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마 제국 (r20190312판)

 


로마 제국
Imperium Romanum (라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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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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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년 서로마 제국의 최대 강역[1]
286년[2]/395년[3] ~ 476년[4]
위치
남유럽, 서유럽, 북아프리카
수도
메디올라눔[5] (395년 ~ 402년)
라벤나 (402년 ~ 476년)
언어
라틴어 (공용어)
갈리아어
게르만어
베르베르어
기타 지방 언어
종교
고대 로마 다신교 (380년 이전)
니케아기독교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 (임페라토르)
주요 황제
호노리우스 (395년 ~ 423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422년 ~ 455년)
마요리아누스(457년 ~ 461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475년 ~ 476년)
주요 사건
395년 로마 최종 분할
401년 알라리크 이탈리아 침공
406년 2차 이탈리아 침공
410년 로마 약탈
410년 서로마 브리튼 상실
418년 서고트 왕국 히스파니아에 건국
433년 프랑크족 북 갈리아에 왕국 건설
440년 서로마 북아프리카 상실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
455년 2차 로마 약탈
468년 동·서 로마 연합군 반달 왕국군에게 참패
469년 서로마 히스파니아 완전 상실
473년 서로마 갈리아 남부 상실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480년 율리우스 네포스 암살
486년 수아송 왕국 멸망
성립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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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역사
3.1. 역대 황제
3.2. 최종 분할 이전
3.5. 최후의 순간
4. 멸망 이후
5. 관련 문서
6. 역사보기 틀



1. 개요


로마 제국의 분할로 만들어진 국가로, 395년 1월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한 후 그의 두 아들이 제위를 승계하면서 분열된 로마 제국 중 서부지방이다. 81년간 존속하였고, 476년에 멸망한다. 이후의 로마 제국 역사는 비잔티움 제국으로 계속 이어지는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함으로써 고대가 끝나고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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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세


아르카디우스는 제국 동부를, 호노리우스는 제국 서부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제국은 훨씬 이전부터 동-서 양 영역에 각각의 황제가 군림하며 통치하는 체제가 지속되어 왔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 이후, 이미 동-서에 각각 정제와 부제가 있었으며, 한동안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티우스 2세, 율리아누스 치세하에서 통일된 적은 있었지만, 이후 다시 양쪽의 영역으로 분할 통치되고 있었다. 사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통일도, 참제 에우게니우스를 토벌한 394년 9월부터 불과 수개월에 불과했던 찰나의 기간이었다. 제국의 분할 통치가 영속화되었다는 의미에서 395년을 흔히 분열의 시기로 말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이후에도 동-서 두 제국은 '하나의 로마'라는 보편적 인식을 유지했으며, 5세기의 다사다난했던 정세 속에서 지속적으로 정치적 유대 관계를 유지했다.
분할 이전부터 자금력이나 군사력 면에서 우위를 점했던 제국 동부와는 달리 제국 서부는 상대적으로 자금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졌고 게르만족의 침공에도 항상 시달려야 했다. 동로마를 12세기 말까지 대제국으로 지탱해주던 그리스 및 소아시아, 로마의 빵 바구니라 불리던 이집트 등 알짜배기 지역은 모두 동로마가 가져갔다. 지금은 서로마 지역의 영국,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등이 산업 고도화로 터키, 이집트, 시리아 등에 비해 훨씬 잘나가지만, 당시에는 농업생산량과 교역량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동방에 비해 국력이 떨어졌다. 영국, 스페인은 현대에도 농사짓기 썩 좋은 국가가 아니고, 프랑스는 농사짓기 좋은 땅이지만 당시에는 아직 개간이 덜 되어 숲이 많은 땅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대양 무역이 활성화되어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이 오히려 세계와 더 연결이 잘 된 지역이지만 지중해 무역과 동방 무역이 대세이던 당시까지만 해도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는 무역로에서 동떨어진 변방 신세를 면하기 힘들었다. 오히려 현재 알제리와 튀니지가 위치한 북아프리카 지역이 당시에도 크기는 작지만 서로마에서 가장 세수가 잘 걷히는 땅이었다고 보기도 할 정도다.
제국 분할 이후 50여 년간 서로마는 스틸리코, 콘스탄티우스 3세[6], 아이티우스 같은 걸출한 사령관들의 노력으로 국가를 지탱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죽고 난 후 무력한 황제들이 연달아 등장하고 플라비우스 리키메르, 오레스테스 등의 실권자가 황제를 쥐락펴락하였으며 결국 오도아케르에 의해 황제가 폐위당하면서 서로마는 멸망했다.

