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r20160728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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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국군주(皇帝)
1.1. 어원
1.3. 유럽 기독교 문화권
1.3.2.1. 조건 1 : 로마 황제의 후계자
1.3.2.2. 조건 2 : 기독교의 보호자
1.3.3. 근대 이후
1.3.3.1. 나폴레옹 이후
1.3.3.2. 편법으로 황제가 되는 방법
1.3.3.3. 19세기 아메리카 및 유럽에서 황제가 있었던 국가들
1.4. 다른 문화권의 황제들
1.5. 기타 황제로 쳐주기 미묘한 사례
1.6. 가짜 황제
1.6.1. 중국
1.6.2. 미국
1.7. 황제라는 별명을 가진 실존 인물
1.8. 황제 지위에 오른 가공 인물
2. 중국 신화의 황제(黃帝) 헌원씨
3. 황제(皇帝)의 동생


1. 제국군주(皇帝)


자기 휘하에 한 국가의 과 한 지역을 통치하는 제후를 동시에 거느리고 다스리는 군주(君主).
일반적인 이라는 군주와 달리, 자기 밑에 신하로서 왕을 둘 수 있다는 점이 황제와 왕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일단 자신의 휘하에 왕을 신하로 둘 정도면, 그 영토의 스케일이 다를테니까 말이다. 영어단어인 Emperor의 번역을 위해 쓰이는 단어이기도 하다. 중국에서는 천자(天子), 일본에 한정해서 천황(天皇)이라고도 불린다. 다만, 아래에 서술되어 있듯이 황제와 Emperor의 개념은 완전히 같지 않다. 반면 유럽의 황제는 주로 위신과 명예의 차원에서 높이 평가되었을 뿐,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진 주권자라는 인식은 결여되고 있다. 또한 동양과 달리 제국의 통치자가 황제일 필요는 없었다.
근본적으로 왕보다 더 격을 높이려는 욕심에서 나온 개념이기 때문에, 실제로 여러 왕국을 지배하지 않아도 황제의 호칭을 쓰는 경우도 많다. 그럴 경우 보통 자기 아들 등 핏줄들에게 왕의 칭호를 준다. 과거 대한제국이나 현재의 일본이 그런 예라 할 수 있다. 대한제국도 진짜 제국이어서가 아니라, 중국이 하도 제국 황제 타령을 하니까, 왕을 칭하면 저절로 한국의 "임금"이 중국의 "임금"보다 낮아지기 때문에, 자주독립국으로서 동급을 유지하기 위해 칭제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처음엔 여러 왕국들을 지배하는 큰 나라의 왕중왕 킹왕짱의 의미로 만든 말이지만, 후대로 갈수록 그냥 하나의 나라의 한 사람의 군주의 의미로 바뀐 것.
이것은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사극 등을 번역할 때 조선의 왕을 "황제"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 조선왕 위에 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왕"이라 번역하면 왠지 같은 성씨를 가진 황제의 동생이나 아들들 여럿중 한 사람 같으니까. 중국에서도 "황제"의 의미가 변질되어 그냥 "왕"처럼 받아들여졌다고 봐도 될 것 같다.
'황제'라고는 하나 정작 역사상에서 '황제(혹은 Emperor)'라는 단어가 쓰인 사례는 생각보다 별로 많지 않았다. 아시아권에선 지배자가 주로 왕권신수설을 내세워 '나라의 지도자 = 신' 으로 섬겨졌기 때문에 보통 천자(하늘의 아들)나 천황(하늘의 임금) 같이 뭔가 신적인 존재임을 상징하는 단어로 부를때가 더 많았기 때문이며, 유럽권에선 역사상 첫 황제 국가인 로마 제국의 경우 원로원 세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직접적인 칭호를 피하면서 그 권한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1.1. 어원


최초로 중국 전토를 통일한 진 시황제 영정(嬴政)이 새로운 통일 국가의 수장에 어울리도록 새로 만든 칭호. 본래 진시황 이전에는 왕이 지금의 황제의 의미와 비슷했고, 왕을 천자라 했으며(주나라가 천자국을 했다) 그 밑의 군주들을 제후, 공이라 불렀다. 그러나 전국시대 말기에 그 제후와 공들이 너도나도 왕을 칭하게 되자, 이 왕들을 모조리 정복한 시황제가 새롭게 한 급 올려서 만든 지위다. 그리고 나중에는 너도나도 황제를 칭하게 된다. 나중에 항우와 유방이 일어나면서 진나라가 쇠락했을 때는 진나라 군주가 자진해서 왕으로 직위를 낮췄다.
황(皇)은 고대에는 왕(王)의 이음동의자였으며, 제(帝)는 상나라 때부터 군주를 가리키는 표현이긴 했으나 보통은 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당장 옥황상제나 현대 기독교 하나님의 번역어로서 중국에서 사용되는 상제(上帝)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황제라는 단어 자체가 원래 위대한(皇) 하느님(帝)이라는 뜻.[1] 주나라 이후 중국이 점점 인문화되다가, 시황제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 황제라는 칭호가 신격화의 의미를 지니지 않게 되었다.
사기의 "진시황본기"에 의하면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작은 나라 하나의 수장의 명칭으로 쓰인 왕(王)을 대신해서 천하의 지배자를 지칭하기에 적합한 명칭을 올리도록 이사(李斯)를 비롯한 신하들에게 요구했고, 이에 신하들이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중에 가장 존귀한 태황(泰皇)이라면서 태황이라는 호칭을 바치자, 이를 거절하고 태황의 황과 신을 뜻하던 제를 붙여 직접 만든 것이 황제(皇帝)의 호칭이라고 한다. 그 이전에도 삼황오제나 황천상제(皇天上帝) 등의 말에서 보듯이 황(皇)이라는 말과 제(帝)라는 말이 각각 사용되었지만, '황제'라는 단어를 만든 것은 진시황이 처음이다. 그리고 황제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면서 오히려 황(皇)과 제(帝)는 황제라는 말의 약자로 사용하게 되었다. 황제라는 단어를 만들고 의미까지 바꾼 진시황의 위엄
참고로 진시황 사후 진 제국의 수도를 점령했던 항우는 황제라는 호칭 대신 - 명목상 초(楚)회왕의 신하였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 스스로를 초패왕이라 칭하고, 초회왕 웅심은 의제(義帝)로 올렸다. 초한지에 보면 범증이 '패'라는 글자에는 도덕적 정통성이 깃들어 있지 않다며 반대하는 대목이 나온다. 즉 패왕과 어원이 닿는다는 말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황제는 "천하를 통치하는 자"이고 패왕은 "힘으로써 지배하는 자"라고 보면 되겠다.
황제를 구성하는 두 단어인 황과 제 사이에서도 의미 차이가 있다. 그런데 기원부터가 왕(王)의 이체자였던 황(皇)보다 신격 상제(上帝)와 연결성이 있는 제(帝) 쪽이 더 강렬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전설상의 삼황오제도 삼황은 매우 추상적인 존재이지만 오제는 대단히 구체적인 존재로 묘시되고 있다. 즉, 황은 권위는 있지만 추상적으로 위대한 존재라는 개념이며, 제는 실질적인 통치자로서의 개념이 강한 것이다.
한나라 시대에 황제의 아버지로서 명목상의 존칭을 받을 때는 태상황이라고 불렀지 '제'를 붙이지 않았다. 한서의 안사고 주석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천자의 부친이므로 '황'이라고 한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므로 '제'라고 하지 않는다." 또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는 태상황제라고 불렸다. 이처럼 황과 제 양자가 거의 동격이기는 하나 실제로 '황'은 수식어에 가깝고, '제' 쪽에 더 실질적인 권한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담으로 무협소설에서는 황(皇)을 제(帝)보다 높다고 주장하는 경향(예를 들여 열혈강호)이 있지만 실제로 어느 쪽이 높지는 않다.

