑스의 선전포고를 맞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소련에 대한 공격으로 결국 사방에 적을 만든 끝에 양면전쟁을 불리하게 치르게 되었고 도움 안되는 동맹국의 정신나간 짓거리 때문에결국 미국까지 참전하여 영국, 프랑스, 소련, 미국 등 4개국의 협공을 받으며 전세가 더욱 더 불리해지다가 결국 1945년 패전하여 뮌헨 협정으로 뺏어먹었던 수데테란트 등은 물론이고 동프로이센, 포메른, 슐레지엔, 알자스 등 기존 영토들 상당수도 전부 잃어버렸다. 동독과 서독으로 나라 자체가 분단되어버린 것도 덤 그나마 이것은 동서독 통일로 해결되었지만 그 대가로 기존 영토들에 대한 영유권은 영구히 포기하게 되었다.
  • 폴란드 제2공화국 : 체코가 빼앗아간 국경 지역의 작은 영토 톄신을 다시 수복하고자 뮌헨 협정 과정에서 독일에 붙어 톄신을 체코로부터 반환받은 폴란드는 톄신을 되찾은 것으로도 만족을 못한 나머지 야보리나, 토르스테냐 등 슬로바키아 국경 지역의 영토 두 곳을 슬로바키아로부터 추가로 더 뜯어먹었으나 1년 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가해자에서 피해자의 처지가 되어 버렸다. 독일이 전쟁에서 패한 덕택에 주권은 되찾았지만 2차 대전의 주요 전장으로 독일과 소련에게 여러 차례 정복과 점령, 분할을 겪었고 결국 냉전 시기 소련의 위성국으로 40여 년을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 헝가리 왕국 : 루테니아, 슬로바키아 남부 지역 등 영토를 좀 얻었지만 결국 독일의 동맹국으로 전쟁에 나서다 신나게 털리고, 소련군에게 영토가 초토화되었다. 이후 뮌헨 협정으로 먹은 땅을 슬로바키아와 소련에게 전부 빼앗기고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가 1989년 동유럽 민주화 혁명 과정에서 공산당 1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되었다.
  • 이탈리아 왕국 : 회담의 협상 중재자를 자처하며 사실상 독일을 편들어 독일의 수데테란트 병합을 눈감아주고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과 함께 추축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했으나 오히려 패전국이 되었고 독일과 추축국의 편에 서며 전쟁을 일으켰던 독재자 무솔리니는 실각후 반정부군 세력에게 붙잡혀 총살당했으며 무솔리니의 내각 장악과 전쟁 참전을 승인했던 이탈리아 왕실은 전후 축출되어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다.
  •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 전쟁 기간 내내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에 수탈당했으며, 거주하던 유대인들도 거의 전멸당했고, 체코슬로바키아의 훌륭한 중공업 시설은 이후 독일의 가장 훌륭한 중공업 시설로 독일군을 무장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덕택에 주권을 되찾긴 했으나 독일군이 물러나기가 무섭게 뒤이어 소련군이 자국 영토로 들어와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고, 이후 냉전 체제가 무너지면서 민족, 국가간의 분쟁이 불거지다가 아예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각자 분리 독립해 버렸다. 서로 원해서 분리 독립하긴 했지만...
  • 수데테란트 : 국가는 아니지만... 독일에 병합된 이후 열광적으로 히틀러를 지지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영유권이 체코에게 다시 넘어갔고 전후 체코인들의 분노에 찬 보복을 받았다. 상당수가 매국노로 간주되어 소련군과 새로 들어선 체코 정부가 제지에 나설 때까지 린치 내지 학살을 당했고,[24] 이후 추방령이 내려져 결국 대부분의 수데테란트 거주 독일인들은 재산은 한 푼도 못 가지고 정든 고향을 뒤로 한 채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떠나야만 했다. 어느 쪽으로 보아도 독일인들의 자업자득.[25]
  • 스페인 제2공화국 : 회담의 주된 주제도 아니고, 중부 유럽의 문제에 실려 논의된 수준에 불과했지만 1937년 5월 이후 정치적, 군사적 전선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서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대한 반파시스트 국제 여론을 통한 외교적 승리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공화파의 희망을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히틀러가 어디서 어떻게 깽판쳐도 막을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메세지를 통해 완전히 박살냈고, 소련의 대 공화파 지원이나 프랑스의 비정기적이고 간접적인 지원 또한 끊어버렸다. 뮌헨 협정의 회담을 보고 전쟁이 가망이 없다는 판단을 한 공화파 지도부는 곧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국제 여단 의용병들을 해산하고 각각의 조국으로 보냄으로써 실질적인 패전이 확실시되었다. 이후 몇달 후인 1939년 봄 마드리드가 함락당하고,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스페인 공화국의 시체 위에 파시스트 국가를 건설하여 그 체제가 나머지 유럽의 전쟁이 끝나고도 30년이 넘게 지난 1975년까지 유지되었다.
