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 (r2019031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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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집권 초기의 사진, 히틀러괴링이 입고있는게 돌격대(SA) 제복이다 나치당 초기 SA의 영향력을 볼 수 있는 사진 [1]
1. 개요
2. 특징
3. 장검의 밤 이후
4. 평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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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 Sturmabteilung(슈투름압타일룽) 돌격대, 나치 독일의 준군사조직이다.
케피 형태의 모자와 갈색 셔츠 형태의 재킷[2], 몸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숄더벨트(샘 브라운 벨트)와 상징문양이 새겨진 버클이 달린 벨트, 나치당 완장을 패용하는 형태의 제복을 착용하였다. 이것은 집권전 히틀러의 우상이자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무솔리니과 당의 정치 깡패조직인 "전투파쇼"의 검은셔츠 복장을 모방한 것[3]이라고 한다.
돌격대는 사실 완전한 정규 조직이라기보다는 의용병에 가까운 구성이었기에 일부 지역이나 집단 단위로 약간씩 다른 형태의 복장을 착용하기도 하는 등(단 가능한한 색상만은 통일) 세부적인 형태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다. 특히 복장의 유래도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독일이 해외 식민지들을 모두 상실하면서 수요가 없어진 식민지 주둔군용 황갈색 군복과 원단을 땡처리로 구입하여 제복으로 삼았다고 한다. 물론 땡처리한 물건들을 제복으로 삼았다고 자랑할 수 없어서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군의 색상을 채용했다고 변명하였다. 그마저도 당의 자금줄이 빈약하던 시절에는 대원들이 자비로 맞춰야 했었다.
집권 이전 나치당 활동 시기에는 히틀러뿐만 아니라 힘러괴링, 괴벨스 등 훗날 제3제국 정치계의 거물들이 되는 인물들도 돌격대 제복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나치당의 당복이던 돌격대 복장으로 자주 대중집회에 나왔다.