1.2.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진시황이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 칭한 건 자신의 계승자들이 2대 황제, 3대 황제 하는 식으로 이어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진제국이 예상보다 빨리 망해버리는 바람에 그러한 생각은 계승되지 못했고, 이후 한 왕조에서부터는 한무제광무제니 하는 식으로 시호와 묘호로 칭한다.
중국의 황제 개념은 원칙상으로는 '천하의 지배자'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이를 유지할 능력만 있다면 개나 소나 황제를 칭하는 일이 잦았다. 그리고 이런 잡황제지방의 자칭 황제들은 황제로 불리기보단 지역명+왕 혹은 본명으로 불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오왕이라든가. 그리고 이게 발전해서, 역사상 자주 있었던 황하 유역의 '북조'와 양자강 유역의 '남조'가 대립하는 경우, 서로 황제라고 주장하기 일쑤여서 누가 '정통'인지 가리기가 참으로 어렵게 되었다. 예를 들어 위진남북조의 경우 삼국의 정통성이 한나라로부터 양위받은 위나라에 있는 것인가, 유씨의 황통을 가진 촉나라에 있는 것인가 하는 해묵은 난제부터 시작해 천하를 통일한 수나라는 북조인데 왜 정통성을 남조에 두어 남북조를 이른바 육조(六朝)시대라 칭하는 것인가 하는 논란. 이 부분은 위(후에 진이 되는)나라가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정통 사서의 경향때문인데 이 진나라는 이후 십육국 시대에 밀려나 남조의 시작인 동진이 되었고 이 때문에 이후 수에서 통일한 뒤 정통성을 얻고자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동아시아(동양권)의 황제는 휘하에 을 둘 수 있었다. 군주를 휘하에 두는 군주가 바로 황제인 것이다. 하지만 휘하에 두는 왕이, 왕권(王權)을 가진 전제군주가 아닌 황제의 아들중에서 후계자인 태자(太子)를 제외한 다른 아들들에게 주는 작위로서의 왕도 존재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이 경우가 더 많았다. 왜냐하면 주나라의 봉건제가 무너진 후 전한의 군국제를 거치며, 전면적인 중앙집권하의 군현제가 이루어지면서 독자적인 왕권을 지닌 왕들은 황제권에 심각하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이렇게 독자적인 왕권을 지닌 군주로서의 왕들은 반란의 소지가 농후했는데, 전한의 오초칠국의 난, 서진의 팔왕의 난, 청나라 초기의 삼번의 난 등등 독자적인 왕권을 지닌 왕들은 황제의 중앙집권화에 심각한 위협이 되기 때문에, 중국역사에서는 개판이 아니고 멀쩡하게 돌아가는 나라라면 작위로서의 왕이 더 많았다.
동아시아의 황제는 천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존재라면, 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였다. 물론 명분상 중화사상에 입각한 중국천하의 지배자이지, 실제로 천하를 지배한 것은 아니었고 황제는 타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고 명목상으로 다른 나라의 왕들을 임명하는 형식을 취했다.
황제가 내리는 명령은 칙(勅)이라고 부른다. 유교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 황제와 왕은 구별과 예가 엄격하게 때문에 쓰이는 한자부터 달랐다. 우리나라에서는 구한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명목상 황제국이 된 후에야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이 표현을 사용했다. 사극에서 흔히 나오는 어명보다 당연히 윗단계 표현이다.
황제가 내리는 명령을 담은 칙서(勅書)는 보통 신하를 통해서 전달했는데, 이를 성지(聖旨)로 전달하여 그 명을 받드는 신하는 황제가 실제로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받들었다. 이건 왕이 내리는 교서(敎書)도 마찬가지일듯...
황제의 권위=지위가 성립한 기간은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그리 길지 못하지만 중국의 역사를 설명할 때 황제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도 하다. 진나라가 얼마 못가 쓰러졌지만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다는 중요한 아이콘이 되었고, 이후 한나라도 400여년간 통치하면서 중국에서 최고의 직업 = 황제 라는 공식을 굳혔다. 한나라 이후로는 환란이 와도 옛날과 같이 뿔뿔이 흩어져서 살기 보단, 서로 어떻게 해서든지 잡아먹어서 자신이 킹왕짱이 되겠다는 사명으로 서로 치고 박고 하다가 결국 다시 하나의 국가로 모이곤 했다.(먼 옛날 요순시대의 추억도 있었을 것이다)
즉, 황제라는 자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중화 세계 1인자로서 사실상 중국의 정체성의 중심이다. 황제와 한나라가 없었다면 유럽처럼 수많은 국가들이 지금까지도 서로 치고박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황제의 '저주'는 근대 중국에서도 여전히 영향을 끼쳐, 수많은 군벌들이 서로 황제가 되고자 하여 중국의 국력을 분열시켰으며, 마지막 황제시대의 원세개(위안스카이) 또한 황제가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당시 중국의 혁명 운동을 붕괴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점부터 중국 인민들이 더 이상 '황제'를 모시지 않게 되었고, 그 후로도 공산주의 치하에서 과거 봉건주의 유산들이 철저히 탄압받은 결과, 현대 중국에서는 절대적인 최고의 자리를 의미하는 '황제', 전제군주제가 비난받는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의 국가에 하나의 지도자'라는 절대적인 원칙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지금의 중국 공산당이 사실상 황제의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특이하게 황제가 다른 나라 황제를 제후처럼 책봉하는 경우도 있긴 했다. 금나라남송 황제를 책봉했다(...). 금은 송나라를 완전히 흡수·제압하고 싶었지만 중국 전역을 완전히 제압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송나라 황제를 인정하되 자기네 황제가 책봉하는 방식을 썼던 것. 송나라로서는 굴욕적이지만 전쟁의 종결과 휘종의 유해와 고종의 생모 위씨의 반환을 위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2] 금나라는 송나라 외에도 괴뢰국인 초(楚)나라[3]와 제(齊)나라[4]를 세워 각각 황제를 책봉했었다. 금나라가 북송을 멸망시켰을 때 새로 점령한 장강 이북 지역의 한족들을 직접 통치할 자신이 없어서 대신 북송의 신하였던 장방창(張邦昌)과 유예(劉豫)를 각각 괴뢰 황제로 책봉했던 것. 그런데 초나라 황제로 책봉된 장방창[5]은 금나라 군대가 물러간 뒤 남송으로 도망쳐 버려 초나라 건국이 취소됐고, 유예는 어쨌든 제나라 황제로 버텼으나 남송에 털렸고 결국 금·남송 간 합의에 따라 폐지된다(...).[6] 한편, 근대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경우 책봉의 형식을 쓰진 않았지만 사실상 일본에서 푸이를 만주국 황제로 책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3. 유럽 기독교 문화권