3. 역사


크게 몇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 스틸리코의 섭정시기 (395년 ~ 408년)
  • 무능한 호노리우스의 삽질과 1차 로마 약탈 (408년 ~ 410년)
  •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의 재건시기 (411년 ~ 421년)
  • 이베리아와 북아프리카 상실 (422년 ~ 433년)
  • 아이티우스의 집권과 훈족의 침공 (433년 ~ 454년)
  • 두번째 로마 약탈과 혼란기 (454년 ~ 457년)
  • 마지막 제국 재건 시도 (457년 ~ 468년)
  • 종말 (468년 ~ 476년)

3.1. 역대 황제


서로마의 역대 황제
테오도시우스 대제사후 로마 제국의 서방 속주들을 통치하게된 호노리우스스틸리코를 처형하는등 무능의 극치를 달렸고 그의 통치 시기에 로마 약탈과 브리타니아 속주가 로마의 영향력을 벗어나게되었다. 그의 사후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제국 재건을 위해 노력했으나 암살당했고 그의 사후 서로마 제국의 붕괴는 더욱더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사후 게르만 족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황제들이 등극하기 시작했고[7] 마지막에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황제가 퇴위당하면서 제국은 소멸한다.

3.2. 최종 분할 이전


군인 황제시기를 거치면서 로마 제국은 급속도로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제대로된 정치를 하지못하고 이민족의 침공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면서 황제가 포로로 잡히기도 하는등 제국의 상황은 심각해졌다. 연이어 발생하는 반란과 급상승하는 물가와 국경지대의 불안에 대응하기위해 제국은 여러가지 시도를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 시기 전제정을 실시함으로 정치적으로는 안정됬지만 군인 황제시기동안 약화된 제국을 황제 한명이 통치하는게 힘들었고 제국을 분할해 1명의 정제와 3명의 부제를 두어 제국을 다스리도록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가 살아있을때는 몰라도 그가 죽자 부제들은 서로 전쟁에 돌입한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막시미아누스, 갈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통치한제국은 디오클레티아누스막시미아누스가 자진 퇴위하자 3명의 부제가 더 출현해 제국을 사실상 5등분해 다스린다.
내전의 승자는 콘스탄티누스 1세로 쟁쟁한 경쟁자인 4명을 처치하고 313년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다. 그의 통치아래 제국은 안정되나했지만 그의 죽음이후 대제의 아들 콘스탄스콘스탄티누스 2세의 내전과 율리아누스의 통치를 거치면서 제국은 서서히 약해지고 있었다. 요비아누스사후 제국은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4명이 제국을 4등분해 통치했지만 전장에서 전사하거나, 암살당하는등 결말이 좋지않았고 테오도시우스 1세에의해 다시 재통합되기 전까지 제국은 분할되있었다.
그리고 테오도시우스 1세의 사후 제국은 파국을 맞이하게된다.