2. 특징


처음에는 나치당 산하 조직은 아니었다. 히틀러의 개인 사병으로 히틀러의 연설이나 나치당 행사시에 공산당이나 다른 정파조직으로 부터 행사를 보호하기 위한 경호조직으로 시작했다. 그러므로 나치당 조직과 통합된 구조도 아니었고 정권 잡기 전부터 나치당 조직과 주도권을 둘러싼 권력투쟁 노선 차이 등이 있었다.
최초에는 루돌프 헤스가 대학생 100인회를 구성할 정도에 돌격대 지휘부는 제국 시절 군 장교 출신으로 패전 후 자유군단 출신 진짜 군인들이 대다수라 깡패와는 거리가 멀었지만[4] 이후 맥주집 폭동으로 출소한 뒤 나치당 재건시 나치당 산하로 들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독립적으로 운영되었으며 나치당 고위직과 돌격대 직위는 중임할 수 없었다. 돌격대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들 돌격대원은 제3제국의 군인이요 나치당은 민간인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군이 민간보다 우위였던 독일 전통에 따라 명목상으로라도 나치당의 하부조직이 되고 나서도 나치 중앙당의 권위는 무시했다. 돌격대는 깡패들이었기 때문에 나치당에 당비를 낼리가 없고 당 대회나 행사 때 경비를 서며 활동비술값을 받아먹으며 평소에는 체력단련싸움질을 하는 조직이었다.
1930년대 이후 합법노선에 따른 반발로 돌격대 일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지휘권을 인수하면서 히틀러의 나치당 하부조직에서 히틀러의 직속조직으로 편성됐고, 실질적인 지휘자인 참모장으로 에른스트 룀을 임명한다. 그런 이유로 에른스트 룀은 자신이 히틀러와 동급내지 또는 2인자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정치깡패노릇을 하면서 나치당의 적(주로 공산주의자들)들과 거리에서 패싸움을 벌이고, 나치당 집회에서 공산당 정치깡패들을 물리적으로 막아내고 공산당 집회에 가선 방해하는 역할을 했으며 소위 친 공화국 성격 언론을 실제 유대인 연관과 상관없이 칭한 유대인언론이나 유대인 기업에대한 불매운동, 유대인이나 또는 유대인스럽게 생겨서 의심스러운 사람에 대한 대한 폭행이나 상점 보이콧 운동을 주도했다. 물론 주 임무는 나치당이 합법 노선을 선언하기 전 맥주집 폭동과 같은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뒤엎을 소위 '사회혁명'을 위한 반란용 병력이었다.
이와 같은 용도 때문에 단순한 정치깡패와는 달리 조직 내에 군대와 비슷한 계급이 있었고 이는 슈츠슈타펠(SS)에게도 계승된다. SS도 사실 SA의 하부조직이었으나 이후 독립하였다.
철저히 엘리트 조직을 추구한 SS와는 달리 SA는 나치당원이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대중조직이 되었다. 여기에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던 에른스트 룀이 지휘를 맡게되면서 좌파적인 조직이 되었다. 사회 혁명이라는 의미로, 기존 좌파였던 슈트라서는 노동자 계층의 권익을 주장했다는 차이가 있다. 오히려 정치참여 방법론으론 대척점에 서있었다. 하여튼 이를 두고 스테이크와 같다고 말한다. 겉은 갈색(나치)인데, 속은 붉은색(공산당)이다. 이 때문에 좌파정당의 지지기반을 잠식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노동쟁의에 개입하여 공산당처럼 노동자의 편을 들기도 했고 공산당 정치 깡패들도 흡수했다. 이때문에 나치는 과격한 좌파정당들의 지지기반을 잠식하여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집권을 도왔다.
일개 개인 또는 정당의 사병집단인 돌격대의 규모는 점점 불어나 바이마르 시기 후반 당시의 독일군 숫자인 10만을 훨씬 뛰어넘는 숫자를 자랑했고, 정권을 잡기 직전엔 40만에 달했다. 나치당이 권력을 잡고서는 완장차고 싶은 떨거지들이 날파리떼처럼 달라붙어서 1년여 만에 200만명으로 불어났다. 신규 가입자 대부분은 다른 정파에서 정치 깡패 노릇하던 붉은전사동맹(공산당), 철모단(우익), 제국국기단(사민당) 등이다. 나치가 정권을 잡자 권력을 맛보려는 기회주의자들도 다수 가입한 것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후, 1933년 2월말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계기로 당시 프로이센 주 내무장관이던 괴링도 개입해 SA는 법적으로 프로이센 주 경찰 보조조직으로 승격되었다. 에른스트 룀은 SA가 기존의 독일군을 대체하고 진정한 국민군으로 개편되기를 원했으나 귀족적이었던 독일 군부는 SA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고, 히틀러는 군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SA를 해체하고 에른스트 룀을 처단하기를 바랬다. 한마디로 말해서 독일판 토사구팽. 히틀러는 룀을 안심시키고자 룀을 무임소 장관으로 임명하여 돌격대를 안심시켰지만, 재무장과 정권안정용 더구나 힌덴부르크 사후 권력을 굳히기 위해 더 이상 국방군과의 마찰은 어렵다고 생각하고 돌격대 숙청을 결심했다.
1934년 6월 30일, SS를 맡고 있던 힘러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히틀러의 명령을 받아 받아 에른스트 룀을 비롯한 SA 지도부 수백 명을 처단하고 SA를 무력화시켰다. 이를 장검의 밤이라고 한다. 돌격대의 숙청 구실은 반란죄와 부패와 동성애 등이 꼽히는데 반란죄와 부패는 나치당이나 돌격대나 그 밥에 그 나물이었기 때문에 구실에 불과했지만 돌격대 고위직의 동성애 성향은 사실이었다. 1930년 히틀러는 룀의 동성애 비판에 대해 "돌격대는 군인이지 도덕집단이 아니다." "개인의 사생활이 관심없다"라는 시대를 앞서간 동성애 옹호 발언을 해야 했을 정도였으며 룀이 동성애자로 자신의 남성 애인 '에드문드 하이네스'를 돌격대 고위직에 올려놓고 젊고 아름다운 돌격대 미소년들을 상납했다고 한다. 이러한 조직이니 돌격대 숙청 소식을 듣고 방법에 대해선 국가권력이 절차를 무시하고 아무리 범죄자라고 쳐도 수백 명을 짐승 잡듯이 도륙한 것에 대한 비판은 있었지만 돌격대 지휘부가 숙청된 것은 나치를 비롯해 모두가 다행으로(?) 여겼다. 독일 공법학회 권위자집단 학자들도 '총통은 최고의 인민재판관으로 실정법에 구애받지 않는다'라는 쉴드와 당시 노환으로 죽음을 앞에 둔 대통령 힌덴부르크도 '단호한 행동과 용감한 개인적 개입으로 반역의 씨를 미연에 제거하고 독일 국민을 커다란 위험으로부터 구하였다'라며 칭송할 정도였다.

