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작전 (r20190312판)

 

Operation To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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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에 상륙하는 미군, 1942년 11월 8일.
1. 개요
2. 전투
2.2. 오랑
2.3. 알제
3. 결과


1. 개요


1942년 11월 비시 프랑스북아프리카미국, 영국 연합군이 침공한 작전. 독소전쟁 개전 이래 이오시프 스탈린이 강력하게 주장했던 제2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입안되었다. 원래는 유럽 대륙으로 그대로 직행하는 '슬레지해머 작전'이 의논되었으나 영국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고, 대신 먼저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군을 축출하기로 결정되었다. 작전이 성공한다면 연합군은 지중해를 통제할 수 있으며, 1943년에 예정된 남유럽 침공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었다.

1.1. 연합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 상륙작전의 총지휘를 맡았다. 조지 S. 패튼 장군이 지휘하는 미 육군 제2기갑사단, 육군 제3보병사단, 제9보병사단을 포함한 3만 5천명의 서부군은 카사블랑카에 상륙하며, 로이드 프레덴달 장군 휘하의 미 육군 제1기갑사단, 제1보병사단, 제509공수연대를 포함한 1만 8천 5백명의 중부군은 오랑에, 케네스 앤더슨 장군 휘하 영국 육군 제78보병사단 휘하 2개 대대와 미 육군 제34보병사단 및 코만도 부대를 포함한 동부군은 알제에 상륙하기로 계획되었다.

1.2. 비시 프랑스 주둔군


비시 프랑스군은 해군원수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1] 지휘 하에 북아프리카에 12만 5천명의 병력, 해안포, 210대의 구식 전차, 500여기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거기에 카사블랑카에 주둔한 10여척의 전투함과 11척의 잠수함을 고려하면 무시할 수는 없는 전력이었다.
연합군은 옛 동맹이었던 비시 프랑스군이 저항하지 않으리라 기대[2][3]했고, 실제로 여러 차례 잠수함을 이용한 물밑작업을 벌여 상당수의 프랑스 지휘관들을 전향시키기도 했다. 미군은 프랑스군이 먼저 발포하지 않는 한 그들을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2. 전투



2.1. 카사블랑카


서부군은 1942년 11월 8일 모로코의 사피, 페달라, 케니트라에 상륙했다. 미군은 프랑스군의 무저항을 기대했기 때문에 포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작전 시작 전날에 프랑스군에서는 연합군에게 항복하기 위한 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나 좌절되었고 프랑스 해안 방어선만 더 견고해지는 결과만 낳았다.
미군의 기대와는 달리 해안에 상륙하자마자 프랑스군의 포탄이 날아왔다. 대부분 전투경험이 전무한 미군 장병들은 즐겁게[4] 상륙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미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전투함과 항공기들이 지원을 시작한 후에 공세를 개시하여 애당초 전투의지가 열악했던 프랑스군을 항복시켰다.
카사블랑카의 프랑스 해군 군함들은 짱박혀 있던 중 헨리 헤위트 제독이 지휘하는 미 해군의 습격을 받아 순양함 1척, 구축함 6척, 잠수함 6척이 수장당했다. 전함 장 바르가 하나뿐인 포탑으로 저항했지만 곧 제압되었다.

2.2. 오랑


미군의 경험 미숙과 프랑스 해군의 저항으로 작전이 지연되긴 했지만 상륙 자체는 성공적이었고, 9일까지 프랑스 포대와 포탄을 주고받은 후 오랑을 포위한 뒤 영국 해군 전함들의 포격으로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미군이 처음으로 공수부대를 투입하기도 했다. 두 비행장을 제압하기 위해 509 공수대대가 투입되었는데, 기상악화로 수송기 37대중 30대가 불시착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그래도 결국엔 비행장을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2.3. 알제


400명의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봉기한데다 대다수의 프랑스군 지휘관들이 전향하여 별다른 문제없이 상륙에 성공했다. 영국의 구축함 두 척과 프랑스 포대가 교전한 것이 유일한 전투인데, 사상자가 한 명도 없었다.