1.3.1. 고대 로마


유럽의 황제는 동아시아와 개념이 전혀 다르다. 동아시아의 황제는 철저히 혈통과 종법제도에 근거한 정통성을 강조했다. 반면에, 로마 제국의 황제는 전통과 법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신권 또한 동아시아보다 강해서 황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동아시아의 황제=최고 종교인[7]인데 반해서 강력한 권력을 가져서 우상화되는 최고 시민인 로마 제국 황제[8]와는 개념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설상가상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면서 독자적 종교 권력(교황)이 너무 강력해서 오히려 신권을 기반으로 하는 왕권강화가 더 힘들게 되었다. 유럽권에서는 뒤늦게서야 주장하게 된 것은 종교의 힘이 너무나 막강해서 한 것이었고, 이후에 왕권이 종교의 힘을 어느정도 제압하고 나서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보통 다른 나라에서는 황제, 그리고 그 다음 격인 왕이라도 일단 멍청이가 보좌에 앉더라도 군주 혈통의 맏아들이기만 하면 밑의 신하들이 알아서 다 하겠지? 정도가 군주 개념의 근본이었던 반면, 유럽에선 성과 나쁘면 교체 가능한 CEO같은 존재였다.
로마 제국의 황제는 혈통에 의한 정통성의 개념이 희박했다. 그리스/로마 문명은 기본적으로 도시국가들에서 출발하였고 시민들이 자비를 들여 도시 방어를 위해 싸웠으므로 이들을 무시하고서 정책을 결정할 수 없었기에, 도시 국가들은 모두 공화정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도시국가들은 기본적으로 부족이 합쳐져서 커진 것이므로 세습되는 부족장이 처음에는 존재하였고 때문에 초기 도시국가에는 왕이 존재하였지만, 나라가 작고 전 시민들이 무장을 하기 때문에 시민들의 권한이 점점 커지자 이들에게 귀족들이 권력을 누려보고자 영합하여 왕권에 도전하였고 왕권이 무너지고 과두정이 되자 시민들이 특혜를 누리는 귀족에게 도전하는 식으로 흘러갔다. 로마만큼은 귀족들이 꼼수를 부려 평민에게 그들만의 평민 정부를 굴릴 수 있게 한 뒤 평민 귀족층을 자신의 기득권안에 끌어들여 어떻게든 귀족 체제를 유지하였으나 나중엔 민중파의 출현으로 대가를 치른다.
하지만 로마의 영토가 거대해진 뒤 몇백여년이 흐르자 도시 국가의 형태로 제국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이런 식의 통치방식은 로마가 보스인 동맹시 연합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몇백년이 지나자 한계에 부딪힌다. 즉 사실상 한나라인데 동맹시들은 계속 차별대우를 받아야 하였으니 이것을 견디지 못하고 반기를 든 것이었다. 로마인들도 그들이 심했음을 알고 있었는지 반기를 들자 순순히 전체 도시들에게 시민권을 내준다.
결국 지방 도시들에게 시민권을 주게 되자 공화정의 핵심인 정부의 정책에 시민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로마는 도시국가식 공화정을 가졌으므로 포로 로마노에서 투표하는 만여명이 정책을 결정하였는데 그 전에도 전체 로마인의 의중을 반영하지 못했는데 숫자가 훨씬 늘어나자 전체 로마인들의 의중을 반영하기가 더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 결과 공화정은 유명무실화 되고 유력 귀족들이 자신의 지지파를 포로 로마노에 불러들여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비일비재하였다. 이럴 때마다 로마 시내는 패싸움이 벌어졌고[9] 국정이 마비되었으며 그 뒤 카이사르폼페이우스 같은 기라성 같은 정치인들이 서로 내전을 벌이더니 마침내 카이사르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잡는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을 제정으로 바꾼다. 하지만 제정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동의가 필요한데 공화정의 전통을 가진 시민과 귀족들이 대단한 거부감을 가질 것이 분명하였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게 공화정 복귀를 선언하고 그 대가로 종신 호민관 특권(Tribunicia Potestas)과 속주 전체의 2/3에 해당되는 속주들의 임기 제한없는 군단 지휘권(Imperium Maius) 두가지를 얻어낸다.
그리고 이 두가지 특권들은 아우구스투스의 개인 재산이었으며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임종 시 이 특권을 후계자들에게 상속할 수 있었다. 이 특권들은 실제로 아우구스투스 이후로 자손들에게 계속 상속되었으며[10] 두 권한의 막강함은 이들로 하여금 사실상 로마 제국 전체의 통치자 역할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듯 법적으로는 여러 시민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초월적 지위를 누리는 특성을 고려해 아우구스투스에서 시작해 오현제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제정이 아닌 원수정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 로마의 황제는 혈연애 연연하지 않게 된 것은 바로 아우구스투스의 자신의 혈연에 대한 집착때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자녀가 딸 한명밖에 없었기에 외손자들, 그리고 누나의 자녀들인 조카들을 서로 혼인시켜 자신의 혈육들을 다수 확보한다. 하지만 괜찮은 남자 혈육들은 일찍 죽고, 살아남은 남자 혈육들은 다 어리거나 변변치 못해서 아우구스투스는 눈물을 삼키며 훌륭한 자질을 가졌으나 자신의 혈육은 아닌 티베리우스에게 후계자는 아욱구스투스의 증손자이자 조카손자인 게르마니쿠스로 삼으라 신신당부하며 사망했다. 문제는 게르마니쿠스 역시 일찍 죽었고, 무슨 저주라도 받았는지 아우구스투스의 혈육들은 화려한 막장테크를 밟으며 네로 황제대에 그 절정에 이르러 멸족하고 말았다.
네로의 죽음으로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이 단절되자 원로원이 이 특권의 소유자를 임의로 지명하게 되었는데[11] 그 때부터 이 특권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자면 원로원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것으로 바뀌어버린다. 따라서 조금만 황제가 약하거나 민심을 잃으면 군단 사령관들은 이 특권을 원로원에게 요구하였고 나중에 원로원의 힘이 약해지자 원로원에 요구하는 것을 생략하게 되었고 나중엔 아무나 이 특권을 자처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을 멋대로 통치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된다.
따라서 로마 황제라는 직위는 공식적인 직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어마어마한 특권을[12] 합법적으로 소유한 일반 시민이었고 이 때문에 이러한 직위는 매우 불안정한데다 이 특권을 갖기 위해선 어떤 조건을 가져야 하는 가도 불분명하였다. 가령 네로의 사후나 콤모두스의 사후 때와 보인 것과 같이 굳이 전임 황제와 혈연이 아니더라도 요구하면 얻어낼 수 있는 특권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엔 혈연보다는 황제의 능력으로 얻어내는 것이라고들 여기게 되었다. 또한 원로원의 권한이 약해지자 황제를 자처하면 원로원은 그냥 형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돼버렸고 따라서 황제가 약해지면 황제를 자처하는 사령관들이 난입하고 이들이 내전을 벌이는 식으로 혼돈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때를 군인황제시대라 부른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네명의 황제를 두면서 이것을 안정하고자 하였고 그가 현직에 있었을 땐 세명의 황제들이 그의 권위를 인정하였으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그가 은퇴하고 그의 후임이 되어 다른 황제들보다 높은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갈레리아누스가 급사하자 네명의 황제는 동등한 위치가 되었다. 결국 이들과 다른 황제를 자처하는 야심가들이 다시 내전을 벌여 군인황제시대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유일한 승리자가 된 뒤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이 그리스도교의 보호자라는 권한을 추가함으로써, 황제의 자리를 단순한 어마어마한 특권을 받은 일반 개인에서 그리스도교의 세속적인 보호자로 바꾸어 버린다. 이는 즉,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메시아관에서 따온 하느님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유일한 통치자로서의 이미지[13]가 덮어씌워진 것이다. 그리고 457년 동로마 제국 레오 1세의 대관식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 의해 거행되면서, 유럽 세계의 지배자 & 그리스도교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모두 맡는 단일 황제 개념이 완성되었다.
따라서 로마 시대의 황제는 동아시아의 황제와 전혀 다른 것이었고 그냥 엄청난 특권을 가진 일반 시민이런 시각이었다. 세습을 통한 정통성 부분 역시 아우구스투스 왕조의 초반 때나 그리하였지 그 이후론 무시되기 십상이었다. 따라서 로마 황제는 시민들 앞에 자주 나타나는 존재였으며, 신하와 황제 간의 관계, 시민과 황제와의 관계는 상당히 수평적이었다.[14] 그 개념은 이후로도 죽 이어져서 영국 사절은 중국 황제에게 삼궤 구고두의 예를 차려야 한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러한 로마식 황제 제도는 이 후 다른 유럽 왕국들과 제국들의 군주제도에도 영향을 크게 끼쳐서, 유럽의 군주제도는 동아시아인이 보기에는 굉장히 이질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다. 때문에 유럽 문화 배경의 창작물이나 역사물을 볼때 동아시아인들은 꽤 미묘한 느낌을 받는다. 한 국가 안에서 XX왕조 XX왕조 하는식의 여러 왕조가 있다든지[15], 왕실의 혈통이 끊기자 외국에 있는 왕실의 먼 친척을 모셔와 왕으로 삼는다던지[16]