3.3. 스틸리코알라리크


호노리우스의 재위 동안(395년 ~ 423년) 전반 13년은 최고사령관(마기스테르 우트리우스크 밀리타이) 스틸리코가 전권을 쥐었다. 401년 야만족중 고트족의 세력이 크게 일었는데 그리스를 초토화시키고 일리리쿰일대를 장악한 알라리크는 또다른 고트족 부족과 몇몇 다른 부족과 연합해 라다가이수트와 함께 이탈리아를 침공한다.
스틸리코는 이 침공에 대응하기위해 제국의 국경선을 지키는 모든 부대에 소집령을 내렸고 이는 제국의 국경방위력을 크게 약화시킨다. 하지만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하듯 스틸리코는 이들을 지휘해 라다가이수트의 군대를 격파했다. 하지만 알라리크는 이틈을 노려 호노리우스황제가 숨어있는 라벤나를 포위했지만 바람처럼 달려온 스틸리코의 공격에 알라리크는 부하의 대부분을 잃고 간신히 일리리쿰으로 도주한다. 하지만 스틸리코는 알라리크를 죽이지 않았고 이는 황제의 신임을 잃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407~8년의 라다가이수트의 침공을 격멸한 스틸리코는 의심병 도진 호노리우스는 스틸리코를 처형한다.
한편 408년 겨울 반달, 프랑크, 알레만니 등 게르만 부족들은 얼어붙은 라인강을 건너 제국 영내로 이주하였고, 이것이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상실로 이어지면서 제국에 치명타가 되었다. 항상 철처히 지키던 라인강 방어선이 허무하게 돌파당한 이유는 스틸리코가 이탈리아 방위를 위해 라인강에 주둔하고 있던 제국군을 빼냈기 때문이다. 그러다 스틸리코의 숙청과 게르만족 병사에 대한 학살, 그리고 고트족의 침입으로 제국 중심부가 혼란에 빠지면서 갈리아의 제국군을 지원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이것이 파국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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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년 스틸리코가 숙청된 뒤, 410년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을 이끌고 첫 번째 '로마 약탈' 을 저질렀는데, 기원전 390년의 그것에서 무려 800년 만의 재앙이었다. 그리고 천 년 뒤, 로마는 비슷한 상황에 또 빠지고 만다(...) 서고트족은 스틸리코의 로마군에게 깨진 이후 로마의 동맹이 되었으나 스틸리코가 숙청되면서 서고트족과의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포위만 하고 협상 테이블에서 유리한 위치에 오르는 정도로 끝내려 했으나 라벤나에 있던 황제 호노리우스의 정치력 부족으로 인해 협상은 실패했고 결국 알라리크는 로마를 함락시켜 버렸다. 사실상 서로마 제국은 이때 멸망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보는 사람도 많다.

3.4. 훈족아에티우스


423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죽은 뒤 425년에 조카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즉위했다. 서로마는 이미 방어 능력을 많이 상실한 상태였고 갈리아, 이베리아 반도,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영토반달족,고트족그리고 수에비족에게 털리면서 국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8] 451년~452년에는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갈리아와 북이탈리아를 공격했고[9] 서로마는 가공할 침공에 무력하게 무너지는가 했더니 다행히, 아이티우스가 여러 게르만 부족과 연합해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간신히 저지하여 갈리아의 남부와 이탈리아만은 그나마 지탱할 수 있었다. 아에티우스는 아틸라를 막는데는 성공했지만 이는 로마에게도 큰 상처를 주었다. 투입된 로마군의 3분의2가 전사하는 격전이였고 이 큰 병력 손실에 이듬해에 벌어진 아틸라의 두번째 침공은 막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교황 레오1세의 설득에 회군한다.
그러나 아이티우스는 보니파키우스와 항상 갈등을 겪다가 다음 해에 북이탈리아의 침략을 방관했다는 이유로 불만을 품은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음모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에게 암살당했다. 이후에는 서로마 황제들은 동로마에서 임명되어 부임하거나 원로원에서 선출되게 되었다. 아이티우스도 죽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도 죽자, 455년 반달족이 두 번째 '로마 약탈' 을 자행했다. 이때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도 허무하게 살해당하고 만다.