3. 결과


애초에 프랑스군 내부에서 무저항파와 저항파간에 나뉘어 내분이 벌어졌고, 프랑스군의 사기도 대체로 낮았던데다 병기의 질도 떨어졌고 수적으로도 압도당했기 때문에 애초에 승산은 없었다. 그래도 전투경험이 전무한 미군을 상대로 상당한 출혈을 강요할 수는 있었으며, 연합군은 500여명이 전사하고 720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문제는 그 대가로 프랑스군의 사상자만 3,500여 명에 달했다는 것.[5]
한편 이미 매국노로 찍혀있었던 다를랑 제독은 항복의 대가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의 정치 및 군사분야를 총괄하는 고등 판무관 자리를 보장받았는데, 이에 분노한 현지 프랑스 청년에게 암살당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비시 프랑스군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꼭지가 돌아 비시 정권의 자치권을 인정받던 프랑스 남부를 바로 점령해버렸다. 이것이 안톤 작전이며, 명목상으로는 남프랑스로의 연합군 상륙을 방어한다는 목적이었다. 그 와중에 프랑스 함대는 나치에게 자신들 배를 내줄 수 없다며 툴롱 항에서 자침해 버리거나 도주하여 연합군에 합류하였다.[6]
횃불 작전의 성공으로 연합군은 이집트리비아를 넘어 진격해온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병력과 연계하여 북아프리카의 추축군을 튀니지로 몰아넣은 뒤 소멸시킬 수 있었다.

[1] 본래 정식 지휘 계통엔 없었으나, 본토에서 아들을 만나고자 잠시 이곳에 왔다 졸지에 현지 최선임자가 됐다.[2] 그러나! 지난 캐터펄트 작전으로 영국에게 엄청난 악감정을 가진 프랑스군이 대부분 이었다. 동지라고 생각했는데, 엄청난 뒷통수를 쳤으니 당연하다고 볼수 있다. 이들은 회유하러온 미국 공작원에게 미군이 아닌 그 입에도 담기 더러운 겁쟁이, 사기꾼인 영국놈들이 온다면 제네바 조약이고 뭐고 그 개자식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숨통을 끊어버리고 우리는 최후의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3] 다만, 일부 불빠+(영국이 욕을 먹는 반사이익을 노리는)독빠 밀덕들을 중심으로 캐터펄트 작전등에 대해 '영국이 동맹이었던 프랑스의 뒤통수를 쳤다' 는 식의 의견이 자주 나오기는 하지만... 영국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럴만 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았다는 것이 현대 역사학계나 밀덕계의 중론이다. 프랑스가 항복하고 친독계 괴뢰정부인 비시 프랑스가 성립된 이상 프랑스의 군사적 자산을 독일이 활용하게 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인데... 세상에 대체 어떤 나라가 전쟁중인 적국의 전력이 강화되도록 가만히 손 놔두고 보고 있겠는가? 애초에 영국 입장에서 보면 비시 프랑스군이야말로 함께 대항하던 적인 나찌 독일에 붙은 배신자인데, 자신들도 상대에게 등을 돌리고 적으로 돌아선 처지이면서 정작 상대에게 공격당하니 배신이라고 악을 쓰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다. 뭐 프랑스 입장에서는 본토가 완벽히 짓밟힌 입장에서 할 수 없이 굴복한 것이라고 주장할수도 있겠으나... 그런 식으로 따지면 애초에 본토를 지켜내지 못한 것은 프랑스 자신의 책임이고, 영국 역시 섬나라라는 특성상 독일의 해상전력 강화는 곧 자국의 목이 졸려드는 상황이므로 어쩔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는 것. 결국 영국의 행동을 배신행위라고 보는 관점은 전쟁의 엄혹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애매한 감상주의적 관점이나, 당시의 정세에서 무조건 프랑스의 입장만을 우선시하는 프랑스 중심 관점에서나 나올법한 입장이라는 것.[4] 몇몇 증언에서는 일부 미군이 상륙전에 쏘지 마시오 우리는 미군이고 당신의 친구다 라는 프랑스어를 반복했다고 한다.[5] 그나마 외인부대는 제대로 싸웠는데, 상부에서 항복하라고 명령이 내려오자 그냥 항복하긴 싫다며 미군 앞에서 가지고 있던 탄약을 죄다 허공에다 쏴버린 뒤 항복했다.[6] 프랑스 해군에서 리슐리외급 다음으로 강력했던 됭케르크급 전함 2척이 이때 자침했다. 이 시기 됭케르크급 2척중 됭케르크는 1940년 메르스 엘 케비르에서 영국 해군에게 크게 파손된 후 장기간 수리 상태였으므로 실질적으로 가동 상태에 있었던 것은 스트라스부르 1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