덤으로 비회원국에게 회원국을 팔아먹는데도 침묵한 국제연맹도 망했다. 물론 국제연맹은 이전부터 지침을 대놓고 무시하는 국가들 때문에 식물연맹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어느 정도의 기능이나마 회복한 건 국제연합(UN)으로 재창설된 이후. 이전과 달리 안보리 상임이사국 제도 등을 도입해 더욱 강력해진 UN이었으나 냉전 당시의 국제연합의 위세는 압도적이지 못했고 최근에 와서야 제법 나아진 추세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우리나라 일부 사람들이 을사조약을 을사늑약으로 부르듯 이 조약을 뮌헨의 배신(Mnichovská zrada) 혹은 뮌헨의 강요(Mnichovský diktát)라고 한다(우리식으로 따지면 뮌헨늑약쯤 된다). 한편 처칠이 뮌헨 협정을 반대하고 결국 전쟁을 이끌어 체코슬로바키아를 해방시켜 준 은인이기 때문에 체코 및 슬로바키아에서는 처칠만큼은 매우 높이 평가한다. 반면 기존 서유럽 강대국연합국에 대해서는 불신이 팽배하며, 독일이라면 아예 이를 간다.
이처럼 욕을 엄청 먹었고, 뒤에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가는 문을 열어제낀 협정이지만 당시에 협정 조인 때만 보면 성공적인(?) 협정이었다. 독일은 히틀러가 원하던 독일 민족의 영역을 신성 로마 제국 수준으로 확보했고 중앙유럽을 사실상 통일하다시피 해서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자기가 원해서 한 것은 아니지만 체코슬로바키아는 일단 전쟁을 피했다. 만일 여기서 히틀러가 만족하고 내치에 힘쓰면서 다음 기회를 노렸다면 합스부르크 이후로 최대 영역 확보와 30년 전쟁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프랑스에 의해서 파괴된 과거 독일 제국(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이라는 업적을 달성한 유능한 정치인으로 칭송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 공산주의와 맞서려는 유럽 내의 맹주로 부상할 수도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문제는 히틀러가 거기서 만족할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전쟁도 없이 땅을 먹었다고 좋아하기는커녕 "멍청한 무솔리니와 약아빠진 체임벌린 때문에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집어삼킬 구실을 잃었다." 며 짜증을 냈고, 반년도 되지 않아 슬로바키아 분리주의자들을 꼬드겨 독립을 선포하게 한 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구실을 만들어 협정 당시의 약속과 달리 체코를 통째로 합병해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폴란드에까지 그단스크(단치히)와 프로이센 북동부 해안선에 대한 영토 반환 요구를 하면서 협정 자체를 파토내 버렸다.