1.3.2. 중세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뒤에 생긴 유럽의 황제는 2가지 필요 요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로마 황제(혹은 그 후계자)라는 타이틀과 그리스도교의 보호자로써 교회에게 인정받는 것이었다. 단 국가 자체가 로마 제국 그 자체인 중세 로마(=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는 중세 처음부터 끝까지 황제이자 제국으로 인정받았다.

1.3.2.1. 조건 1 : 로마 황제의 후계자

로마의 후계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전 그리스도교 세계에는 단 1명의 황제가 존재해야 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황제의 수는 불어나기 시작했다.) 다니엘서로 대표되는 4마리의 짐승 예언에 의하면 지상에는 4개의 거대 제국이 차례로 존재하며, 로마 제국은 그 마지막 제국이라고 여겼다. 이른바 보편제국이라는 의미는 바로 이런 측면에서 나온 것이다. 유럽 세계의 제국은 로마 제국이 마지막이어야 했고, 그 제국이 멸망하면 바로 찾아올 천년왕국을 준비하기 위해 로마 황제는 계속 유지될 필요가 있었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갈라진 이후에 서로마의 명장 스틸리코가 꾸준히 로마 제국의 재통합을 노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고, 마찬가지로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로마를 수복한 이유도 진정한 로마 황제가 되기 위해서였다.
중세 초기에는 동방에 잔존한 중세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 세계의 유일한 황제 국가였으나, 이미 서유럽에서 영향력을 잃은 동로마 황제의 서방영토에 대한 지배권은 형식뿐이었다. 그러던 중 800년 성탄 전야에 교황으로부터 프랑크 왕국의 국왕 카롤루스가 망한지 300년도 넘은 서로마 제국의 제위를 넘겨받으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이 사건을 동로마 제국 측에서는 완전히 무시했으나, 이후 카롤루스 대제불가리아와의 전쟁으로 힘겨워하는 동로마 황제 미카일 1세로부터 811년 황제 자리를 승인받으면서 유럽의 황제 자리는 공적으로 이 되었다. 당시 서방의 황제는 단지 황제일 뿐이며, 로마 황제는 아니라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당대인들에게는 명실상부히 두 제국이 존재하게 된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1세기 후인 919년, 동로마 제국과 경쟁중이던 불가리아 왕국의 시메온 1세가 불가리아의 황제로 인정받으면서 유럽에 3명의 황제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황제 직위가 평가절하될듯 하였으나 불가리아 제국은 채 100년이 안되어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에 복속되었다.
서유럽에서는 프랑크 제국이 3분되면서 황제 명칭이 잠시 유명무실해졌으나, 독일의 오토 1세가 황제 자리를 넘겨받아 동로마 제국 황제의 조카딸과 자신의 아들 오토 2세를 결혼시키면서 다시 한번 정통성을 획득하였다. 그가 창립한 작센 왕조의 신성 로마 제국은 이후 잠시 대공위 시대(황제가 없는 시대)를 맞이하기도 하였으나 1806년까지 계속하여 이어졌다.
프랑스의 경우, 카롤루스 대제의 혈통이 끊긴 이후 왕좌를 이어받은 방계 위그 카페로부터 혈통이 이어지는 대혁명 이전의 왕들은 황제를 자칭하지 못했다. 발루아 왕조의 프랑수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손에 넣으려고 혈안이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부터 족보를 증명할 수 있는 정통성과, 서프랑크 왕국을 계승한 국가인 프랑스의 왕은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명령을 받는 왕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아래에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서열로 인정되었다.[17] 카페 왕조와 그 자손들은 프랑스 왕의 대관식을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은 랭스에서 개최함으로서 나름대로 황제에 버금가는 신성한 권위를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이처럼, 유럽에서 황제를 칭하려면 로마 황제로부터 정통성을 내려받거나 인정받았다는 최소한의 족보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나폴레옹 이전까지 수많은 유럽 국가의 왕들은 황제를 자칭할 수 없었다. 사실 9세기 무렵 크누트 대왕이 다스리던 잉글랜드, 10~11세기의 카스티야, 두샨이 다스리던 14세기의 세르비아 등등에서 황제를 스스로 칭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전혀 로마적 정통성이 없었기 때문에 외교적으로는 전혀 인정받지 못했고, 국내에서 몰래 몰래 쓰는 참칭 수준이었다.