3. 장검의 밤 이후


장검의 밤 사건으로 SA는 해체되지 않았으나 정치적 영향력이 떨어졌다. 다만 400만명에 달하는 조직을 갑자기 해체하기도 어렵고 이용하지 않는 것도 아까웠기 때문에 계속 유지되었다. 그리고 나치당에 가입하지 못하는(나치당 집권후 당원 숫자를 급속히 늘리지 않고 엘리트나 사회 핵심계층만 골라 받았다.) 기회주의자들이 대거 가입하면서 조직은 개나 소나 가입하는 보편적인 나치당 조직이 되었으며 나치당 입당 전에 가입해서 공을 인정받아야 입당하는 테크로 활용된다.
한편 숙청된 룀을 대신해 돌격대장에 부임한 빅토르 루체(괴벨스는 루체를 "구제불능의 돌대가리"라고 평가했다.)는 돌격대를 정치깡패에서 준군사조직으로 전환시켰다. 예전과는 달리 부대원들에게 고급 교육을 받게 했으며 특히 군사활동도 할 수 있는 돌격대 엘리트 부대 '펠트헤른할레 (SA-Standarte Feldherrnhalle)'를 창설했다. 펠트헤른할레의 첫 활동은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 때 오스트리아로 진군한 것이며 국방군 소속으로도 배치되어 공군에서는 제7비행사단 소속 연대, 육군에서는 제60보병사단의 제120연대, 제93보병사단의 제271연대로 활동했다. 그리고 육군 소속 부대는 1943년 펠트헤른할레 기갑 사단으로 개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국방군 입대 전에 돌격대에서 기초 군사교육을 받는 용도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장검의 밤 이전의 지위를 되찾기 위한 노력은 1943년 빅토르 루체가 휴가 도중 아우토반에서 교통사고로 죽자 끝났다. 돌격대는 루체의 죽음 이후로 1934년의 숙청 때처럼 서서히 몰락하여 친위대에 지원 조직이나, 예식용 부대로 전락했다. 하지만 펠트헤른할레는 1945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종전을 맞기 직전에 와해될 때까지 활동했다.

4. 평가


1920년에서 1932년까지는 혼란시기의 정치깡패였기에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돌격대를 군복 코스프레 주정뱅이 난봉꾼 집단이라 평가했고 후겐베르거는 무솔리니 흉내나 내는 똘마니로 취급했다.
이후 나치 집권 후 완장을 차고 폭력과 유대인 탄압에 동원되었고 나치의 독재에 하수인으로 활약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슈츠슈타펠(나치 친위대)과 마찬가지로 전범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장검의 밤으로 인해 위상변화를 겪으면서 가입했던 인원이 다수 탈퇴하는 등의 변화가 있었고, 나치 친위대가 워낙 악명높은 범죄행각과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반대급부로 죄악이 가려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래서 처벌수위가 상대적으로 낮다.
하지만 친위대처럼 돌격대도 마찬가지로 군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국제법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다. 전후의 독일 정부가 해당 인물들을 전쟁 영웅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쟁에 참여했던 돌격대는 타군 소속으로 완전히 전환된 관계로 무장 친위대와 달리 전쟁수훈기록 자체는 인정받는다.
[1] 힘러가 입고 있는 제복은 친위대(SS) 제복이다[2] Men At Arms라는 책에 따르면, 얼핏 셔츠처럼 보이지만 밑단이 짧은 재킷으로, 단추를 채운 뒤 그 위에 넥타이와 벨트를 매서 (밑단을 바지 속에 넣은) 셔츠처럼 보이게 한 옷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밑단이 매우 짧은 재킷. 2차 세계대전 시기 영국군의 배틀드레스나 미군의 아이크 자켓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당시 진품들(밑단이 짧고, 벨트를 받치기 위한 고리들이 아랫쪽에 달려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3] 정확하게는 그러한 형식(통일된 제복의 사용)을 따른 것[4] 이 부분은 나치당 인적 구성 문서 참조.