2차 대전 이후 독일이 점령했던 수데테란트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반환되었으며, 헝가리가 점령했던 남슬로바키아도 반환되었다. 다만 폴란드에게 점령되었던 톄신은 국경 도시로나마 국경 재조정을 거친 후 일부가 전후 폴란드 영토로 남았으며[26] 우크라이나인들이 살고 있던 루테니아는 헝가리의 점령에서 벗어나 소련의 우크라이나에 편입되어 독립된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일부인 자카르파탸 주(Zakarpattia Oblast)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에서는 한동안 슬로바키아 고유의 상징인 쌍십자에서 나치 시절 괴뢰정권이 연상된다 하여 금지시키고 불꽃 모양(이 불꽃 모양은 1944년 나치 괴뢰정권에 반발해 일어난 봉기를 상징한다고 한다)으로 한동안 대체했다가 민주화 이후에야 쌍십자 상징이 부활했다. 물론 종교적 상징물을 부정하는 공산 정권 눈에 십자가가 아니꼽게 보인 탓도 있었다.[27]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쿠바에 대해 해상 봉쇄 등의 온건책을 펴기로 하자 선제 핵공격 등 강경책을 주장하던 커티스 르메이가 이 사건을 언급하며 온건책을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런게 이게 르메이의 단순한 비판 수준이 아니었다. 존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는 협정 당시 영국 주재 대사로 활동하면서 체임벌린 정권의 대독 유화책을 지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커티스 르메이는 케네디에게 "뮌헨 협정 당시 당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저들에게 유화책을 쓸 참인가?"라고 깐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케네디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또 케네디는 뮌헨 협정 당시 하버드 대학교 학부생이었는데, 대독일 유화책을 지지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졸업 논문을 통해 유화 정책을 강력히 비판한 바 있었다. 그의 논문은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는가≫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어 큰 명성을 얻기도 했다. 때문에 케네디 입장에서 자신이 유화주의자라는 비난은 더더욱 모욕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21세기 현재에 분쟁 중인 국가와 세력들 간의 (한쪽의 항복 협정이 아닌) 평화 협정 결정을 신뢰하지 않게 만들어 버린 원흉이 되어버린 협약이다. 실제로 국제 분쟁 간의 평화 협정 떡밥이 나오면 '항상 나오는 반론 사례가 바로 이 뮌헨 협정이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평화를 위한 것이 오히려 더 큰 전쟁을 불러온 예시로) 만약 이 조약 없이 바로 독일을 손봐줬다면 아돌프 히틀러도, 홀로코스트도, 그리고 수많은 죽음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물론 비록 체코슬로바키아 입장에서는 1년 먼저 시작된 비극이었을 뿐이지만.[28]
간혹 이 바로 독일을 손봐줬다면이란 가정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 가정이었는지는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다. 일례로 뮌헨 조약 이후 소련의 독촉으로 소영프 3국간 회담을 열었는데, 이 자리는 소련이 독일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 동맹의 확답을 얻어내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그 시점에서도 당장 동원 가능한 병력이 고작 4개 사단이라는 어이없는 대답을 하면서 영국의 전쟁 동원 능력의 현실을 드러내 보였다. 그리고 여기에 열받은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회답. 실제로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준비가 되지 않아서 가짜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독일에게 선전포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동원할 병력이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근 8개월 간 전투가 전혀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독일이 프랑스보다도 더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한 것이다. 당시 독일군이 가용한 병력은 불완전하게 준비된 36개 사단에 불과했고, 이는 프랑스가 당장 운용 가능한 40개 사단과 영국의 4개 사단,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의 20개 사단에 한참 못 미치는 전력이었다. 독일이 전쟁을 수행해 볼 만하게 된 것은 1년이 지나 60개 사단을 동원 가능해진 1939년 폴란드 침공 직전 시점이었고, 여기에는 체코를 공짜로 집어먹고 어마어마한 군수품과 산업시설을 얻은 것이 엄청난 역할을 했다. 일례로 폴란드 침공은 물론 프랑스 전역에서도 체코제 35(t) 전차와 38(t) 전차[29]는 독일 기갑사단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1938년 당시 군사력 균형은 아무리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영국과 프랑스가 훨씬 유리했으며, 독일군은 1940년 프랑스 전역 직전이 되어서야 수적으로나마 프랑스군-영국군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요컨대 영프가 괜히 독일의 프로파간다에 겁을 내서 양보하기보다 독하게 마음먹고 1938년에 전쟁을 벌였으면 쾌승은 몰라도 1940년처럼 어이없는 패배는 없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8. 녹색 작전