3.5. 최후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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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우스 사후 로마 제국의 세력도. 이미 서로마잉글랜드에서 철수하였고 반달족에게 북아프리카를 빼앗긴다. 게다가 이베리아 반도갈리아 곳곳에 야만족 세력이 눌러 앉게 되었고, 그 바람에 서로마의 영토는 누더기로 변해버렸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것은 이탈리아반도뿐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살해된 뒤 마지막 20년은 스틸리코나 아이티우스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어떻게든 지탱해나가던 이전 시대와는 달리 사실상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와 같은 게르만 출신 권신들의 입김을 받은 9명의 황제가 연달아 나타났다가 사라지면서 무력하게 몰락해 가는 시절이었다. 다만 이걸 외세에 의해 망했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 게르만 출신이었던 이들 대부분은 오도아케르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정체성을 로마인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간신들이지, 외세는 아니었다.
이 무렵을 전후해 서로마 제국은 갈리아,[10] 브리타니아[11], 히스파니아[12], 북아프리카의 '변경'에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앵글로색슨족, 서고트족, 수에비족, 반달족 등이 잇따라 침공해 정착함에 따라 점차적으로 이탈리아 일대만 다스리는 수준까지 축소됐다. 물론 최후의 순간까지도 갈리아 북부[13]과 달마티아 지역[14]을 포함해 수백만 명의 인구를 유지했기 때문에 내부 개혁과 안정에 성공하면 건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암살
5세기 중반까지 서로마는 재기를 하기 위해 2차례의 반달 원정을 시도했다. 1차인 461년에는 서로마가 300척의 배를 준비해 무리해서 반달을 치려고 하지만 노련한 반달족의 왕 겐세리크의 화공 작전에 함선이 싹 다 불타버렸다. 낙담한 황제 마요리아누스는 라벤나로 돌아가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궁정 관료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러고 나서 궁정 관료의 좌장이었던 리키메르의 꼭두각시 황제인 리비우스 세베루스가 즉위하나, 4년 후 다시 리키메르에게 독살당했다. 그러자 동로마는 황제로 안테미우스를 보내줬다.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동, 서로마는 반달족을 치려 했다.
동로마의 주도 아래 10만 명이나 되는 군대가 편성되고 카르타고로 쳐들어가는데 동로마 황제의 처남이었던 총사령관 바실리스쿠스는 군사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었다. 반달왕 겐세리크는 평화 협정을 핑계로 항구에 함대를 주둔할 것을 권했고 바실리쿠스는 그대로 해 버린다. 그러자 겐세리크는 7년 전 경험을 되살려 다시 화공을 시전하고 함대는 활활 잘도 타기 시작한다. 그렇게 허무하게 서로마 재생 작전은 망해버렸고 서로마는 동로마에게도 버려져 역량이 크게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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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76년 게르만 족 용병 대장인 오도아케르[15]와 제국의 실권자인 오레스테스[16]가 분쟁을 일으킨 끝에 오레스테스와 그의 형제 파울루스가 오도아케르에게 제거되고, 오레스테스가 세운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퇴위당하면서 서로마는 멸망했다.[17] 물론 동로마 황제의 눈치를 본 오도아케르는 로물루스의 폐위 직후, 황제의 '어의' 를 콘스탄티노플로 보내면서, 자신을 이탈리아의 통치자로 인정해 줄 것을 청했다.[18] 황제 제노는 "일찍이 오레스테스가 쫓아낸 율리우스 네포스(로물루스 황제의 전임자)가 아직 (달마티아에) 건재하지 않느냐" 며 네포스 복위를 말하는 것처럼 말하고는 정작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라는 식으로 사실상 이 문제를 방치하여[19] 사실상 서방제국의 소멸을 인정하였다. 그래도 달마티아에서 기반을 닦아 온 전 황제 율리우스 네포스는 동로마의 임명을 얻어 다시 복귀하게 되었지만 이탈리아 수복 계획을 세우던 중 480년 암살되었고, 같은 해 오도아케르의 침공에 달마티아가 무너지며 서로마는 완전히 끝이 났다. 로마 국가와 제정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 창시자 아우구스투스와 최후의 황제는 이름이 같았다.[20] 건국 1229년 만의[21] 멸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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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년 말의 유럽
프랑크 왕국
서고트 왕국
부르군트 왕국
오도아케르
동고트 왕국
수에비 왕국
율리우스 네포스
동로마 제국
·
반달 왕국

4. 멸망 이후



서로마의 희망이었던 선군 마요리아누스가 죽고 나서 세워진 수아송 왕국(Regnum Syagrii)은 서로마의 한 축인 갈리아 지역이 떨어져 나가면서 세워진 로마인 국가로, 총독이었던 아에기디우스가 초대 왕으로 통치하였고 그의 아들 시아그리우스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486년 프랑크의 남하로 인해 시작된 프랑크와의 전쟁에서 지고 수아송 왕국은 멸망한다. 시아그리우스는 포로로 붙잡혀 다음 해에 처형당한다. 이렇게 서로마 잔존 세력을 없애버린 프랑크족은 나중에 가서는 신성 로마 제국을 건국하고 로마 교황으로부터 로마 월계관을 받으면서 자기네가 진짜 로마인이고 진짜 로마 제국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로마계들도 있었는데 북아프리카 서쪽에 살아남은 로마 전초들이 여럿 되었으며(로마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게 되었지만), 반달족 주변 야만족들과 계속 싸워 나가면서 로마-무어 왕국 등 국가도 세우고 영향력을 끼치던 중, 옛 고토를 수복 중이었던 동로마 제국과 만나 다시 합치기도 한다.