1.3.2.2. 조건 2 : 기독교의 보호자

서유럽의 황제에게는 다른 대륙 국가와는 차별되는 또 하나의 전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교황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이 전통은 457년 이후 동로마 황제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서 제관을 받던 것을 시초로 볼수 있으나, 서유럽만으로 본다면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식을 로마 교황이 거행했던 것에서 기원한다.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에게서 서로마 황제위를 받기 전까지는 로마 제국 그 자체인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유럽 전역의 기독교의 보호자였다. 소위 '서로마의 멸망' 이후 열린 5, 6, 7차 기독교 세계 공의회 역시 당대의 동로마 황제가 소집한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플 교회 사이, 동로마 황제와 로마 교황 사이의 잦은 충돌은 서방과 동방 사이의 이질감을 키워나갔다. 뿐만 아니라 랑고바르드족에게 밀려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동로마 세력권이 남부로 쪼그라들면서 동로마가 실질적으로 로마 교회를 보호한다고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러던 중 랑고바르드족을 몰아낸 프랑크족의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의 제관을 얻게 된 것이다.
교황이 열국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중세의 초강력한 교도권으로 생겨난 권위였다. 심지어 제 아무리 제위에 올라있는 황제라도 교황이 파문하면 데꿀멍하는 굴욕을 겪어야 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카노사의 굴욕.
카롤루스 대제 이후로도 서유럽 황제의 대관식은 교황이 집전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역사상 마지막으로 교황이 손수 제관을 씌워준 황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 그런데 카를 5세의 재위 중 종교개혁이 터지는 바람에 교황의 영향력은 급격히 실추되었고 이후 교황이 제관을 씌워준 사례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의 형식적인 인정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때까지도 여전히 이어졌다.
말하자면 신성 로마 제국의 대빵이 되었다고 해도 자동적으로 바로 황제가 되는것은 아닌 것이다. 황제를 선출하는 것은 독일 제후의 권리지만, 그렇게 뽑힌 인물이 황제의 자격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권리는 로마 교황에게 있었다. 교황에게 제관을 받기 전에는 격이 떨어져서 '로마왕'이라고 칭해야 하며, 대립 황제와 같이 로마 교황의 인정을 아예 받지 못하는(무효인 경우) 경우에는 격이 또 한단계 더 떨어져서 '독일왕'이라고 했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메흐메트 2세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이후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를 자칭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무슬림이었으며, 교황이 이딴 것을 인정할 리는 전혀 없기 때문에, 기독교 세계관에서 오스만 제국이 가지는 동로마 제국의 제위는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에서는 자신들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보호하고 있으므로 자신들도 기독교의 보호자라고 했다.[18]
러시아는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스스로 칭제하였다. 그들이 주장한 근거는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정교회의 중심지가 모스크바로 이동하였고, 이반 3세가 동로마 제국 황제의 조카딸과 결혼했다는 것이었다. 신생 러시아 제국은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 칭했다.(제2의 로마는 당연히 콘스탄티노플) 이때 사용한 칭호 차르Tsar는 유럽의 공용어 라틴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황제를 칭하던지 말던지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했고, 표트르 1세가 스웨덴과 싸워 이긴 후 차르 대신 라틴어로 황제(Imperator)라고 선포한 뒤에야 비로소 유럽에 알려졌다. 이후 나폴레옹의 침략을 격퇴하는 등 점차 유럽 전체에서 열강으로서의 위신이 높아지면서 이때쯤에는 서유럽에서도 대충 황제라고 외교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1.3.3. 근대 이후



1.3.3.1. 나폴레옹 이후

이와 같은 제위에 대한 룰을 깨뜨린 것이 바로 나폴레옹. 카롤루스 대제 - 위그 카페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 정통성이 이어진다는 제3의 반열을 근거로 해 로마의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교회의 인정이라는 조건을 맞추기 위해 대관식도 형식상 교황이 집전하기는 했는데, 왕관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썼다.(...)
나폴레옹의 압박을 받아 독일 지역의 영향력을 상실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울며 겨자먹기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포기했다.
나폴레옹 이전까지 서유럽에서 오직 신성로마제국 황제 만이 황제로 인정받았으나, 나폴레옹에 의해 이렇게 왕권신수설을 붕괴되고 힘에 의해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는 사례가 나타나자 이후 '황제 인플레'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황제 즉위 이후 스스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에서 물러난 프란츠 2세는 대신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라 황제라는 명칭을 계속 유지했으며, 외교적으로도 계속 황제 대우를 받았다. 나폴레옹은 조세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녀와 결혼하여 자신의 권위를 더욱 드높이려 하였다.
1870년 호엔촐레른 가문프로이센 왕국이 오스트리아가 배제된 독일 제국을 세우고 황제를 자칭했다. 러시아의 차르 역시 서유럽에서 황제로 대접받았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버렸기 때문에 독일 제국 성립 이후 50년도 되지 않아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유럽에서 황제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1.3.3.2. 편법으로 황제가 되는 방법

재미있는 것은 이때까지 보았듯이 유럽인들은 황위에 있어서 로마 그리스도교적 정통성을 극히 중시했지만, 정작 유럽 밖의 황제들에 대해서는 '아 그런 게 있나보다' 하고 쿨하게 인정하고 넘어갔다는 점이다. 왜 이런 반응이 유럽에서 나왔냐면, 중세 유럽의 국가와 칭호는 개인이 아닌 땅에 귀속되며 세속은 칭호와 국가가 아닌 그 칭호와 국가를 가진 땅을 넘김으로서 이루어졌다. 여기에 더불어 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한 제국은 로마 제국이 유일했으므로 '유럽 내의' 황제는 로마 제국의 황제 뿐이지만 '그 외의 땅'에 대해선 로마 제국의 황제가 아닌 다른 황제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
영국의 디즈레일리 수상이 무굴 제국의 타이틀을 이용해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 황제의 칭호를 추가하기는 했지만, 영국 국내 여론에서 무의미한 허례허식으로 취급되어 조롱받았고, 빅토리아 여왕은 Empress라고 불리기보다는 여전히 Queen이라는 칭호를 썼다. 이런 꼼수의 원조는 포르투갈브라질 제국이다. 인도제국보다 50년 빠르다. 더 웃긴건 인도제국은 형식적으로라도 원래 있던 무굴제국으로부터 제국 타이틀을 얻었는데 브라질 제국은 그냥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조와 브라질 사람들이 제멋대로 선포한 거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나폴레옹 전쟁때문에 국력이 쇠약해지는 바람에 결국 2개월 만에 왕조 가문만 그대로고 나라와 군주는 따로 놀았다.
2차 대전때로 가게 되면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정복하고 에티오피아 황제 직위를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겸임하면서 이런식으로 황제를 자칭한 적이 있었다. 다만 그 후 이탈리아가 패망하면서 군주제도 소멸해버렸다.

1.3.3.3. 19세기 아메리카 및 유럽에서 황제가 있었던 국가들

  • 영국(하노버 가문,작센코부르고타 가문,윈저 가문[19])[20]
  • 독일 제국(호엔촐레른 가문)
  • 프랑스 제국 (보나파르트 가문)
  • 러시아 제국(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로프[21]-로마노프 가문)
  •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K&K,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 오스만 제국(오스만 가문)
  • 멕시코 제국(이투르비데 가문(아구스틴 1세),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막시밀리안 대공))
  • 아이티 제국(장자크 데살린(자크 1세), 파우스틴 술루크(파우스틴 1세))
  • 브라질 제국(브라간사 가문)
  • 미국 (노턴 1세)

1.4. 다른 문화권의 황제들



1.4.1. 인도


인도에서는 마우리아 왕조찬드라굽타를 최초의 황제로 본다. 그 후 그의 손자 아소카전륜성왕 황제(Samraat Cakravartin)인정한다. 그 후 라자(서구의 Prince에 비견되는 칭호다.) 칭호를 쓰는 북인도,데칸,벵갈의 여러 왕조가 난립했고 이슬람 세력이 진입해오면서 술탄이란 칭호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무굴 제국이 인도를 대부분 통일한 후 아우랑제브 황제가 알라기르란 타이틀(세계의 지배자란 의미)를 쓰기도 하였고 페르시아의 영향으로 파디샤 칭호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마라타 제국에서는 전통적인 국왕의 의미인 마하라자(직역하면 대왕)에 더해서 마하라자디라자(왕중왕)이란 칭호를 쓰기도 하였다. 영국이 인도 전역을 지배한 후 인도제국을 성립하자 영국국왕이 인도황제를 겸하게 되었다.

