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시타 도모유키 (r20160425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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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文(1885~1946)
1. 행적
2. 최후와 평가
3. 트리비아


1. 행적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장군(최종 계급 대장).
싱가포르 전투에서의 기동전 대활약으로 말레이의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때 싱가포르를 함락한 이후 영국군 총사령관이였던 퍼시발 장군에게 '예스냐? 노냐?'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자들이 국내에 와전시켜 보도한 것으로, 정작 야마시타 본인이나 그 협상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그런 발언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하지만 '항복할거야 안 할거야!!' 라고 발언했다는 증언은 있다. Thames Television에서 만든 World at War, Bazai 편을 보면 협상에 참여했던 일본군 장교의 그 때 상황에 대한 인터뷰가 나온다. 퍼시발과 야마시타가 포드 공장에서 만나서 협상을 하는데 퍼시발 장군이 항복에 대한 언급이 없이 시간을 끌자 참을 수 없게 된 야미시타가 책상을 치면서 '항복할거냐 안 할거냐' 라고 발언했고 퍼시발이 다시 대답을 돌리자 같은 발언을 반복했고 항복을 하지 않으면 야간공격을 감행하겠다고 하자 퍼시발이 항복하겠다고 했다고 발언했다는 인터뷰가 나온다.
평소에 일본 육군이 현대화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다녔지만, 통제파인 도조 히데키는 황도파인 야마시타를 잠재적 경쟁자로 보고 견제하였다. 게다가 그는 2.26 사건의 주동자들에 대해 동정적이었기 때문에 히로히토 덴노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싱가포르영웅이지만 덴노 접견도 못하고(...) 한 동안 만주로 좌천되어[1] 그다지 활약은 하지 못 했다.
이후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만주에서 불려와 필리핀에서 방어전을 지휘하게 되었으나 이미 대세는 일본군에서 떠나 있어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최초 방침인 루손 결전(혹은 지연전)도 레이테 결전으로 대만 해협 항공전에서의 일본이 승리하자[2] 계획이 바뀌는 바람에 휘하 부대가 전멸하였다.[3]
필리핀 방어전에서는 야마시타는 마닐라를 오픈시티로 선언하고 지연전을 위해 잔존부대를 루손 북부로 이동시키려는 전략을 수립했으나, 당시 마닐라에 남아있던 해군소장 이와부치 산지 제독과 그가 이끌던 해군 육전대[4] 병력이 이 명령을 거부하였다.[5] 해군 육전대는 독단적으로 시가전에 돌입하였고, 그 와중에서 수많은 필리핀인들이 살해되며 이를 마닐라 대학살이라고 부른다.[6] 학살과 시가전으로 인해 사망한 민간인만 10만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결국 해군 육전대는 마닐라 방어에 실패하였다. 해군 육전대 16,000여명의 옥쇄방어측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시가전[7]에서 두개 사단 병력의 미군에게 고작 1,000명 이하의 전사자와 3,000명 수준의 부상자의 피해를 입혔다. 이에 반해 일본군은 미군에 포로로 잡힌 인원까지 합쳐서 300명 정도만 살아 남았다고 한다.
당시 마닐라에서 민간인 학살이 벌어지는 와중에 일본군은 일본 등 추축국에 우호적이었던 중립국 스페인의 영사관에 의도적으로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대검으로 찔러 죽여 50여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당연히 빡칠대로 빡친 스페인은 1945년 4월 일본과 외교관계를 단절해버렸다!
그래도 전쟁이 끝날때까지 40만명 vs 40만명 1:1 드림매치에서 미군에게 1만여명의 전사자를 안겨주고 일본군은 39만여명이 전사하는 사태가 벌어지지만 7개월에 가깝게 맥아더의 부대를 잡아두는데는 성공했다. 결국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속에서 부하들의 할복 권유에 내가 여기서 죽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책임을 진다고 하면서 할복하지 않고 연합군에 항복하였다. 결국 이후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형당하게 되면서 그의 판단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8]