5. 관련 문서


  • 이탈리아/인구
  • 이탈리아/역사
  • 로마 제국
  • 동로마 제국[22]
  • 오도아케르

6. 역사보기 틀




















[1] 그나마 국력이 어느 정도 남아있었던 395년 동서 분할 때의 강역이다. 이후 로마 제국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카르타고와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방속주의 일부 영토를 탈환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끝내 서로마 전 지역을 되찾지는 못한다.[2] 사두정치 시절 로마의 동서 분할통치 기준[3] 로마의 최종적인 동서 분할통치 기준[4]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퇴위 기준[5] 역사적인 인구 변화 등의 내용은 밀라노/인구 참조.[6]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 ~ 421년), 421년 호노리우스와 공동황제로 통치한 인물로, 콘스탄티누스 3세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어 410년대의 혼란을 수습, 이후 서고트와 연합해 스페인의 알라니족-반달족을 공격, 스페인의 상당 부분을 탈환한다. 이 사람의 아들이 바로 발렌티니아누스 3세.[7] 이들의 제위는 길어도 채 1년이 못 되었다.[8] 북아프리카는 당시 로마의 식량을 책임지는 곡창지대였다[9] 1차 원정에서 아틸라는 오를레앙까지 진격했고 2차 원정에서는 이탈리아 북부까지 진군했다.[10] 일단 408년에 라인강이 돌파당한 이후, 프랑크, 알레만니, 부르군트족이 갈리아에 정착했고, 이후 로마를 약탈한 서고트족이 아퀴타니아 지방에 정착한다. 노비오드넘(수와송)을 중심으로 한 북서부 갈리아는 여전히 로마의 통제하에 있었고, 서로마가 멸망한 후인 486년에 프랑크족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존속하였다.[11] 383년부터 현재의 웨일즈 지역은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었다. 407년 마지막 로마군이 반역자 콘스탄티누스 3세와 함께 갈리아로 떠나고, 호노리우스 황제가 브리타니아에 대한 사실상 포기 선언을 내리면서 브리타니아는 로마 제국에서 반강제로 독립하게 된다.[12] 수에비족이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에 정착하였고, 반달족이 한때 이 지역에 정착하였으나 아퀴타니아 지방에서 밀고 들어온 서고트족에게 쫓겨나고 아프리카로 다시 이주한다.[13] 이 지역의 로마 세력은 서로마가 망한 뒤에도 수아송(서로마 시대엔 노비오드눔으로 불렸다) 왕국으로서 상당 기간 세력을 유지하였다. 갈리아 지역에서 로마 세력이 완전히 말소된 건 487년 프랑크 왕국클로비스 1세에 의해 수아송 왕국이 멸망, 국왕 시아그리우스가 처형된 뒤의 일이다.[14] 율리우스 네포스가 지배하는 반독립 영역.[15] 스키리족 출신이다. 부친은 한때 아틸라의 신하였던 에데코.[16] 로마인이며, 오도아케르의 부친인 에데코와 함께 아틸라의 신하로 일했었다.[17] 엄연히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건재했기 때문에 로마의 서방 속주의 상실일 뿐, 로마제국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18]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엄연히 군림하는데 이탈리아의 황제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도도 있었다.[19] 당시 동로마 제국도 내외부로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것을 방관했지만 황제 제노를 포함한 어떠한 로마인들도 오도아케르의 이탈리아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서로마 멸망 후 몇년 뒤 동로마는 발칸에 주둔하던 동고트족들을 테오도리크의 지휘 하에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이탈리아로 보내서 오도아케르를 제거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테오도리크가 동고트 왕국을 세워서 반독립세력이 되어 버려 이탈리아 탈환에는 실패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영토수복보다는 두 고트족을 서로 싸우게 하는 이이제이의 목적이 더 강했지만...[20] 참고로 동로마 제국도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하여 콘스탄티노플 시대를 연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이름이 같은 콘스탄티누스 11세 때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한다.[21] 구체적인 시기는 다르게 볼 수도 있다. 로마 건국인 기원전 753년을 기준으로 하면 2206년만의[22]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비록 영토는 동쪽에 국한되었지만 정식 명칭은 어디까지나 로마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