1.4.2. 서아시아


동아시아의 황제와 유럽의 Imperator에 비견될 만한 지위로는 고대 서아시아의 왕중왕(王中王, king of kings)이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도시국가 군주들을 평정한 앗시리아 제국에서 처음 쓰기 시작했으며,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군주들이 군주의 기본 호칭으로 "이란과 非이란의 왕중왕"을 채택한 뒤로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서아시아 일대에서 황제격의 칭호로 정착되었다. 왕중왕(샤한샤)와 동격의 칭호로 왕들의 주인(파디샤)라는 칭호도 있었는데, 오스만 제국무굴 제국의 군주들이 바로 파디샤를 칭했다. 팔레비 왕조 시절에 '샤한샤'의 공식적인 번역을 황제로 정하기도 했다.
페르시아나 이집트의 수장들은 신이거나 신의 위치에 준하는 자들이었으며, 이러한 종교적, 봉건적 수직 질서 아래 일반인들은 평생 보지도 못하고 고위 관료들조차도 황제를 만날 때는 특수한 예를 갖춰야 했다. 한마디로 황제는 형이상학적인 국가 자신 그자체였다.
이슬람 문화권의 칼리프, 술탄들의 경우 보통 칼리프를 술탄의 상위 군주로 보고 황제와 왕의 관계와 동일시하는 편이지만 이는 기준히 상당히 애매하다. 물론 칼리프가 명목상 술탄의 상위 군주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미 11세기부터 정치적 실권을 상실하여 세속 군주들의 종교적 권위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교황에 더 가까울 것이다. 한편 술탄의 경우에도 그냥 "독립적인 군주" 정도의 의미라서, 일반적으로 왕과 동격으로 보긴 하지만 꼭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은 군주의 격을 한 단계 올린다는 의미에서 "술탄 중의 술탄"이라는 칭호를 썼지만, 이는 오스만 제국에만 해당하는 특수한 경우이다. 다른 대부분의 거대 이슬람 국가들은 "대 술탄" 정도의 칭호에 머물렀다. 스윙의 술탄도 있다

1.4.3. 중앙아시아 유목제국


중앙아시아튀르크, 몽골 문화권에서 (Khan)은 왕이나 부족장 격에 해당하며, 몽골 제국이 성장하며 황제 격에 해당하는 칭호인 Khagan(카간 혹은 카안)이 생겼다. '카안'이라는 칭호는 본래 오고타이 칸이 스스로를 타자화하기 위해 붙인 칭호이나, 몽골 제국이 팽창하며, 제국 전체를 지배하는 최고 지위의 칸을 이르는 보통명사화 된다. 보통 한자문화권에서는 이를 "대(大)칸"으로 번역한다. 이후 몽골 제국중국 전토를 장악하면서 몽골의 대칸이 원나라 황제가 되지만 그렇다고 대칸 지위 대신 중국의 황제가 된 것은 아니고 둘 다 겸하고 있었다. 이후 원나라가 주원장에 의해 북원으로 쪼글아들어 다시 내몽골 고원으로 쫓겨나고(북원) 이후 중국식 원 황제 지위는 포기하고 대칸 지위만 이어지다 훗날 청나라가 내몽골을 정벌한 이후 청나라 황제가 대대로 몽골 대칸의 지위도 세습하였다. 그리고 투르크계인 오스만 제국페르시아어인 파디샤와 함께 칸호를 사용했다. 예를 들면 술탄 술레이만 칸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아랍식과 투르크식 군주 칭호를 같이 썼고 유럽 내에서는 룸 카이세리(로마 황제)도 자칭했다.

1.4.4. 기타


아즈텍, 잉카의 군주들도 일반적으로 황제라고 불린다.
서구에서 아직까지 Emperor로 칭해 주는 군주는 일본덴노가 유일하다. 다만 일본의 정식 국명은 1947년 이후부터는 '일본 제국'이 아닌 '일본국' 이다.
아프리카에티오피아에는 하일레 셀라시에가 폐위된 1974년까지 황제가 있었다. 솔로몬과 시바 여왕을 전설적 조상으로 한 솔로몬 왕조가 그것인데, 황통(皇統)이 3000년간 이어져 왔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일본의 덴노가(家)가 만세일계라고 주장하지만 실은 아닌 것처럼 사실 에티오피아의 황통 자체는 여러 줄기에서 이어져 왔던 것이며 3천년 황통설은 근대 국가를 확립한 메넬리크 2세 시대에 만들어진 신화라는 설이 유력하다.

1.5. 기타 황제로 쳐주기 미묘한 사례


조선대한제국으로 개칭한 고종과 그 아들 순종도 칭호는 황제였다. 하지만 당대에 그 권위를 인정해 준 사람은 오로지 독일 제국빌헬름 2세 한 사람 뿐. 흥했다면 모르겠지만 존속 기간이 13년에 불과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은 조선의 일부 취급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동아시아에서 '칭제건원'이 타국에 종속되지 않은 독자적인 천하관을 갖춘 독립국이라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아예 의미가 없는 헛짓거리는 아니지만 애초에 일본의 영향력으로 칭제건원을 했고[22] 그나마도 그게 13년 천하였으니...
고려에서는 광종이나 경종 등 군주 중 일부가 스스로를 황제라 자칭하였다. 그러나 중국 같은 나라를 상대할땐 외교상 왕이라 하였다. 중원의 천자와는 별개로 고려만의 천자를 자칭한 것이다. 그 외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등 한국 고대왕조들은 황제라는 명칭은 사용하진 않았지만 황제국 체제를 어느정도 사용하였다. 중국에는 형식상 번국 행세를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중국 황제와 동등하다는 생각을 한 것. 자세한 것은 외왕내제 참조.
그 외 조선 성종 같은 경우도 일본 다이묘들의 사신들이 황제라 불러주었다.실록의 기록 그러나 자칭한 것은 아니며 이것은 외교 관례를 모르는 일본의 사절들이 서계의 격식을 제대로 몰라 중국과 같이 황제 칭호를 붙인것에 가깝다.
어쨌건 13년 천하가 흑역사로 끝난 사례를 접어두면 한국은 황제직을 해본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에 (외왕내제는? 그야 지금 남아있는 고려 사서가 '글쎄'라서.) 칭제하면 백성의 사기가 오른다는 떡밥도 다소 있다.
대한민국에는 천일국 제 1대 황제 문선명이 있다.
1801년 성립된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阮 王朝)는 스스로 황제를 칭했는데, 청나라에 사절을 보낼때는 그냥 왕이라고 칭하여 청나라를 속였다. 프랑스 식민치하에서도 형식적인 황제의 호칭을 허락받고, 제한적인 황권을 인정받았다(1945년까지 존속). 여기도 일종의 외왕내제라고 생각하면 된다.
남아메리카브라질도 잠시 브라질 제국이였던 적이 있고 황제가 있었다. 원래 포르투갈 제국의 식민지였는데 국내혼란을 틈타 포르투갈 황태자가 그대로 식민지에 눌러앉아 브라질 제국으로 독립을 선포하여 1821년 본국으로부터 독립했었다. 하지만 1889년 공화정으로 바뀌면서 지금의 브라질 공화국이 되었다.
한때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또한 제국이었던 흑역사가 있다. 독재자 보카사가 1976년 12월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제국을 칭했던 것. 자신을 '아프리카의 나폴레옹' 이라고 칭하면서 온갖 삽질을 일삼았지만 결국 채 3년이 못된 1979년 9월 쿠데타로 쫓겨난다.
카리브해의 섬나라 아이티도 제국을 칭한 적이 있다. 독립 영웅 장자크 데살린은 '자크 1세 황제(재위 1804~06)', 7대 대통령 파우스틴 술루크는 '파우스틴 1세(재위 1849~59)'로 황제를 칭했다[23]
멕시코가 스페인에서 독립했을 때, 아구스틴 이투르비데(아구스틴 1세, 재위 1822~23)는 '멕시코 제국'을 선포했으나 단명(短命)했다. 이후 나폴레옹 3세의 간섭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족 막시밀리안(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동생)이 '막시밀리안 1세(재위 1864~67)'로 즉위했으나, 공화파와의 내란 끝에 총살되었다.
11세기 무렵 스페인 왕국의 전신인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6세는 자신을 전 스페인의 황제로 자칭한 적이 있었다. 문제는 위에 나온것처럼 유럽에서 황제를 칭하려면 명목상 로마 제국을 계승해야 했기 때문에 주변국의 비난을 받고, 그가 죽자 이 칭호는 폐지되었다.
제4차 십자군 전쟁으로 인하여 동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잠시 라틴 제국이 들어섰다. 그로 인해 동로마 제국 재건을 위해 서 아나톨리아에 황제의 사위 가문이었던 라스카리스 가문의 니케아 제국, 트레비존드(옛 트라페주스) 지방에 옛 황제 가문이었던 콤네노스 가문의 트레비존드 제국이 생겨났으며, 니케아 제국은 후에 팔라이올로고스 가문이 제위를 찬탈하고서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해 동로마 제국을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20세기 초 불가리아의 공식 명칭은 불가리아어로 차르스트보 벌가리야(Царство България)로 불가리아의 왕은 불가리아어로는 '차르'로 불렀다. 그러나 이 국호는 타 언어로는 "불가리아 왕국"이라 번역되고 불가리아의 차르는 "왕"으로 번역된다. 비슷한 예로는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그리스 왕국이 있다. 국왕을 동로마 제국 황제가 썼던 '바실레우스' 칭호로 불렀다. 외왕내제?
2차 세계대전이탈리아에티오피아를 점령하고 영국이 인도 제국을 만들고 인도 황제를 먹은 것을 표절해서 당시 국왕인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에티오피아의 황제의 칭호를 주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연합군에게 무너지고 국토가 황폐화되는 현실속에 종전 후 이탈리아 왕정이 폐지되면서 망했어요.
이외 1970~1990년대 초까지 존재하며 황제를 자칭하다가 중국 당국에게 처형된 석정무, 석금신, 정흥래, 장청안 등의 수많은 참칭 황제가 있다.
수 많은 왕조에서는 살아생전에 황제를 한 적이 없지만 죽은 이후 황제로 추서된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삼국지에만 여러명이 등장하는데 그 예가 고자황제조등, 조숭, 조조(이상 위나라), 손종, 손견(이상 오나라), 사마의(진나라) 등이 있다. 조선왕조도 대한제국 선포 후 건국자인 태조정조에서 철종까지의 임금들을 황제로 추존하였다. 거기다 세종대왕도 황제로 추존하지...