2. 최후와 평가


야마시타는 어느 정도 군사적인 능력은 있었던 인물이지만, 뼛속까지 제국주의 사상과 천황 제일 사상에 젖어있던 군국주의적 인물이었다. 또한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하들을 상당히 부려먹었고, 스트레스가 쌓인 일본군은 민간인들이나 포로 학살을 저질렀다.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이런 전쟁 범죄를 적극 권장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제대로 막으려 들지 않은 것도 역시 사실이라, 이는 후일 전범으로 기소되는 명분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는 어느 정도 독일식의 포로 자치를 생각했다고 하지만, 츠지 마사노부의 독단 행동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실제로는 포로 관리를 허술하게 했다. 당연히 이런 짓은 점령지의 국민들이 일본군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덕분에 덤터기쓰고 희생양으로 내몰린 인물이 천성 친일파인 홍사익.[9]
야마시타는 마닐라 전범재판에 B급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그는 츠지 마사노부가 독단적으로 결행한 싱가포르에서의 대학살과 역시 해군 육전대가 독단적으로 결행한 마닐라 대학살의 책임 전범으로 기소되었고, 유죄가 인정되어 결국 사형당했다. 그가 사형 당한 이유는 그가 직접적으로 학살을 저지르거나 적극 관여한 건 아니지만, 워낙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기에 누군가는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야마시타 본인도 이 사실을 잘 알았기에 자결을 포기하고 항복했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자결한다 해도 워낙 많은 사람이 죽은 사건들인지라, 책임을 물을 사람은 야마시타 말고도 많았기 때문에, 연합국은 결국 그의 부하 중 누군가를 재판에 넘겨 교수대에 올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필리핀에서 벌어진 학살은 이미 언급한 대로 해군 육전대가 멋대로 저질렀고, 싱가포르에서 저질러진 학살 역시 나중에 치치시마 섬의 식인종 다치바나 요시오가 저지른 것으로 밝혀져 사후에 어느 정도의 명예는 회복할 수 있었다.
야마시타는 군인답게 군복을 입은 채로 총살형을 원했지만 미국 정부는 스파이 혐의 등으로 잡힌 경우가 아닌 이상 군인으로 대우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결국 그는 다른 전범들과 마찬가지로 죄수복을 입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죽기 전 마지막 유언으로 "나는 도조놈에게 속았다!!" 라는 절규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동시기 나치 독일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상당히 비슷한 인물. 일본 제국의 만슈타인이라 할 만한 인물이다. 일단 만슈타인이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영.프군과 소련군을 박살낸 것처럼, 도모유키는 영.미군을 박살냈고, 그와 동시에 자국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적국에서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도모유키가 철저한 군국주의적 인물이였듯이, 만슈타인 역시 철저한 나치즘적 인물이였으며, 둘 다 부정하기 힘든 전범임은 확실히다. 그러나 도모유키는 그나마 부하의 잘못까지 뒤집어 써가면서 스스로 죽음을 택한 반면 이게 진정한 사무라이지! 만슈타인은 비겁하게도 끝까지 잘못은 부인하며, 종전 이후에도 국가유공자 취급 받으며, 잘 먹고 잘 살았다.