대전 후 사학계의 주류 학설은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력 침공하고자 했으나, 뮌헨 협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9. 관련 문서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뮌헨 회담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정치행정 분야)뮌헨회담
(동유럽사)외교 정책과 뮌헨 위기
(네이버 조약사)뮌헨 협정
(한국어 위키백과)뮌헨 협정
(영어 위키백과)뮌헨 협정

[1] 데이비드 로우 화백의 작품. 폴란드 침공 항목 첫 번째에 있는 만평을 그린 인물이다.[2] 출처.[3] 출처.[4] 출처.[5] 공교롭게도 히틀러는 프랑스 함락 직후 "미스터 처칠은 나를 믿어야 한다. 독일과 영국이 전쟁을 계속한다면 둘 중 하나는 파멸할 것이고 그것은 당연히 영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발언을 남겼다. 그러나 처칠은 뮌헨협정 당시의 소신을 지켰고 결과는...[6] 이러한 표현이 나온 이유에 대해서는 녹색 작전 항목 참조. 하지만 차라리 전쟁이 1년 일찍 터졌다면 2차 대전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있을 정도다.[7] 서슬라브족 중심의 대 모라비아가 있었기 때문이다.[8] 예컨대 16세기 이전까지 보헤미아 왕국이 영향력을 미치던 보헤미아 외 모라바(모라비아), 실레시아(슐레지엔)를 포함한 영토가 곧 체코가 된다. 아예 제대로 된 본체도 없었던 슬로바키아는 말할 것도 없고. 그렇기에 보헤미아 지방(라틴어 명칭)을 부르던 원어명인 체히, 체코를 사용하는 건 체코의 다른 지방에겐 약간 불만이 되는데, 어느 순간 부정적으로 여겨지던 '체스코'란 단어가 매스 미디어에 의해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9] 체코인이 보헤미아 왕국으로 16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해오던 반면 슬로바키아인은 11세기 경부터 900년 넘게 헝가리의 지배를 받아 왔다. 대 모라비아 왕국 이래 이들이 한 나라의 주 민족이 된 것은 체코슬로바키아가 마지막이었다.[10] 독일어 발음이 '주데텐란트'인 것으로 보이지만 체코어 표기법에 따르면 수데테란트라고 하며, 현행 어문 규범상 해당 지명을 표기할 때는 '수데테란트'라고만 써야 한다.[11] 단치히 자유시. 결국 이게 문제가 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12] 메멜 지방. 1939년 3월에 결국 삥뜯었다.[13] 정확히는 오스트리아에 속한 티롤 3지방 가운데 중부인 보첸 현.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 대전 승전 대가로 얻어냈다.[14] 하지만 대전 중인 1943년, 무솔리니 실각 및 구출 후 성립한 괴뢰정부인 살로 공화국을 상대로 결국 삥뜯어낸다. 물론 전후에 원상복귀.[15] 독일의 전쟁 준비는 이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폴란드 침공으로 2차 대전이 일어날 당시까지도 제대로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육군참모총장이었던 루트비히 베크는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반대하다가 사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히틀러의 결단도 어부지리격으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점이 있는데, 만약 독일이 전쟁 준비를 마친 후 침공했다면 소련군의 현대화, 미국의 핵개발 등이 완료되어 더욱 처참한 패배를 맞이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나저러나 망하긴 했다[16] 사실 당시의 나치 독일은 프랑스의 국력을 살짝 상회할 뿐이었다. 그마저도 농업생산량은 프랑스가 훨씬 우위에 있었기에, 프랑스가 요새와 방어전략을 이용해 버티기만 한다면 제1차 세계 대전의 결말을 반복할게 뻔했다.[17] 루테니아는 독립 국가로 건설될 예정이었으나 한 달만인 11월에 수도 우주호로트를 포함한 남부의 대부분 영토가 독일과 이탈리아의 배상협정에 의해 헝가리로 넘어갔으며, 이후 2차 대전 때 추축국에 가담한 헝가리에 의해 나머지 전부가 날아갔다.[18] 영문위키 참조.[19] 이렇게 막강한 폴란드군 이미지는 1921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소련군이 개관광타면서 생겨났다. 