1.6. 가짜 황제


나라에 혼란이 올 때 실제로는 황제도 아니면서 황제라고 사칭하거나 황위계승권자도 아니면서 황위계승권자라고 사칭해서 황제 자리를 차지한 가짜 황제들도 여럿 있었다. 삼국지만 해도 원술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며 제정 러시아 제국 역시 가짜 드미트리가 가짜 황제로 유명하다. 일본의 경우 타이라노 마사카도가 덴노를 사칭했었다. 합성 갤러리의 모 유저도 자신을 황제라고 속였다.

1.6.1. 중국


  • 스딩우(石顶武:1947~1953), 스진신(石金鑫: 1983) - 스딩우는 대중화불국이라는 거창한 나라를 세우고 황제에 올랐으나, 중공당국에 의해 반란죄로 체포되어 처형. 아들 스진신은 후주가 되어 "제국"을 재건했으나 다시 체포되어 처벌받는다.
  • 딩싱라이(丁兴来:1981-1990) - 사이비교주. 도덕금문교를 창시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도덕금문황제라고 자칭. 재상과 비빈을 책봉했으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해 10년후에 발견되었다. 체포후 처벌.
  • 장칭안(张清安:1982) - 중원청정국의 창업자. 승상과 문무백관을 임명하고, 장제스를 "위국왕"으로 봉하고(...) 인민공화국을 토벌하기 위한 친정을 감행하려고 했으나 역시 관계당국에 체포된다.
  • 린원융(林文勇:1980-1982) - 성조국(聖朝國)의 창업자. 역시 공안당국에 체포된다.
  • 차오자위안(曹家元:1982) - 옥황대제를 자칭했다.
  • 리청푸(李成福: 1990~1992) - 만순천국을 세웠으나 경찰 세 명한테 체포당한다.
  • 쩡잉룽(曾应龙) - 계획생육정책에 반기를 들고 대유국을 세운다. 군사를 일으켜 병원을 점거하고 의사와 간호사들을 포로하였으나 인민해방군에 의해 제압당한다. 경찰에 허무하게 당했던 다른 황제들과는 달리 군대까지 출동시켰으니 그나마 반란 다운 반란이라고 하겠다.
등등이 있다.

1.6.2. 미국



1.7. 황제라는 별명을 가진 실존 인물


  • 북쪽?
  • 신 러시아 제국의 황제 블라디미르 푸틴
  • 그밖의 지구상 각지의 수많은 신흥국가의 통치자들.
  • "피겨 스케이팅의 여제" 김연아
  • "예능의 황제" 이경규
  • "종합격투기마지막 황제" 에밀리아넨코 효도르
  • "축구의 황제" 펠레[24]
  • "축구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
  • "클래식의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테란의 황제"→"스타판의 황제"[25]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임요환
  •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26]
  • "의 황제" 마이클 잭슨[27]
  • "의 여제" 마돈나
  • "테니스의 황제" 로저 페더러
  • "쇼트트랙의 황제" 안현수/빅토르 안
  • "농구의 황제" 마이클 조던[28]
  • "F1의 황제" 미하엘 슈마허
  • "골프의 황제" 타이거 우즈
  • "가요의 황제" 조용필
  • "발라드의 황제" 신승훈
  • "바둑의 황제" 조훈현
  • "피겨 스케이팅의 황제" 예브게니 플루셴코
  • "신성 중고 제국의 황제" 오로지 1세
  • "신성 삼도제국의 황제" 초송 1세

1.8. 황제 지위에 오른 가공 인물


황제/캐릭터 항목을 참조.

2. 중국 신화의 황제(黃帝) 헌원씨


황제(중국신화) 항목을 참조.

3. 황제(皇帝)의 동생


황제동생황제 한자 표기는 황제(皇弟). 제국의 수장의 동생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한글로 쓰면 동음이의어라서 혼동될 우려가 있고,중국어도 마찬가자리로 황제(皇帝)와 황제(皇弟)의 두 어휘도 발음이 "황디"로 같다. 보통 황제의 동생인 경우는 대부분 선황제의 아들이므로 선황제의 아들로서 받은 친왕이나 군왕등의 작위를 부르므로 잘 쓰이지 않는 단어이다. 반대로 황제의 형은 황형(皇兄) 이라 한다.[29] 황제의 아우여도 엄연히 신하(臣下)이기에 황제인 형에게 신제(臣弟)라고 불렀다.