3. 트리비아


그 유명한(…) 츠지 마사노부가 싱가포르 전투 당시 그 밑에서 참모로 일했다. 그러나 야마시타는 마사노부에 대해 큰 일을 맡겨서는 안된다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그 인간이 후에 엄청난 활약(…)을 한 것을 보면 야마시타에게는 사람을 보는 안목은 있었던거 같다. 그러나 도조 히데키는 그런 평가를 무시하고 츠지 마사노부를 중용했고, 그는 그들에게 파멸을 불러온다.
베트남전 당시 미라이 학살 사건이 논의가 되자, 미국에서는 켈리 중위만 처벌하고 끝낼 게 아니라 야마시타 장군의 판례를 들어 웨스트모얼랜드도 기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0] 물론 펜타곤은 이런 주장을 무시했다. 왜냐하면 미국은 패전국이 아니니까.[11]
  • 이외에도 야마시타는 점령지에서 수탈한 재산과 본토에서 받은 군자금을 몰래 은닉해서 필리핀 모처에 매장해 두었다는, 소위 "야마시타 골드"란 도시전설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12]
  • 야마시타 골드 도시전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미국과 일본이 이 '야마시타 골드'를 거대 규모의 지하자금으로 전환시켜 나누어가졌고 이 자금을 미국이 42개국 176개 계좌에 예치하여 사용하는 대신 일본은 전범책임에서 대거 벗어나거나 묵과받는 혜택을 누렸고 나아가 구소련 및 중국에 맞선 태평양 방위선에 일본을 포함시켜 현재 자민당 정권을 이루게 했다는, 미국과 일본과의 야합을 다룬 이른바 '블랙 이글 트러스트' 음모론이 있다. (출처) 스털링 페기 시그레이브 저 / 김현구 번역 / 옹기장이 출간 '야마시타 골드', 2003
  • 야마시타 골드와는 별개로 재밌는 도시전설이 있다. 일제시기 일본은 조선의 정기를 훼손하여 자손이 해를 입게 할 목적으로 이걸 다른 인간들도 아니고 높으신 양반들께서 진지하게 믿었다는 거에서 뭔가 좀 이상하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지만 어쨌든 조선 땅 곳곳의 혈 자리에 쇠말뚝을 박는 작업을 했었는데, 야마시타가 조선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그 작업을 현장에서 수행 내지 감독했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가 마닐라에서 처형당하기 전, 복역하면서 알고 지내던 한국인 통역관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고, 그 중에서도 창덕궁 모처에 매설한 쇠말뚝의 위치와 그 깊이를 구체적으로 언급했는데, 나중에 그 위치를 확인해보니 정말로 야마시타가 말한 깊이에서 쇠말뚝이 나왔다는 것이다. 야마시타가 정말로 여기 관련됐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현재도 일본이 매설한 쇠말뚝의 위치 파악 및 제거 작업이 진행 중이다. 그리고 이 도시전설은 한국의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공포 웹툰 귀신으로 각색되었다. 물론 쇠말뚝 자체가 도시전설이고, 이 이야기도 카더라일 뿐 신빙성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쇠말뚝은 측량이나 기타 공사 목적으로 박아놓은게 대부분이다. 해당항목 참조.
  • 인도네시아의 스릴러 영화인 데드마인에서도 야마시타골드와 함께 언급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731 부대슈퍼솔져실험을 받아 25사단 병력과 함께 봉인되었다가 풀려난다...
[1] 그것도 싱가포르에서 만주의 벽지로 직행하도록 강요 받다 시피 했다. 사실상 군대에서 나오라는 이야기인 셈.[2] 하지만 이 승리는 전과보고 착오로 생겨난 일이였을 뿐 날아오는 항공기의 숫자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3] 투입병력 8만 1천명 중에서 1천명 만이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4] 한국식으로 말하면 해병대[5] 당시 일본군의 군기가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그리고 육군과 해군과의 관계가 얼마나 험악했는지 증명되는 사건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제작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도 해군 소속 장교들은 육군 소속인 총사령관 쿠리바야시의 후퇴명령을 거부하고 자살 돌격을 행할 정도로 일본군 육군과 해군의 사이는 정말 좋지 않았다.[6] 태평양 전쟁 최후의 전투인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해군 육전대는 후방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방어진에서 최후까지 저항한다. 오키나와에서 그렇게 행동한 것은, 명예로운 죽음을 바라는 것을 제외하면, 시간 끌기라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또 이 때에는 부상자가 너무 많아서 부대 이동 자체가 힘든 상태기도 했다.[7]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방어측이 제대로 된 전략을 세울 경우는 병력차이와 무장의 차이를 무시하고 거의 교환비가 1대1이 나올 수도 있다. 실례를 들자면 1차 걸프전에서 미군 본대가 만일 바그다드 시가전을 벌일 경우에는 이전 모든 전투의 사상자 보다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었다.[8] 또는 "천황으로부터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다" 라고도 한다.[9] 이때 홍사익은 남방총군의 병참감으로 종군했다. 그는 실제로도 전적으로 필리핀에 주둔한 일본군의 후방지원을 책임졌다. 그가 이 곳에 오게 된 이유는 야마시타가 식민지 조선의 경성에 주둔한 20사단 예하 연대에서 근무할 때 홍사익을 만나서 친교를 맺은 인연으로 그 자리에 부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인사는 야마시타가 육군성에다가 "홍사익을 보내주지 않으면 나 제대로 못 싸우겠다!"라는 식으로 나온 것이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10] 야마시타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아닌데도 관리 소홀로 인해 사형이 정당화되었다. 웨스트모얼랜드 역시 학살은 그 휘하 소대장인 켈리가 저질렀지만 어쨌든 상관으로써 관리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나온 주장.[11] 엄밀히 따져서 패전이 아닌 건 아닌데, 그렇다고 베트콩들이 미국 본토로 상륙해서 미국을 개발살을 내 놓거나 국력이 미국을 넘어섰다거나 한 것도 물론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국제 정치는 약자에게 가혹하다.[12] 조선버전 야마시타 골드도 있다. 소위 황금백합(金の百合)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떠돌아다니는 부산 문현동 일대에 있다는 일본 해군 기지의 존재. 다만 확실한 검증이 있지 않고 주창자가 특정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인 것을 보면 전쟁사에 기반한 음모론일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