그러나 폴란드는 이후 경제력 등의 문제로 인해 시대의 급격한 발전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리고 1934년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으로 프랑스는 폴란드가 독일의 동맹국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했다. 하지만 이 건에 관해서는 폴란드도 할 말이 있는 것이, 히틀러가 집권하자마자 불길함을 감지하고 프랑스에게 먼저 대독 양면전쟁을 제안했던 것은 다름아닌 폴란드였다. 즉 독일이 사고치기 전에 프랑스와 폴란드가 힘을 합쳐 먼저 예방전쟁을 벌이자는 것. 하지만 침공의 명분도 없는 상황인데다 프랑스 또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폴란드는 나름의 자구책으로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것이었다. 같은 이유로 폴란드는 소련과도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즉, 폴란드가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도와주고 싶어도 그놈의 불가침조약 때문에 독일을 견제할 수 없었다(...). 물론 그게 체코슬로바키아 분할에 동참한 걸 정당화시켜 주지는 못하지만.[20] 당시 영국 정치권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없어도 프랑스가 있으니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영국은 백만 대군을 보유한 유럽에서 손꼽히는 육군 강국인 프랑스에 큰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정작 프랑스는 영국 없이는 전쟁도 없다는 내부 방침을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2차 대전 개전 이후 프랑스군을 시찰한 윈스턴 처칠은 프랑스의 백만 대군은 허상이었다며 크게 개탄했다.[21] 이후 1938년 12월 1일에는 슬로바키아-폴란드 국경의 일부 지역이 추가로 폴란드에 흡수되었다.참고 1참고 2참고 3 [22] 폴란드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통해 소련 서부의 영토를 얻었고, 뮌헨 협정 당시는 이 전쟁이 끝난 지(1921년) 20년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여기에 대대로 쌓인 민족 감정까지 겹치면서 폴란드는 소련을 불신하게 된 것.[23] 덤으로 이게 독소불가침조약으로 이어짐을 감안해보면 더 실패인데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전에 우려한 것이 양면전선이었기 때문 제1차 세계대전처럼 서부전선은 영국과 프랑스 동부전선은 러시아의 구도가 다시 이어지는 것을 우려했던 건데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인해 동부전선은 '일단' 발생하지 않았고 폴란드 침공부터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어 동부전선이 형성되는 약 2년동안 독일은 폴란드,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등을 정리해 이탈리아가 바보짓해서 북아프리카 전선을 형성하고 그리스 침공을 벌여야 하긴 했지만 그것 외에는 최소한 제1차 세계대전 때보다는 결과가 독일 측에는 좋긴 했다. 즉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인해 동부에서 독일을 견제할 수 있는 혹은 견제해야 할 폴란드와 소련이 각각 폴란드 침공, 독소 폴란드 점령,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인해 독일을 견제하지 못하거나 견제하지 않음으로서 독일이 양면전선의 부담을 덜어 서부전선에서 프랑스를 무너뜨리는 큰 업적을 달성할 수 있던것 만일 소련과 독소불가침 조약이 맺어지지 않았다면 독일은 소련에 대한 부담감이 컸을 것이다. 그도 그럴게 제1차 세계대전의 양면전쟁의 부담을 다시 경험해야 했을 것이니[24] 참고로 동프로이센이나 슐레지엔, 포메른 등 다른 구 독일령 지역에 살던 독일인들은 이렇게 혹독한 대우는 받지 않았다. 체코에 살던 이들처럼 열성적으로 병합을 추진하는 등 매국 행위를 한 건 아니었기 때문. 물론 소련, 폴란드 측의 방침으로 결과적으로는 이들도 대부분 예로부터 살던 터전을 버리고 독일로 강제이주 당했지만 그래도 과정에서 체코 수데테란트의 독일인 집단들과 차이가 있다.[25] 참고로 이들의 존재와 관련하여 독일과 체코의 입장이 많이 다른데, 독일 정부는 체코 영토로 인정하면서도 독일인 실향민들이 고향으로 가거나 이전 재산 소유권에 관한 소송을 거는 것 자체는 막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나 체코 측에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2015년 수데테란트 지방에 속해있던 체코의 한 시의회에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인에 대한 강제 추방에 대해 사과하였다.[26] 더불어 슬로바키아 국경의 소규모 분쟁지역들도 모두 뮌헨 협정 이전의 국경으로 회귀하였다.[27] 비슷한 이유로 헝가리도 공산국가 시절에는 십자가 상징을 금지시키고 방패형으로 생긴 헝가리 국기에 밀 이삭이 둘러진 상징을 사용했다.[28] 덕분에 일찍 일어난 전쟁처럼 만약 뮌헨 협정이 결렬되었다면 하는 소재로 나온 대체역사 작품도 나온 적이 있다.[29] 톤 단위의 무게라고 부연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름 자체에 괄호가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