[1] 서주시대 청동기에는 황상제(皇上帝)라는 낱말이 나오니 위대하신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상서 여형편에서 이 황상제는 한 글씨씩 빠져서 "황제"와 "상제"로 나온다.[2] 해릉왕의 남침 실패 이후에 이 군신관계는 숙질관계로 바뀐다.[3] 송나라 정통론자들은 가짜 초나라라는 뜻에서 위초(僞楚)라고 불렀다. 괴뢰황제의 성을 따서 장초(張楚)라고도 한다. 수도는 현재의 난징인 금릉이었다.[4] 송나라 정통론자들은 가짜 제나라라는 뜻에서 위제(僞齊)라고 불렀다. 괴뢰황제의 성을 따서 유제(劉齊)라고도 한다. 수도는 현재의 한단(邯鄲)인 대명부(大名府)였다. 참고로 한단은 전국시대 조나라의 수도였다.[5] 처음에는 금나라의 요구를 거부하고 황제가 되지 않으려 했지만 금나라가 "변경(북송 옛 수도)이 피바다가 돼도 상관 없다 이거지?"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금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까지만 억지로 황제 행세를 했다(...).[6] 대신 유예는 금나라 황제에 의해 촉왕(蜀王)으로 새로 책봉되었다.[7] 동아시아의 황제는 그 시작부터 천하 제패를 스스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올려 보고하는 제사장과 같은 위치였다. 황제 등장 이전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한 나라의 왕이 부덕하여 천명이 다른 필부에게 옮겨가는'개념이 등장했으므로 황제=신의 등식은 엄밀히 말해 성립하지 않는다.[8] 로마 제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우상화가 진행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삼두정 시절부터 양아버지인 카이사르를 철저히 신격화하여 "신의 아들"(Divi Filius)이라는 호칭을 썼다.[9] 게다가 로마는 시내에 무장 집단을 두는 것이 불법이라 군인도 경찰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시규모의 국K-1[10]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으로 바꾼 것이 적절했는지는 학계에서도 이견이 갈린다. 당시 로마식 공화정으로는 통치가 불가능했다는 것은 분명하나 아우구스투스식 제정도 3세기에 접어들자 전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화정을 개혁하여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의원을 두는 식의 현대식 공화정으로 바꾸던가 아니면 카이사르가 보여준 것처럼 시민들이 독재관을 선출해 그에게 로마를 통치하게 하는 식의 대안들이 나오나 이것들 모두 실현되기에는 모순점들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때문에 카이사르가 암살되기전 대체 어떤 정부를 구상했었었나라는 것이 훌륭한 떡밥인데 이것을 파악하기 위해 학자들이 애썼으나 카이사르는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동방식 왕조를 세운 뒤 아우구스투스에게 제위를 계승할 생각이었는가도 의심스러운데 이미 60줄에 가까운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에게 아무런 황제 수업을 시킬만한 지위에 놓아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안토니우스가 왕관을 바치자 카이사르는 왕관을 거부하였노라라고 아예 비석에 새겨두고 전시까지 하였다.[11] 처음엔 갈바에게 지명하였다가 그가 죽자 오토에게, 그리고 오토가 죽자 베텔루스를 지명하였다. 그 뒤 베스파시아누스가 베텔루스를 이기자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이 특권을 준다[12] 호민관 특권, 영구 군단 지휘권[13] 즉, 왕권 신수설. 이전에도 비슷한 개념은 존재했지만 체계화시킨 인물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측근이었던 주교 에우세비오.[14] 로마 황제들은 그냥 시내를 걸어다녔다. 몇몇은 가마를 타는 것을 즐겼으나 이렇게 하면 당시 시민들이 특이하게 여겼다. 이를 대표하는 예로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의 일화도 유명하다. 어느날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로마 시내를 지나가고 있는데 한 시민이 그에게 다가와 청원을 하였다. 당시 바빴던 하드리아누스가 지금은 그 청원을 들을 시간이 없다고 생까려 하자 그 시민이 "그러면 당신은 (황제로서) 통치할 자격이 없습니다" 라고 대놓고 지적하자 하드리아누스가 발걸음을 멈추고 그 청원을 들어주었다는 것. 동아시아적 황제-신민 관계에서는 반역으로 삼족을 멸해 마땅한 일이다.[15] 동아시아의 경우는 특정 왕조의 종말은 곧 국가의 교체로 보았다. 몇몇 예외는 있었으나, 왕조가 교체되면 국가 이름까지 갈아버리는게 일반적이었다. 왕조의 단절을 국가의 멸망으로 보지않는 견해는 비유럽권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으며, 한국사의 신라만 하더라도 중국과의 교류가 적었던 초기에는 세 가문이 왕을 돌려먹는 등 현대 동아시아인의 관점으론 꽤 이질적이었다.[16] 이는 동아시아식 왕조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일부일처제가 기본인 유럽식 군주와 달리, 동아시아식 군주는 많은 첩(후궁)을 거느리기에 혈통이 끊기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서양의 왕이나 황제들 역시 개인적으로 첩을 두었고 첩의 자식도 있었지만 모두 사생아 취급이라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17] 게다가 프랑스 왕국은 작센왕조 이후의 신성로마제국과 마찬가지로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생긴 국가라서 근본을 따져 올라가면 신성로마제국의 아래에 속하지 않는다.[18] 기독교 국가들이 외교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을 황제로 인정한 것은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칼리프였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무관한 것이므로 '다른 문화권의 황제들' 항목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19] 윈저가의 황제 직위는 조지6세때 끝이 났다.[20] 인도 황제로서만.[21] 홀슈타인 - 고트로프 가문은 표트르 3세의 아버지 카를 프리드리히(1700년 ~ 1739년)에서 나왔다.[22] 일본이 조선을 황제국으로 변신시킨 이유는 조선이 청의 속국이라는 이미지를 떨쳐서 잡아먹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23] 데살린의 후임(혈연관계 아님)인 앙리 크리스토프는 황제가 아닌 '왕(재위 1806~20)'을 칭했다. 아이티의 북부지역만 지배하고 있어서 그랬나...[24] 포어로는 O Rei do futebol,즉 축구의 왕이라고 불리었다.[25] 스타판이 정립된 이후로 보통은 그냥 '황제'라고 부른다. 그냥 테란만의 황제라기엔 스타판 전체에 영향력이 너무나 막강해졌기 때문.[26] 한국 한정. 영어로는 The king of Rock 'n' Roll. 그러나 항목에 가보면 알겠지만 제왕이라고 표기되있다. 제왕,황제 혼용으로 쓰이는듯하다.[27] 한국 한정. 영어로는 The king of pop. 즉, 황제가 아닌 왕이다.[28] 한국 한정. 미국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는 왕을 3인칭으로 지칭하는 his highness의 말장난인 his airness. 물론 중계를 보다보면 the king도 나오고, 역대최고의 선수로 널리 인정받던 워싱턴 위저즈 시절엔 대놓고 중계자가 the greatest of all time이라고 했다.(물론 경기력은 이때가 제일 안 좋았다) 문서화할땐 GOAT라고 쓰인다. 한술 더 떠서 basketball god(!!)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사실 god이란 수식어는 한 분야에서 역대최고수준의 달인을 지칭할 때 종종 쓰는 단어다.예를 들어 guitar god인 에릭 클랩튼. 물론 이 수식어가 붙으려면 웬만한 달인이 아니라 조던이나 클랩튼처럼 정말 역대최고라고 할 정도로 뛰어나야 한다. 예를 들어 조던을 제외하면 god이란 수식어를 달고 있는 농구선수는 없다. 조던의 위치가 그만큼 독보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음악의 경우 여러명이 있는데(제프 벡이나 지미 헨드릭스 등), 종목 특성상 객관적인 우열을 가리기 힘들기 때문.[29] 제후국에서도 안 쓰인건 아닌데 조선의 왕 영조가 형인 경종을 추억할때 황형이라는 명칭을 쓰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